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66화 (465/569)

2부 195화

당사자가 걱정해야 할 일

변방인 쿠차에서, 그것도 밑바닥에서 구르다가 천우신조로 출세할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각고의 노력 끝에 멸혼생사투 예선을 통과했다.

이제 본선에서 우승하여 소교주가 되고, 훗날 교주 자리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리라 다짐하며 총단으로 왔건만.

경쟁자인 명문가 적자들에게 무시당하고 가문까지 조롱감이 되었다.

이걸 참으면 마인인가? 부처지.

이를 악물고 상대하려 하는데.

한 아이가 나타나 명문가 놈들을 쫓아냈다.

그 아이도 명가자제였으나 다른 녀석들과 달리 친절하게 대해줬다.

사람인 이상 호감이 생길 수밖에.

생사투를 벌이기 전까지는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적이란다.

적이 신분을 숨기고 접근해 놀린 것이라니!

경악이 분노로 바뀌는 건 필연이었다.

선수필승(先手必勝)!

다소 과장된 격언이지만 상대보다 먼저 손을 쓰면 승기를 잡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

더구나 지금은 가까운 거리에서 양손을 올려 포권하고 있는 상태.

소매 속에서 비수를 꺼내 휘두르면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처는 입힐 수 있을 터.

섬랑의 오른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왼쪽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손강이 눈을 빛냈다.

섬랑 저 버러지가 덫에 걸려 예상대로 움직인 것이다!

‘넌 끝났어!’

감히 총단에서 암습을 해?

그것도 신성한 멸혼생사투 본선 참가자를?

살기 위해 반격하다가 상대를 죽이는 건 정당방위니 누구도 탓하지 못한다.

지금 지켜보고 있는 많은 이들이 증인이 되어주리라.

혹시라도 단칼에 죽이지 못해서 다른 이들에게 제지당해도 상관없었다.

이 망종은 총단에서 멸혼생사투 본선 출전자를 몰래 습격한 죄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형벌을 받게 될 테니까.

섬랑의 손이 소매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만도(彎刀)의 도파(刀把)를 잡았다.

적의 비수는 자신에게 닿지 않지만 자신의 만도는 적을 가르고도 남는 거리를 확보한 것이다.

‘죽어! 윽!’

손강은 만도를 뽑으려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이 새끼가 어떻게!’

섬랑의 손에 비수가 아니라 육포 한 조각이 들려 있는 것 아닌가?

섬랑이 크게 뜨고 있던 눈을 가늘게 좁히며 호들갑을 떨었다.

“무서워라. 뭐 하는 거야? 나를 베려고?”

어느새 순한 인상으로 돌아온 손강은 핏줄이 돋을 정도로 도파를 힘껏 움켜쥐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풀었다.

“깜짝이야. 무슨 육포를 그렇게 꺼내? 네가 공격하는 줄 알고 도를 뽑을 뻔했잖아.”

“그러길 바라면서 도발해 놓고 개소리는. 배고픈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섬랑은 육포를 한입 크게 베어 씹어 먹었다.

손강은 두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하하. 도발은 무슨. 내가 뭐 하러 그래. 비무대 위에서 가지고 놀다가 죽일 건데.”

“네가 나와 겨루기 전에 다른 녀석에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직접 찰과상이라도 입히고 싶겠지.”

“그 반대면 모를까, 너무 나갔네.”

손강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나저나 섭섭하다. 나중에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사이좋게 지내자더니 이상한 의심이나 하고 말이야.”

“의심할 만하니까 하지.”

“증거라도 있어?”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우물우물.

꿀꺽.

섬랑은 육포를 몽땅 씹어 삼키고 아까 자리를 옮긴 소년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오만한 자식들이 똥 취급하며 꺼리는 놈이 정상이겠냐? 더구나 너, 도신이 크게 굽은 만도를 허리에 차고 있잖아. 칠대가문에서 그런 걸 쓰는 곳은 토로번손가밖에 없는데 거기 녀석이 나를 살갑게 대할 리 없지.”

“…….”

