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2화
오래는 못 버텨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맞이하는 아침은 상쾌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허나 그건 극소수의 얘기일 뿐, 정광은 당연히 그 무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여유 있게 빈둥댈 때보다 피곤할 수밖에 없는데 개운하긴 개뿔.
잠에서 깨고도 계속 뒹굴뒹굴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지고 나서야 눈을 떴다.
‘더 잘까?’
그럴 수야 있나. 슬슬 일어나야지.
정광은 할 땐 하는 남자.
체조법을 펼쳐 몸을 풀고 운기조식으로 내부를 다스렸다.
천막 밖으로 나가니 마침 딱 맞게 아침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광은 먼저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인사를 나눈 뒤 젓가락을 잡았다.
“식사하고 바로 출발할 거니까 든든히 드세요.”
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현유 아저씨 아직 안 왔는데.”
“곧 올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네, 대인.”
섬랑은 다쳤던 혀가 많이 나았는지 열심히 먹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오늘 중으로 탁목이봉(托木爾峰)까지 가는 강행군을 해야 했기에 평소보다 더 배를 채웠다.
민현유는 정광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할 때가 돼서야 돌아왔다.
“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출발하기 전에 왔으니까 됐어.”
정광은 민현유의 퀭한 눈을 보며 혀를 찼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그럴 만도 하지. 식구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웠나 봐.”
민현유가 침을 조용히 삼켰다.
“아닙니다. 아버님과만 대화하고 다른 이들에겐 인사만 했습니다.”
정광의 명대로 지존이 진혼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귀환하셨음을 아비에게만 밝혔다는 뜻이었다.
정광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도 오랜만에 돌아와서 아버님이 실감을 못 하시진 않았어? 무정한 놈이라고 화를 내셨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돌아왔다는 걸 믿었는지, 왜 이제야 왔냐고 원망했는지 묻자 민현유가 정색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에이. 아무리 아들이어도 그렇지. 설마.”
“정말입니다. 겉으론 티를 안 내시지만 원래 그런 분입니다.”
정광의 미소가 짙어지고, 민현유의 얼굴은 더 딱딱해졌다.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안타깝기도 해. 귀한 아들이 또 떠나서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전혀 아닙니다. 밖으로만 나도는 제가 부럽다며 한동안 유람을 다니실 거라 하셨습니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터전을 떠나 다른 곳에 숨어 있겠다는 의미.
정광은 임무를 완수한 민현유를 위로했다.
“철없는 아버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정리는 다 하고 온 거지?”
“꽤 애먹었으나 누구도 욕하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저런. 현유 너, 보기와는 다르네. 얼마나 방을 더럽게 썼길래.”
“……그러게 말입니다.”
“뭐 이제라도 깔끔해졌으면 됐지.”
승황대(乘黃隊) 놈들의 시체와 싸운 흔적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는데 더 있을 필요 있나.
정광은 마차 위에 올랐다.
“좋아. 가자.”
“저…… 대인.”
“왜?”
민현유가 소매 속에서 서찰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아버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긴 내용은 아니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심심할 때 볼게.”
정광은 떠날 채비를 마친 일행에게 외쳤다.
“자! 출발하죠!”
질주가 시작됐다.
정광은 마부석에 느긋이 앉아 어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옆에서 마차를 몰며 듣던 귀곡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우원은 원래 신중하고 참을성이 강했지만 마양오의 도발을 잘 참았군요. 한등민가의 가주를 맡을 만합니다.”
“이젠 연륜도 눈곱만큼 붙었더라.”
“그럼 더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잘 피해 있을 겁니다.”
“그래. 그 정도쯤이야 하겠지.”
“서신은 안 읽으실 겁니까?”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구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이런 내용일 게 뻔하잖아. 손이 영 안 가.”
“연륜이 제법 붙었다고 하셨잖습니까. 예상하신 것과 다른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소인이 대신 읽어드릴까요?”
“그럴 바엔 내가 보고 말지.”
정광은 서찰을 꺼내 펼쳤다.
하얀 종이 위에 단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희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광은 한동안 서찰을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성의 없기는. 뭐가 이렇게 짧아?”
귀곡자가 슬쩍 보고 웃었다.
“허허. 필체는 정성스럽기 짝이 없잖습니까. 수없이 쓰고 버리다가 나온 글일 겁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연서(戀書)도 아니고 무슨.”
정광은 서신을 대충 접어 품속에 쑤셔 넣었다.
“우원 그놈이 이렇게 게을러졌을 줄은 몰랐네.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봐.”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입니다. 다행히 민우원은 전자인 것 같습니다.”
귀곡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얼굴을 굳혔다.
“허나 마뇌는 후자지요. 장수를 꿈꾸는 거야 이해하지만 신력(神力)까지 좌지우지하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늙으면서 욕심이 더 강해졌나 봅니다.”
