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8화
큰 기쁨
이녕(伊寧)에서 천마신교 총단이 있는 탁목이봉(托木爾峰)까지의 거리는 칠백리밖에 안 됐지만 도중에 험준한 산맥을 올라야 했기에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멸혼생사투 본선 시작일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가도 됐으나 정광이 그럴 리 있나.
일행을 재촉하며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물론 그러면서도 해야 할 일은 확실히 챙겼다.
자기 전에 귀곡자를 치료하며 자연지기 운용법을 궁리했다.
귀곡자의 상태가 호전됐고 정광의 깨달음도 조금이나마 깊어졌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정광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천막 밖으로 나가 근처에 있는 적당한 바위에 기대앉아 두 다리를 쭉 폈다.
하품까지 늘어지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정광이 해야 할 일을 했듯이 다른 이들도 그러고 있었다.
정광은 한 명씩 차례대로 훑으려다가 처음부터 눈을 크게 떴다.
‘이놈 봐라?’
섬랑이 이른 아침부터 수련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퀭한 눈을 끔벅이며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스스로 삼신기(三神器)라 칭한 병기들을 가지고 노느라 밤을 꼴딱 새운 게 분명했다.
‘참 가지가지 하네.’
정광은 한소리 하려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지.’
항상 완벽한 몸 상태로 싸울 수는 없다.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런 경험도 쌓아야 했다.
정광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좀 깼나. 점점 나아지네.’
섬랑은 묵영보(黙影步)를 끊임없이 밟으며 투혼(鬪魂)을 낀 양손으로 쌍교(雙蛟)를 거칠게 휘둘렀다.
간간이 소매 속에 숨긴 비섬(秘閃)을 꺼내 날카롭게 내질렀는데 상대가 방심한 상태라면 여지없이 당할 만큼 쓸 만한 암습이었다.
‘계속 히죽거리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확실히 많이 늘긴 했어.’
아직 보잘것없는 내공이지만 전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운용하고 있었다.
손뿐만 아니라 병기에도 내공을 담을 수 있게 됐으니 웬만한 적에겐 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지.’
세상일이 그렇게 쉬울 리 있나.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이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는 예선이 아니라 마도칠대가문의 적자들이 득실대는 본선에서 싸워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또 있었다.
‘이기는 건 당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해.’
섬랑이 밑바닥 출신인 것을 이용해 일반 교도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건 좋으나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소교주는 장차 교주가 될 존귀한 존재.
그 신분에 걸맞는 품위를 지녀야 했다.
어제 한 전주가 지적했듯이 비열한 수는 적당히 쓰고 좀 멋지게 이겨야 모든 교도에게 인정받을 터.
중단전 옥당(玉堂)에 마혼(魔魂)의 파편을 심어놨으니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놈이 알아서 기지개를 켜겠지만, 섬랑의 본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숙주를 집어삼키고 날뛰게 될 공산이 컸다.
‘운 좋게 넘기고 마혼에 기대면 더 곤란하고. 좋아. 아침 먹고 바로 시작하자.’
정광은 시선을 돌려 요리 담당자를 주시했다.
오른팔이 없는 호리호리한 중늙은이, 관엽이었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눈은 섬랑과 다르게 또렷했다.
그뿐이랴.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홀로 묵묵히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 듬직하기 그지없었다.
‘늙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니까. 콧물을 찔찔 짜던 백정 꼬마가 저렇게 늠름하게 컸잖아.’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하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관엽이 솥에서 팔팔 끓는 고기죽을 나무 주걱으로 대충 젓다가 팽개치고 정광이 하사한 기형도를 뽑아 허공을 난자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얼굴을 살벌하게 일그러뜨리며 도를 노려보는 꼴이라니.
도가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가 봤다면 누굴 어떻게 죽이려고 저러냐며 당장 줄행랑을 쳤으리라.
‘……그래, 늙으면 애가 되기 마련이지.’
관엽처럼 몸을 쓰는 유형은 더 그랬다.