“얼굴은 계속 웃는데 변명은 안 하네. 나를 발견하고 급조한 계획이라 만도를 숨길 시간이 없었지?”

“…….”

“차라리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았을 텐데. 방계인 손웅이 차라리 낫네.”

“……뭐?”

“걔는 적자인 누구와는 다르게 모자란 머리를 억지로 굴리지 않고 당당하게 싸웠어. 그 결과 간이 박살 나고 목이 반쯤 잘려서 죽었지만. 꽤 좋은 승부였지.”

손강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 쓸모없는 병신과 비교당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뭐가 어째?

이렇게 심한 모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따라와. 조용한 곳으로 가자.”

“사양할게. 대인께서 또래와 즐겁게 놀라고 하셨지, 싸우라고 하시진 않았어.”

“그깟 쓰레기를 꼬박꼬박 대인이라고 부르는 게 웃기네.”

섬랑은 빙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분은 쓰레기에겐 쓰레기로 보이고 대인에겐 대인으로 보이거든.”

“……너, 알면 알수록 짜증 나는 녀석이구나.”

“하하. 그런 찬사까지. 고마워.”

섬랑은 여유롭게 손강을 상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등줄기가 땀에 젖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미치겠네. 무슨 놈의 살기가 이렇게 끈적끈적해? 아까 그놈들보다 더하잖아.’

손강이 제일 센 것 같았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지금 당장 싸우면 승산이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함부로 손을 쓰진 않겠지만…….’

이놈은 미친놈이었다.

미친놈이 괜히 미친놈인가.

미친 짓을 하니까 미친놈이지.

섬랑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대인! 여기가 안전한 줄 아시고 저를 놓고 가신 것 같은데 절대 아니에요! 빨리 오셔서 이 새끼 좀 치워줘요!’

* * *

정광이 섬랑을 괜히 떼어놓고 갔을 리 있나.

다른 가문의 어른들도 아이들을 밖에 두지 않았는가?

전각 밖보다 안이 더 위험했다.

어중이떠중이로 가득한 예선은 진행하는 가문이 대진 추첨을 임의로 조정할 만큼 융통성이 있었으나 마도칠대가문의 적자들이 참가하는 본선은 무척 빡빡할 수밖에 없었다.

출전 등록을 하는 날, 각 가문의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진표를 만드는데 서로 의심하고 감시하느라 기 싸움이 팽배했다.

얼마나 치열하냐면 아이들의 심신에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는 처분을 받겠지만 이미 망가져 버린 아이는 폐기할 수밖에.

그래서 아이들은 밖에서 기다리되 경쟁자를 해치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

허나 정광은 아이가 아니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이라 사정이 달랐다.

전각에 들어서자마자 따가운 살기로 환영을 받았다.

“진혼. 오랜만이구나. 살아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토로번손가 가주 손재등과 그의 아우 손재우가 정광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반면 정광은 태연했다.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손재등이 코웃음 쳤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진심인데. 무탈하셔야 단 소가주님에게 빌린 돈을 갚으실 거 아니에요.”

손재등의 눈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빚쟁이 단영이 그 불꽃에 공손히 기름을 부었다.

“농을 한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여유가 생길 때 천천히 주시면 됩니다.”

“……내가 그 정도 여유도 없을 것 같은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혹시 몰라 말씀드린 것이니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손재등은 분통이 터졌으나 더 탓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그만한 돈은 없어서였다.

본가에 연락해서 돈을 급히 보내라고 한 지 오래지만 토로번이 좀 멀어야지.

신강에도 전장이 있으면 이런 굴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고이륵단가가 추진하는 전장 사업에 동참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두 놈 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마.’

손재등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았다.

정광은 씩 웃은 뒤 주위를 둘러봤다.

여러 사람들이 정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도 직접 왔네. 역시 마음이 급한가.’

정광은 물론이오, 눈이 마주친 중늙은이의 눈매가 가늘어진 순간.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풍채가 좋은 노인이 나타났다.