나민은 신력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나 마뇌는 신력을 조종하려 하고 있었다.
천신에 대한 믿음이 거의 사라진 세상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정광의 눈에서 검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러게. 마령강시 건도 그렇고 선을 자꾸 넘어. 그만큼 예뻐해 줘야겠지. 야. 야. 마차가 요동치잖아. 또 정신이 나갔냐?”
“죄, 죄송합니다. 몸이 떨려서 그만.”
귀곡자는 공포심을 억누르며 말고삐를 제대로 쥐었다.
말들이 똑바로 달리고 귀곡자의 음성엔 힘이 실렸다.
“지존.”
“왜?”
“승황대가 민 씨 일족을 찾은 시기가 너무 공교롭습니다.”
“마침 우리가 한등격리봉에 이르렀을 때 그런 거?”
“네. 마뇌가 지존의 정체를 의심하여 승황대를 사석(捨石)으로 던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진혼이라는 청년이 나타난 뒤 신강은 크게 흔들렸다.
그를 빈객으로 거둔 고이륵단가는 전장 사업을 하겠다고 천명하며 여러 가문과 접촉했다.
그와 마찰을 빚은 토로번손가는 소가주를 비롯한 여러 식솔이 외팔이가 된 데다 명예 또한 바닥에 처박혔다.
그뿐이랴.
그가 커라마이에서 떠나자마자 극랍염가에서 감금하고 있던 귀곡자가 사라지고 마귀성이 불타지 않았는가?
게다가 마령강시가 두 구나 사라지기까지.
굵직굵직한 것들만 추려도 이렇게 많은데 교활한 마뇌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리 있나.
“그렇다고 내가 돌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걸. 밑바닥에서 구르며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녀석이 환생 같은 망상을 할 리 없지.”
“맞습니다. 더구나 지존께서 환생하셨다 해도 뭐 하러 돌아오시겠습니까? 귀찮아서 그러실 분도 아니고 이곳을 항상 지겨워하셨는데…….”
귀곡자는 말끝을 흐렸다가 이었다.
“하지만 오셨지요. 지존께서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네 몰골이 그 모양 그 꼴이 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지존께서 이렇게 역용을…….”
“네 복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라 생각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귀곡자는 속으로 장탄식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뇌는 진혼의 무위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전해 듣고, 묵영권가가 아닌 지존의 진전을 이었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교를 꿀꺽 삼키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향리객잔과 고이륵단가가 돕고 있고. 그러면 전부 대충 들어맞으니까.”
진혼은 단시간에 엄청난 명성을 떨치며 추종자를 모으고 있었다.
명성을 얻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과할 정도였다.
더구나 항상 향리객잔에서 묵지 않는가?
귀곡자가 극랍염가에 갇혀 있었던 걸 알아낼 만한 세력은 많지 않은데 그중 하나가 향리객잔이었다.
향리객잔을 통해 정보를 얻고 귀곡자를 구해 머리로 삼는다.
귀곡자야 치병에 걸렸으니 쓸모없겠지만 총명하기로 유명한 나민을 거둔 상황.
도박으로 번 막대한 돈을 고이륵단가 전장 사업에 투자해 금력까지 얻으면 대단한 위세를 떨치게 될 게 분명했다.
거기에 섬랑까지 소교주가 되면?
현 교주의 사후, 천마신교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광은 마뇌를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나이가 꽤 들었는데 똥오줌은 가릴 줄 알까?”
“체면을 무척 따지니 어떻게든 그럴 겁니다.”
“조만간 확인할 수 있겠지.”
승황대가 돌아오지 않고 민 씨 일족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마뇌는 진혼이 진천마의 후인이라고 거의 확신하게 될 것이다.
허나 추측만으로 일을 벌이는 위인은 아니니 직접 만나서 확인하려고 할 터.
“아. 기대돼.”
정광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귀곡자.”
“네, 지존.”
“잘 들어.”
정광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낮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정신 줄 끝까지 잡고 마차 몰아. 안 그러면 혼난다.”
귀곡자는 바짝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다가 정광의 말을 듣고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 * *
천지신명께서 보우하신 걸까, 치료가 잘된 걸까.
아니면 정신력이 승리한 것일지도.
귀곡자는 온종일 제정신을 유지했다.
정광 일행은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계속 말달렸고, 그 결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천마신교 총단이 있는 탁목이봉.
그 고산 밑에 자리한 도시, 온숙(穩宿)이었다.
섬랑은 어제부터 무리하지 않은 덕분에 뽀송뽀송해진 피부를 빛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큰 도시네. 분위기도 독특하고.’
반점, 객잔, 주루, 포목점 등 있을 건 다 있었고 사람도 많았다.
이 정도 규모면 시끌벅적해야 하거늘, 여느 곳들과 다르게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였다.
