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4화
사이좋게 지내자
“나 소저. 그자가 누구길래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것이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은 눈매가 날카롭고 목소리 또한 그런 게 살짝 흠이었으나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미남자였다.
생김새로 보나 화려한 차림새로 보나 명가자제(名家子弟)인 게 분명했는데, 나민은 미청년 때문에 집중력이 흩어지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차갑게 노려봤다.
애초부터 싫어했던 파락호가 이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훼방을 놓다니.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있나.
그래도 상대의 신분을 고려해야 했기에 불쾌한 마음을 절제된 어조로 표현했다.
“아실 것 없습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미청년은 나민이 계속 걸음을 옮기려 하자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앞을 막아섰다.
“오늘따라 무척 쌀쌀맞구려. 혹시 내가 실례라도 한 것이오?”
나민은 어이가 없었다.
다짜고짜 추궁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앞까지 막아놓고선 실례라도 한 거냐고 묻다니.
항상 치근덕거리지만 이렇게 무례한 자는 아니었거늘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당장 치워 버리고 총단 곳곳에 깔려 있는 진법과 기관 장치를 머릿속에 욱여넣어야 했다.
“맞습니다. 제겐 무척 소중한 순간이니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
“무엇 하십니까? 어서 비키시지 않고.”
“…….”
미청년은 멍한 눈으로 나민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나민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잡고 있는 다른 손이 보였다.
시선을 다시 올려 그 손의 주인을 주시했다.
미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다소 투명해졌다.
“누구냐 넌?”
정광은 간결하게 답했다.
“진혼요.”
“……긴가민가했거늘. 역시 그 망종이었군.”
정광은 업신여김을 당하고도 피식 웃었다.
여전히 편법을 썼으나 나민에게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자연스레 주입했다.
하면 할수록 능숙해져서 기분이 좋은 판에 이 정도 도발쯤이야.
물론 아무 조치 없이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초면에 무례하시네요. 누구시죠?”
미청년이 신분과 성명을 오만하게 밝혔다.
“흥. 나는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소가주 연규종이다.”
아극소연가는 마도칠대가문 중 하나.
신강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이자 중원과 서역을 잇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요충지인 아커쑤를 다스리는 대단한 가문이었다.
헌데 그런 명문가의 소가주라니!
게다가 현 교주의 손자 아닌가!
정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와아! 성함이 무척 기네요. 아극소…… 하아아. 기억이 안 나네. 뭐라 하셨죠?”
신분을 내세우지 말라는 의미.
연규종의 눈이 더 투명해졌다.
“과연. 소문대로군.”
“저런. 무슨 헛소문을 들으셨길래.”
“정말 헛소문일까?”
“뭐든지 직접 겪어봐야지, 소문 따위를 맹신하면 쓰나요. 섬랑, 그렇지?”
탁목이봉(托木爾峰)을 오르며 정광에게 가르침을 받은 섬랑이 의젓하게 맞장구쳤다.
“물론이죠. 남을 통해 들은 건 제대로 된 게 아닐 경우가 많아요. 차후에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도 이미 자리 잡은 마음을 고치긴 힘들고요.”
정광은 섬랑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칭찬했다.
“아이고 똑똑해라. 잘 아네. 이대로만 커…… 아니지. 그건 곤란해. 어쨌든 너도 아는 걸 왜 다 큰 어른이 모를까.”
덜 큰 어른 연규종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주 똑같은 놈들끼리 어울려 다니는구나.”
“그건 또 아시네. 저나 섬랑이나 잘나긴 했죠.”
“무어라?”
“나 소저와 단 소가주님도 우리 일행이잖아요. 두 분 모두 훌륭한 분들이니 우리도 그런 거 아닌가요?”
연규종은 할 말을 잃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더니 이렇게 싸잡아서 물을 줄이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정광을 쏘아보기만 하는데.
단영이 나섰다.
“연 아우, 이 우형은 보이지도 않는가?”
연규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단영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인사드리려 했소. 잘 계셨소?”
“그런 편일세.”
연규종의 눈이 번들거렸다.
“소제가 알기론 아니오만.”
“무슨 말인가?”
“노파심에 하는 소리이니 언짢아하지 마시오. 단 형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시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외다.”
전장 사업을 한답시고 계속 나대다간 언젠가 횡액을 당할 거라는 협박이었으나.
단영은 흔들리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충고는 고맙네만 우형도 갑자기 노파심이 드는군.”
“내게 말이오?”
