2부 197화
청명(淸名)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기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다.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관계라면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쏙 빼닮을 수 있나.
심지어 목소리조차 완전히 똑같다니.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당대의 성녀(聖女)를 가만히 뜯어봤다.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한 것이었건만…….
결국 받아들이게 됐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역용을 했거나 변성술(變聲術)을 쓰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었다.
전생의 정광이 너무 어릴 때 죽어서 ‘어머니’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남아 있는 여인.
마치 그녀가 환생한 것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엄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백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나 다시 태어나는 게 말이 돼?
아니.
그럴 수도 있어.
나도 그랬잖아. 전생과는 전혀 다른 용모로 바로 환생했지만.
혁련후였던 때였으면 일말의 의문도 없이 부정했겠으나 정광으로 다시 태어난 지금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알아보면 되지.
정광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화가 나서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놀라서 그래요.”
성녀가 살짝 들어 올리고 있던 초승달 같은 아미(蛾眉)를 내렸다.
“다행이긴 하나 궁금하군요. 무엇에 놀라셨습니까?”
“생각 외로 예쁘셔서요.”
“생각 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성녀가 정광의 눈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귀하는 미색에 마음이 흔들릴 사내가 아닙니다.”
“흥미롭네요. 그랬나?”
“그 연배엔 무척 드문 일이라 남색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입니다.”
“더 흥미롭네요. 본보기로 몇십 놈쯤 죽이면 조용해지려나.”
“정말 흥미로운 건 따로 있지요. 바로 귀하라는 존재 자체입니다.”
“저요?”
성녀가 찬찬히 설명했다.
“사장되다시피 한 묵영권가의 무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청년 고수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신강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아. 예고를 하고 나왔어야 하는 건가.”
“일반 교도들이 그를 지지하고 마도 칠대가문 중 몇 가문도 돕고 있지요.”
“제가 추구하는 게 그거에요.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세상이 아름다워지죠.”
“섬랑이라는 기재를 거둬 소교주로 만들려고 하고 계십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있나요. 묵영권가의 유일한 적자이니 뭐라도 해줘야죠.”
“게다가…….”
성녀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귀곡자 어르신을 구해주셨지요. 민 씨 일족은 귀하를 은인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이제 슬슬 본론이 시작되나 보네요. 현유의 누이 되시죠?”
“그렇습니다.”
“현유가 전해 드린 말이 있을 텐데요. 상기시켜 드려야 하나.”
정광은 성녀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 귀곡자 건은 나도 필요해서 한 거야.”
“직접 들으니 새롭군요.”
“나를 떠보거나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고.”
“현유처럼 각골명심(刻骨銘心)하고 있습니다.”
정광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과연. 오누이답네요. 아주 비슷해요.”
“저도 그렇지만 그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알 바 아니죠. 그런데 다른 점도 있어요.”
“다행이군요. 무엇입니까?”
정광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현유는 꽤 똑똑한 편이에요. 가끔 신경을 긁긴 해도 최소한의 선을 알고 지킬 줄 아는 녀석이죠. 그런데 성녀님의 서신을 전해주기 직전에 갑자기 넘어버리더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성녀가 담담히 답했다.
“몇 번 받아주시니 그 정도는 괜찮은가 싶어 도가 지나치게 군 것 같습니다.”
“현유와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하지만 저는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물었죠.”
정광은 희미하게 웃으며 음성에 힘을 실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네 생각에 그건 아니다 싶은 거 아니냐. 그렇다고 거역할 순 없고, 명을 따르되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서 너와 네 조직을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고.”
“…….”
“역시.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도 닮으셨네요.”
“다른 점을 얘기해 주시는 중 아니었습니까?”
정광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곧 나와요. 아까 말씀드렸던 점을 지적하니 현유가 바닥에 엎드려 빌더군요. 자신이 뭐라 변명해도 믿지 않을 것 같으니 제 뜻대로 하라고요.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는데 간단히 줄여 말하면…….”
정광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냥 죽여달라는 얘기였죠.”
“…….”
“누가 현유에게 무리한 지시를 내렸을까요? 현유는 누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저 없이 끊으려고 했을까요?”
“…….”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한 얘기를 했나. 빤히 보시기만 하고. 별로 궁금하지 않으신가 봐요.”
성녀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닙니다. 궁금해서 끝까지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눈동자가 또 흔들리는 걸 보니 현유가 그랬었다는 건 모르셨나 보네요. 누구 때문인지는 잘 아시지만.”
정광은 손가락을 두 개 폈다가 하나를 접었다.
“현유에게 명을 내릴 수 있고 현유가 애착을 가진 곳은 둘밖에 없는데 한등민가(汗騰閔家)는 아니에요. 가주께선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신 분인데 무리한 일을 시키실 리 없죠.”
정광은 남은 손가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럼 신전이 남았네요. 우두머리가 누구였더라? 제사장은 실무만 볼 뿐, 신전을 이끄는 건 성녀시죠. 이런, 마침 제 앞에 계시네요.”
정광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오누이가 어떻게 다른지 말씀드리죠. 동생은 스스로 죽어서라도 누이를 지키려고 하는데 누이는 동생의 마음도 모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성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틀렸습니다. 저만을 위해 이러는 게 아닙니다.”
“아. 그럼 천신님을 위해서구나.”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천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네? 성녀신데요?”
성녀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더 안 믿는 것입니다.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제를 지내도 아무런 응답도 없는 존재를 어떻게 믿습니까?”
“과감하시네. 너무 솔직히 말씀하셔서 걱정되네요.”
“그걸 원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하도 솔직히 대답해 주십시오. 묵영권가가 아니라 전대 교주의 진전을 이었지요? 언젠가 교를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고 말입니다. 귀하의 행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귀하도 저를 도와주십시오.”