‘총단이 지척에 있어서 점잔을 빼는 건가?’
궁금하면 물어야지.
호기심은 발전의 초석.
그걸 해소하려는 마음가짐은 기둥이 되지 않는가?
그 가르침을 줬던 현인에게 묻기 위해 말을 마차 쪽으로 몰았다.
“현로. 여기 좀 이상한데 왜 그런 거죠?”
귀곡자가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흐으으. 배고파. 너무 배고파서 울 것 같아.”
“…….”
섬랑은 귀곡자 옆에 있는 정광을 쳐다봤다.
정광은 어깨를 으쓱하고 귀곡자의 손에서 말고삐를 빼앗았다.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여기까지였나 봐.”
“그래도 제정신인 상태가 많이 길어졌네요.”
정광이 씩 웃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지.”
“전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요.”
섬랑은 인상을 쓰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현로를 위해선 이게 좋겠지만요.”
“웬일이야? 네가 남의 사정을 헤아리고.”
정광이 깜짝 놀라자 섬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분이면 모를까, 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유언은 그게 끝이야?”
“설마요.”
섬랑의 말이 빨라졌다.
“여기 너무 조용한데 왜 그런 거예요? 우리도 그래야 하나요?”
“떠드는 건 자유인데 굳이 그래서 주목받을 필요는 없지.”
정광은 찬찬히 설명했다.
“총단에서 일하는 사람은 많아. 신강 전역에서 총단을 오가는 이도 적지 않고.”
하지만 탁목이봉은 산세가 너무 험해 많은 이들이 묵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총단에 용무가 있어 온 자는 칠대가문 사람이든 일반 교도든 간에 온숙에서 지내며 산을 오르내려야 했는데, 총단 사람도 꽤 있는 이곳에서 누가 소란을 피우려고 하겠는가?
섬랑은 정광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제 생각과 거의 비슷하네요.”
“현로가 네 생각을 먼저 말하고 질문을 던지라고 가르쳤을 텐데.”
“아! 깜빡했네. 죄송해요.”
“내가 아니라 현로에게 사과해야지.”
섬랑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귀곡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으으. 측간에 가고 싶어. 너무 급해. 당장 쌀 것 같은데 어떡해?”
어떡하긴.
당연히 참아야지.
정광은 귀곡자를 번쩍 들어 회음부 주위의 혈도들을 누르고 민현유를 돌아봤다.
“현유. 오래는 못 버텨.”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인. 거의 다 왔습니다.”
민현유의 장담대로 얼마 안 가 눈에 익은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너무 자주 묵어서 내부 구조까지 빠삭한 곳, 향리객잔이었다.
정광은 단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가주님, 다른 곳에서 묵으실 거죠?”
“그래야겠지. 우리가 향리객잔에서 묵으면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올 거야.”
“그럼 내일 아침에 뵐게요.”
정광 일행이 객잔에 들어가자 점소이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도련님과 대인들을 환영합니다. 목욕 준비를 해놨으니 바로 올라가셔서 즐기시면 됩니다.”
정광은 고맙다고 말한 뒤 귀곡자의 혈도를 풀고 섬랑에게 던져줬다.
“네가 처리해.”
“으악! 현로! 측간으로 모실 테니 조금만 참아요!”
“느, 늦었…… 하아아아.”
“……망할.”
섬랑과 귀곡자는 눈물을 글썽거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방으로 알아서 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피로를 말끔히 씻어낸 뒤 일 층에 모이자 점소이들이 묻지도 않고 요리와 술을 내왔다.
정광은 젓가락을 들고 사람들에 권했다.
“드시죠.”
모두 사양하지 않고 요리와 술을 즐겼다.
정광은 배를 거하게 채우다가 술을 연거푸 들이켜는 섬랑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크윽! 네, 미쳤어요. 아니, 미치고 싶네요.”
“얼굴에 핏물과 뇌수를 뒤집어써도 항상 태연한 놈이 깔끔한 척하기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제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셨으면서 왜 그러세요?”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술 그만 마셔. 내일 해가 뜨면 총단으로 갈 거야.”
섬랑의 공허했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네. 경쟁자들에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야죠. 그럼 막잔으로 한 잔만 더…… 악!”
“빨리 자는 게 낫겠다. 다른 분들도 푹 주무세요.”
정광은 일행을 모두 올려 보내고 술을 마시다가 고개를 돌렸다.
민현유가 할 말이 있는지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왜?”
“지존. 폐가가 모습을 감추면 마뇌가 향리객잔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떡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냥 있으면 돼.”
“……네?”
정광은 술을 한 모금 삼키고 중얼거렸다.
“마뇌는 네 생각보다 똑똑하거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일행 중 몇 명과 함께 객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단영 무리와 합류해 탁목이봉으로 향했다.
이십여 년 만의 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