천마신교 행정 조직들인 육기(六旗) 중에서 각종 행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예기(禮旗)의 우두머리, 예기주(禮旗主)였다.

그가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예기주 양방이 교우들께 인사드리오.”

좌중의 사람들이 답례하자 예기주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선 출전을 포기하고 사흉대(四凶隊) 쪽을 선택할 가문은 손을 드시오.”

예선을 통과해 이곳까지 온 가문들은 대부분 부끄러움 없이 사흉대를 택했으나 정광 일행처럼 거수하지 않는 가문도 있었다.

“한 번 더 묻겠소. 사흉대를 택할 가문은 손을 드시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좋소. 자제분들이 사흉대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오.”

예기주는 수하를 불러서 거수한 사람들을 사흉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한 뒤 입을 열었다.

“멸혼생사투 본선은 장차 본교를 이끌게 될 소교주를 정하는 신성한 행사외다. 그런 만큼 공정을 기해야 하니 모두 기쁜 마음으로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예기주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문 쪽을 향해 외쳤다.

“모두 수긍하셨으니 가져와라!”

한 무인이 고급스러운 목함(木函)을 들고 와 예기주 앞 탁자에 내려놨다.

예기주는 목함을 열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놨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패(金牌)들이었다.

표면은 밋밋했는데 그것들을 뒤집자 저마다 다른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 번은 이 번과, 삼 번은 사 번과. 이렇게 이어지는 번호끼리 겨루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오.”

예기주는 다시 금패를 뒤집었다.

“이렇게 하면 전부 똑같아지니 부정을 방지할 수 있소. 가까이 와서 정말 그런지 보시오.”

“…….”

사람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금패들을 노려봤다.

예기주의 장담대로 크기도 모양도 질감도, 심지어 색깔까지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확인이 끝나셨소? 그럼 뒤로 돌아서시오.”

이곳은 마도의 총본산 천마신교.

순진한 사람은 없었기에 아무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내공을 운용해 오감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기감까지 날카롭게 다듬어 금패들을 살폈다.

예기주는 자신까지 옥죄는 마기 때문에 치를 떨면서도 분노를 토하지는 못했다.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자들의 신분도 신분인 데다, 이 예민한 사안을 앞두고 괜히 신경을 건드렸다가 무슨 꼴을 당하라고.

‘빌어먹을. 교주가 직접 오면 모를까, 참아야 해.’

교주도 마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오지 않은 상황.

나름 목에 힘을 주고 살던 예기주는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아. 끝나셨소? 이제라도 뒤돌아줘서 감사하오. 다음으로 넘어가겠소.”

사람이 하는 추첨이다 보니 저잣거리에서 노름꾼들이 하는 야바위보다 사용하는 패가 고급스러울 뿐, 방식은 대동소이했다.

예기주는 금패들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꾼 뒤 사람들을 다시 돌려세웠다.

“이제부터 각 가문의 대표가 한 분씩 금패의 자리를 바꾸고 그때마다 다른 가문분들은 뒤로 돌아서시면 되오. 꽤 번거로운 일이지만 공평을 기해야 하니 어쩔 수 없소이다. 혹시라도 누가 허튼짓을 하면 금패에 흔적이 남을 테니 자세히 확인하셔야 하오.”

굳이 주의를 줄 필요는 없었다.

‘크윽! 망할!’

금패가 움직일 때마다 마기가 넘실거리고 살기가 번뜩였다.

당연히 사기를 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판국에 무슨 담력으로 그럴까.

팽팽한 긴장감과 엄청난 마기, 소름 끼치는 살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모든 가문의 대표자들이 금패 위치를 바꿨다.

전부 끝나자 예기주는 조금 전 순서대로 금패를 하나씩 골라 그 위에 손을 올리라고 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힘주어 말했다.

“혹시라도 잘못된 점을 발견한 분은 말씀하시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예기주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소. 금패를 뒤집으시면 되오.”

금패들이 일제히 몸을 뒤집으며 저마다 다른 숫자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각자의 번호를 재빨리 확인했다.