“자네밖에 더 있을까. 제대로 된 어른은 소문을 맹신하지 않지. 조만간 연가에도 찾아가 설명할 테니 직접 듣고 판단하게. 헌데 무슨 일로 총단에 왔는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
연규종은 이를 지그시 물고 단영을 노려보다가 또박또박 답했다.
“아우 중 한 명이 멸혼생사투 본선에 참가하게 되어서 격려해 주러 왔소이다.”
“우형과 비슷하군. 무운을 비네.”
“감사하오.”
“아직도 우리 앞을 막고 있는 이유는?”
“…….”
연규종이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결국 침묵하자 정광이 손뼉을 쳐서 시선을 끌었다.
“자. 자. 제게 시비를 거신 걸 보면 제게 용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시원하게 털어놓으시죠. 혹시 알아요? 그러면 후련해지실지.”
연규종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후련해지긴커녕 복장이 뒤집혔다.
-솔직히 대답해라.
-전음으로요?
-당연하지! 나 소저와 혼인하지 않을 거라 천명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냐?
-아뇨. 제대로 알고 계신 게 맞아요.
-헌데 왜…… 왜 나 소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지?
-아. 난 또 뭐라고.
정광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나 소저를 연모해서 질투하시는 거예요?
-대답이나 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연규종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뭐?
나는 고작 짧은 대화만 몇 번 나눠봤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손을 잡게 됐다고?
이 망종이 나보다 뭐가 그리 뛰어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손을 풀어라!
-후우. 겨우 그거 때문에 이 난리를 치시다니.
-겨우가 아니야!
-뭐 똑같은 거라도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긴 하죠. 진작 말씀하시지. 괜히 시간만 버렸네.
정광은 나민에게 물었다.
“소저. 아극소연가 소가주 연규종 님께서 질투 나니까 손을 풀라고 하시는데요.”
연규종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민은 정광과 단영이 연규종을 상대하는 틈을 타 다시 주위를 돌아보며 암기하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빼앗다니.
예전부터 대하기 불편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떨쳐내야 했다.
“연 소가주. 안 됩니다. 제겐 무척 소중한 순간이니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앞으로도 저와 가까워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소가주와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본가에서도 제 뜻을 존중해 줄 것입니다.”
“……!”
“그럼 이만.”
연규종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정광 일행이 그를 유유히 지나치려 하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발작하듯 외쳤다.
“내게는 이러면서 이놈은 왜!”
나민이 담담히 설명했다.
“진혼은 제 스승과 같습니다.”
“누가 그걸 믿겠소? 계속 그러고 다니면 추문이 퍼질 것이오!”
나민이 냉소를 흘렸다.
“소가주처럼 덜 큰 어른들만 믿겠지요. 그런 이들은 필요 없으니 뭐라 떠들든 알 바 아닙니다.”
“…….”
연규종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가 들썩거렸다.
투명해졌던 눈동자가 더 투명해지고 음습한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나민을 위협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려고 억누르고 있던 본성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크크. 내가 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도 그따위로 나와?”
나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양보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크하하하! 한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오늘 일은 잊지 않고 반드시 갚아주마.”
연규종은 클클거리며 사라졌다.
정광은 나민의 손에 자연지기를 불어넣으며 위로했다.
“저야말로 잊지 않고 갚아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자연지기 덕분인지 정광의 말 때문인지.
나민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네, 힘내세요.”
정광 일행은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섬랑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황당하네. 잔소리꾼 아줌마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 헉!”
섬랑은 목을 움츠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나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주변을 훑어보며 기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섬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머리에 정광의 주먹이 떨어졌다.
딱!
“아야! 왜 때려요?”
“때릴 만하니까.”
정광은 한 대 더 쥐어박고 무겁게 경고했다.
“나 소저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넌 뭐 하는 거야?”
“으으. 제가 할 일이 있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정광은 섬랑의 윗머리를 움켜쥐고 한 바퀴 돌렸다.
머리와 몸이 함께 돌며 주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서 낯선 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 언제 저 많은 사람들이…….”
“마침 심심했는지 하나둘 모이더라.”
“망할. 보는 눈이 저렇게 많은데 저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어떡해요.”
“정신을 차려야 하니까.”
정광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섬랑의 마음을 두들겨 팼다.
“얕보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치까지 봐?”
“죄, 죄송해요.”
“허리 똑바로 세우고 가슴 펴.”
“네!”