정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성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
“……귀하만 하겠습니까.”
“일단 말씀하신 게 맞다 치고. 제가 뭘 해드려야 하는지부터 듣고 싶네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부터 말씀드리지요.”
“특이하시네. 패를 먼저 보여주시려고요?”
성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차피 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제시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뒤에 원하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그렇다면야. 세이공청 할게요.”
성녀는 작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현 교주가 가지지 못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통성이죠.”
성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정광을 칭찬했다.
“소문이 오히려 부족하군요. 맞습니다. 정통성이야말로 전대 교주들과 극명히 대비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핵심을 잘 찌르시니 얘기가 빨라지겠습니다.”
성녀의 말도 빨라졌다.
“천신이 인세에 내려와 자신의 씨앗을 뿌려 교주로 세웠습니다. 그 후 그 핏줄이 계속 이어져 교주가 되었지요. 허나 그 맥은 전대 교주를 마지막으로 끊어졌습니다.”
“그런데요. 요즘 세상에 누가 정통성 같은 걸 신경 쓰기나 하나요?”
정광이 시큰둥해하자 성녀가 정색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지요. 현 교주에 대해 잘 아십니까?”
“…….”
그걸 말이라고.
세세히 말하자면 끝이 없었기에 널리 퍼진 것들만 얘기했다.
“욕심이 너무 많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위인이죠.”
“맞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밖에 몰라도 권좌를 다른 가문에 넘기는 건 이상한 일 아닙니까? 자신의 가문도 자신의 욕심에 포함될 텐데 말입니다.”
“자질이 있는 후손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 아닐까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더 근원적인 문제를 보십시오. 그가 만약 천신의 혈족이었으면 자질 있는 후손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입니다. 역대 교주들도 그러다가 멸혼생사투를 열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현 교주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나이도 많은 데다 자신이 선례를 만들었는데 다른 가문들이 가만히 기다리겠는가?
후사를 정하는 것을 더 늦출 수는 없기에 취할 건 취하고 양보할 건 양보한 것이었다.
성녀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하가 안배한 대로 섬랑이 소교주가 되고 현 교주가 귀천하면 정통성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소교주는 교주가 될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 그 아이를 조종해서 교를 쥐락펴락하실 생각이지요? 굳이 한 걸음 뒤에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때가 되면 귀하가 전대 교주의 후인임을 무공으로 증명하십시오. 그럼 제가 직접 나서서 귀하가 전대 교주의 적자라고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네?”
내가 내 아들이라고 알리겠다고?
천하에 그런 혈통 관계가 어딨다고?
정광이 황당해하자 성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다.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주가 바뀌면 교도들 앞에서 취임식을 합니다. 저를 비롯한 신관들이 하늘에 계신 천신께 제를 지내며 새 교주의 정당성을 묻지요.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요식행위지만 현 교주를 제외한 역대 교주들은 모두 천신의 핏줄이었기에 그 핏줄을 증명하는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그건 아는데.
정광은 손을 들어 성녀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섬랑이 교주가 되고 제가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면 그 녀석을 사람들 앞에서 전대 교주의 무공으로 죽이라는 거죠?”
“그게 제일 극적일 겁니다.”
“그럼 성녀께서 제가 천신의 무공뿐만 아니라 피까지 이었다고 천명하시겠다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성녀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무공을 이은 후인과 피를 이은 적자는 천지 차이지요. 정통성이 다시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귀하는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귀하의 혈육으로 본교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겁니다.”
“…….”
정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뿌옇던 안개가 걷히고 확연히 보였다.
‘환생은 개뿔. 심성 자체가 다르잖아.’
어미는 성녀처럼 똑똑하고 과감했다.
허나 아무리 남이라 해도 그렇지, 눈곱만 한 정이라도 붙였던 아이를 죽이고 이득을 취하라고 권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젠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떠났는데 환생 따위를 할 리 있나.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 모습을 오해한 성녀가 벽에 그려져 있는 기괴한 벽화를 가리켰다.
“끊겼던 핏줄이 다시 나타난 걸 사람들이 믿을까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정광은 알면서도 대충 답했다.
“말을 탄 사람들 같은데 많이 훼손돼서 못 알아보겠어요.”
“그 정도면 제대로 보신 겁니다. 천신께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리신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천신 노릇을 했던 사람이 귀천하기 전에 남긴 것이지요.”
성녀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천신은 흉노(匈奴)의 황족이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형을 피해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다가 본교를 세운 것이지요. 허나 그 혈통은 오래전에 한 번 끊어졌습니다.”
그때 마침 같은 흉노 출신이 세운 북하(北夏)가 망했고 황태손이었던 자가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당시의 교주는 그자를 아들로 삼았고 그 아이가 커서 다시 교주가 된 것이다.
그는 혁련 씨였고 정광의 선조였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는 이가 적지만 한 번 있었던 일인데 두 번 못하겠습니까? 별문제 없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마뇌가 어떤 강수를 뒀는지도 모르면서 달콤한 꿈이나 꾸다니.
정광은 흥미가 떨어져 떠나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아.’
대상을 바꿔서 섬랑에게 정통성을 주면 장차 큰 힘이 되리라.
‘가만. 내 자식이라고 하긴 싫은데.’
그 녀석이 내 어딜 닮았다고.
더구나 내 청명(淸名)이 더럽혀질 것 아닌가?
더 괜찮은 방법이 있었다.
‘그래, 나보다 일 년쯤 전에 죽은 영감이 꼭꼭 숨겨뒀던 자식이라고 하면 되겠어.’
일을 진행하기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정광은 성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게 뭘 원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