어떤 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어떤 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직 두 명만이 무덤덤했는데 그 중 한 명인 중늙은이가 다른 한 명인 정광을 쳐다봤다.

정광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뭘 봐, 인마.’

중늙은이는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예기주는 사람들이 뽑은 숫자를 확인하고 수하들을 불러 대진표를 작성하게 했다.

수하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한 장씩 완성한 뒤 각 가문의 대표자들에게 나눠줬다.

예기주는 이곳에 나타날 때보다 몇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행사 일정을 알렸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오. 멸혼생사투 본선은 이틀 뒤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로 넘어갈 때 대연무장에서 열릴 것이오. 늦지 않으시길 바라며 이만 물러나겠소.”

예기주는 포권을 하고 떠났다.

장내 분위기에 짓눌려 숨죽이고 있던 자오가 정광에게 속삭였다.

“단주,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추첨도 끝났겠다, 그만 가시지요.”

정광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눈을 두 번이나 마주쳤던 중늙은이가 다가왔다.

“자네가 그 유명한 진혼이군.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괜찮긴 한데 누구시죠?”

“아극소연가 가주 연혁소일세.”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연가주라면 현 교주의 아들이자 아까 나민에게 집적거리다가 복수를 맹세하고 떠난 연규종의 아비 아닌가?

허나 정광은 전생부터 연혁소를 알았기에 담담히 대응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나도 그러길 바라네. 단주라고 불린다 들었는데 조금 전에도 그러더군. 어떤 조직인가?”

“일확천금상단요.”

연혁소는 단영을 슬쩍 보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단가가 전장 사업을 위해 빈객들을 묶어 만든 조직이라는 말이 돌던데 역시 그런가 보군. 자네, 일확천금을 꿈꾸는가?”

“당연하죠. 평생 꾸준히 모으는 것보다 편하잖아요.”

“이번 멸혼생사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있고?”

“네.”

“과연. 대진표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데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겠지.”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보단 제가 싸우는 게 아니라서 그래요. 뭐 섬랑이 알아서 잘하겠죠.”

연혁소의 눈이 반쯤 투명해졌다.

그는 그 기이한 눈으로 정광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당사자가 걱정해야 할 일이지. 알려줘서 고맙네. 그만 가게나.”

“저도 하나 여쭤봐도 되죠?”

“말하게.”

“가주님도 대진표를 보시고 전혀 동요하시지 않던데 왜 그러셨어요?”

“듣기 실망스럽겠지만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아서 그렇네.”

연혁소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정광은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주가 된 아비는 제 놈 사후에 가문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으니 그 변화를 감당하게 될 당사자가 챙겨야지.’

현 교주는 전생의 정광이 죽은 뒤 힘으로 교주 자리를 차지하며 적지 않은 원한을 샀다.

아들인 연혁소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밖에.

자신의 셋째 아들을 멸혼생사투에 출전시키지만 우승할 가능성이 거의 엎다시피 하니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더 있다간 한참 동안 잡혀 있겠네. 그만 가자.’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눈빛을 흘리며 정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번개처럼 한꺼번에 인사하고 나가려 하는데.

학창의를 입은 중년인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진혼. 마뇌께서 부르신다. 따라와라.”

장내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뇌가 왜?’

‘설마 진혼을 회유해서 손에 넣으려는 건가?’

‘어찌 됐든 진혼으로선 저자를 따라갈 수밖에…… 음?’

정광이 그럴 리 있나.

이대로 따라가 주도권을 빼앗길 생각 따윈 없었다.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바빠서 안 되는데요.”

“무어라? 무슨 용무가 있길래 그러느냐?”

난데없이 나타나 소란을 일으켜온 망종이 감히 천마신교 이인자 마뇌의 부름을 거절하다니.

형식상 연유를 묻고 호통을 내지르려고 하는데.

정광이 정성스레 두 손을 모았다.

“천신께서 창설하신 멸혼생사투 본선 등록을 마쳤으니 신실한 교도답게 신전(神殿)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죠. 안 그래요?”

……신실한 뭐?

마뇌의 수하와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정광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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