“사람들과 굳이 눈을 마주칠 필요는 없어.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
“그럴…… 헉!”
섬랑이 앞만 보며 발걸음을 옳기다가 발을 헛디디자 정광은 뒷덜미를 잡아 똑바로 세우고 한숨을 쉬었다.
“이미 볼장 다 봤으니 네 마음대로 해라.”
“아, 아직 아니에요. 만회하면 되잖아요.”
섬랑은 당당하게 걸었다.
“어때요? 이제 괜찮죠?”
“그래. 다들 찬사를 늘어놓느라 바쁘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믿을게요.”
“성장했구나. 좋은 자세야.”
“저야 그렇다 치고. 나 소저는 벌써 헛소문이 퍼지고 있겠네요.”
“신경 쓰지 마. 나 소저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사실 구경꾼들은 섬랑이나 나민보다 정광에 대해 더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해 보이는군.”
“무공도 그렇지만 교주의 손자를 함부로 대하다니. 명불허전이야.”
“다 한때지.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총단에서도 함부로 굴다간 얼마 안 가 경을 치게 될 걸세.”
“연가 소가주의 신분을 처음부터 알았어도 그랬을까? 오기가 솟아서 막 나간 것이겠지.”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연규종과 면식은 없으나 연가 핏줄이라는 것 정도야 보자마자 알았다.
놈이 걸친 화려한 녹의(綠衣)와 허리춤에 찬 장검은 아극소연가의 상징 아닌가?
생김새도 현 교주 연휘준의 어린 시절을 빼닮아서 손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실컷 놀렸는데 무슨.
‘연휘준이 호랑이면 아들은 늑대, 손자는 비루먹은 강아지쯤 돼.’
전생 말년에 아들이 장남을 낳았다고 들었는데 하필이면 연규종이라니.
‘수련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못생긴 게 여인만 밝히고 말이야.’
연휘준의 심정이 짐작됐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음에 차는 녀석이 없을 텐데 무슨 후사를 대비할까.
더 뛰어난 후손이 태어나길 기다리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원성을 사느니, 멸혼생사투를 열어 다른 가문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자신의 대에서 더 큰 권위를 얻는 걸 택할 수밖에.
원래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었지 않은가.
늦둥이 셋째 손자를 출전시키지만 형식적으로 그러는 것일 뿐, 아무런 기대도 안 하고 있을 터.
하지만 정광은 달랐다.
“섬랑.”
“네, 대인.”
“기대할게.”
진심이 전해진 걸까.
섬랑의 어깨가 넓어지고 가슴이 부풀었다.
“맡겨주세요.”
정광 일행은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전각이었는데 그 꼭대기엔 ‘예기(禮旗)’라는 글자가 수놓인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섬랑은 그것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로 가서 출전 등록을 하라고 하기에 어딘가 했더니. 이름처럼 깃발이 있네요.”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멀리 있는 큰 전각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깃발이 꽂혀 있었다.
정광이 그 연유를 설명했다.
“옛날에 천신이 깃발을 좋아했었거든. 그 전통이 남아서 그래.”
“깃발을요? 왜요?”
“높이 치켜들고 말달리던 습관이 있어서.”
섬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신이면 날아다녀야지, 말을 타는 게 말이 되는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으려 하는데 눈앞에 정광의 손이 나타났다.
“정문에서 받은 목패(木牌) 있지? 내놔.”
“호교당 삼향주라는 분이 제가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원칙이야 그렇지만 분실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예선 때도 내가 챙겼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기요.”
정광은 목패를 받고 섬랑의 등을 떠밀었다.
“어른들은 들어가서 출전 등록을 할게. 아이는 여기서 또래와 즐겁게 놀아.”
“또래라뇨?”
“네 경쟁자들. 얕보이지 말고.”
정광 일행은 섬랑만 남겨두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섬랑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다가 한쪽에 모여 있는 소년들을 발견했다.
‘뭐야 저것들은?’
잘 차려입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빙 둘러서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 모습이라니.
‘내 경쟁자들이라고 했지. 본선에 참가하는 녀석들이구나.’
대부분 칠대가문의 적자들일 터.
대인은 놈들과 놀되 얕보이지 말라고 했다.
섬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디 한번 인사라도 해볼까.’
자신만만했던 마음은 녀석들 앞에 서자 사라졌다.
‘새, 샌님같이 생긴 것들이 무슨 살기가 이렇게 짙어?’
그렇다고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 수야 있나.
태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너희들, 멸혼생사투에 출전하지? 반갑다. 나는 섬랑이야. 멋진 승부를 기대할게.”
아이들은 힐끗 섬랑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조소를 흘렸다.
“비열한 수만 쓰면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다고 들었는데 멋진 승부를 입에 담아?”
“참 뻔뻔하네. 얼굴에 칼을 맞아도 똑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궁금한걸.”
“예언 하나 해줄까? 예선에선 그게 통했겠지만 본선에서도 그랬다간 개처럼 구르다가 푸줏간 갈고리에 걸리게 될 거다.”
서로 죽일 듯 노려보던 놈들이 하나가 되어 이죽거릴 줄이야.
그래도 섬랑은 발끈하지 않았다.
말싸움은 싸움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 아닌가?
“이 몸이 밑바닥에서 꽤 오래 굴러서 입 험하기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거라 자부했는데 이거 좀 놀랍네. 요즘 칠대가문에서는 싸우는 법 대신 말싸움만 가르치나 봐?”
한껏 이죽거려 주었으나 소년들은 만만치 않았다.
“빌어먹던 게 뭐 자랑이라고 그리 떠드는 건지. 버러지한테 어울리는 말을 해준 것뿐인데 이게 말싸움으로 들렸어?”
“근데 묵영권가의 후손이 맞기는 한 거야?”
“설마 그럴 리가. 근본도 없는 새끼가 나대는 거지 뭐.”
“맞아도 상관없어. 교주께 나대다가 멸문당한 집안이잖아. 우리도 똑같이 해주자고.”
가문이 조롱을 받자 섬랑의 눈이 붉어졌다.
“애새끼처럼 쫑알쫑알 지껄이기는. 한 놈씩 와봐. 겁나면 한꺼번에 덤비고.”
소년들의 살기가 진득해졌다.
“죽고 싶으면 비무대 위에서 떠들어라.”
“너희들이 더 떠들었잖아. 오줌 그만 지리고 빨리 오기나 해.”
“큭큭. 그러면 진짜 못 할 것 같아?”
소년들이 병기에 손을 대는 순간.
순한 인상의 아이가 다가와 부드럽게 타일렀다.
“얘들아, 그만해. 지금 여기서 싸우면 모두 큰 처벌을 받을 거야.”
소년들은 아이를 아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투덜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 원.”
“근본 없는 놈이 오더니 상종하기 싫은 놈까지 오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저쪽으로 가자.”
소년들이 자리를 옮겼다.
섬랑은 황당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순한 인상의 아이를 돌아봤다.
“네 평소 행실이 어떻길래 쟤들이 저러냐.”
“쟤들보다는 내가 나을걸.”
“딱 봐도 그래 보이긴 해. 어쨌든 고맙다. 덕분에 쓸데없는 싸움을 안 하게 됐어.”
“하하. 다행이네.”
아이가 밝게 웃자 섬랑도 웃었다.
“총단에 너처럼 괜찮은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어. 너도 멸혼생사투에 출전해?”
“응. 할아버님과 작은 할아버님이 등록하고 계셔.”
“기운도 좋으시네. 아버님이 하시면 되잖아.”
“총단으로 오시다가 많이 다치셨거든. 본가로 돌아가셨어.”
“저런. 안 됐네.”
“그러게 말이야.”
“힘내라. 복수하면 되지.”
아이가 헤실거렸다.
“지금 내 실력으론 안 돼. 웃어른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섬랑은 인상을 찡그리며 타박했다.
“왜 이리 패기가 없어? 너 마인 맞아?”
“하하. 미안. 원수는 너무 강하거든. 그래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끄응. 뭔지는 모르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너, 마음에 든다. 밖에서 만났으면 친구로 지낼 텐데.”
“그냥 친구 하자. 그러고 싶어.”
“그래? 하하하.”
섬랑은 크게 웃었다가 두 손을 멋들어지게 모았다.
“나는 섬랑이야. 싸우기 전까진 사이좋게 지내자.”
아이도 활짝 웃으며 포권했다.
“나는 손강.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게 죽여줄게.”
“그래. 잘 부탁…… 뭐? 손강? 설마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
섬랑의 눈이 커지고.
아이의 표정과 기세가 변했다.
손강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소름 끼치는 살기를 발산했다.
“응. 진혼이라는 쓰레기가 내 아버님과 식솔들의 팔을 자르고 가문을 욕보였지. 나는 아직 어리니 너라도 해치워서 기분을 달랠게. 얌전히 협조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