물론 머리만 굴리는데도 그렇게 되는 녀석 역시 허다했고.
마침 적당한 예가 있어 그쪽으로 눈길을 줬다.
귀곡자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민과 함께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어찌나 멋을 부리는지 점잖기 짝이 없었다.
“민아. 너는 지금껏 내가 던지는 화두마다 나쁘지 않은 답을 가져왔다. 오늘은 어떤 것을 낼지 기대되는구나.”
“과찬이십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는 것이니라. 본교를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봤느냐?”
“네, 어르신.”
“한번 말해보거라.”
나민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입니다.”
“거두절미하고 그 두 가지를 꼽은 게 재밌구나.”
귀곡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따지면 그게 맞다.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은 무엇이냐?”
“역시 무력과 금력입니다.”
“그래. 힘으로 힘을 불러서 쌓는 것이지. 허나 너와 섬랑은 경우가 달라. 특히 섬랑에겐 아무런 기반도 없다. 차선책이 무엇인지 설명해 봐라.”
나민은 즉시 반론을 제시했다.
“많이 부족하긴 하나 섬랑에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닙니다. 일반 교도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사고 있으며 그들을 능히 포용할 만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전제가 틀렸다.”
귀곡자는 걸음을 멈추고 눈에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닦았다.
“희뿌연 건 내 눈으로 족해. 먼저 섬랑이 정점에 설 자질이 있는지부터 확실히 논해야지.”
“그건 있습니다.”
“고무적인 말이군.”
귀곡자가 깨끗해진 눈으로 나민의 눈을 들여다봤다.
“네 특별한 능력으로 보고 판단한 것이냐?”
나민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제 견문이 좁아 섬랑이 훌륭한 자질을 지닌 건 봤지만 그것이 소교주는 물론이오, 교주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많은 이들을 만나보고 비교해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그럼 무엇을 근거로 확신한 것이더냐?”
“진혼이 가능하다고 확언을 해서입니다.”
“…….”
나민은 귀곡자가 침묵하자 음성에 힘을 실었다.
“게다가 어르신께서도 섬랑에게 간간이 가르침을 주고 계시지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
귀곡자는 나민을 물끄러미 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허허. 진혼이야 그렇다 치고. 네가 이 늙은이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천하에 어르신 같은 현인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 경험이 적어 어르신께 의지해 판단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귀곡자는 나민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 경험이야 채우면 되는 것. 그때까진 능력이 있는 자를 이용하면 돼.”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너도 그자에게 네 가치를 증명해야 하지. 우선 나부터 설득해 봐라.”
나민의 눈이 진주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무력과 재력을 모으기 위해 신력(神力)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신력을?”
귀곡자는 정광에 의해 흉악한 인상의 파계승으로 역용된 상태.
흥이 솟았는지 당장에라도 소를 몇 마리 잡고 말술을 들이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지금부터가 진짜구나. 저쪽에서 편히 앉아 얘기하자꾸나.”
“네, 어르신.”
두 사람은 다정한 조손처럼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광은 나민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의외네. 머리가 굳은 녀석이 아니란 건 익히 알았지만 제법 기특한 생각을 했어.’
말을 들은 김에 신력과 관계된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로 민현유였다.
‘청승 떨기는.’
녀석은 착잡한 얼굴로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 중 두 번째로 높은 산,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을 바라보고 있었다.
‘똘똘하긴 한데 수양이 부족한 게 아쉬워. 단영 정도만 돼도 더 쓸 만해질 텐데 말이야.’
단영은 곤륜산에서 싸우고 있을 아비의 안위와 본가에서 벽을 깨고 있는 할아비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도 천막에 틀어박혀 전장 사업에 관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차라리 저놈처럼 내키는 대로 하든가.’
단영의 비밀수신호위 노릇에서 벗어난 흑서는 살판난 것처럼 싸다니다가 돌아와 주변을 경계하는 단가 무인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심심한데 비무나 하자.”
“……사양하겠습니다.”
“이번엔 살살 해줄게. 너희를 위한 거야. 빼지 말고 하자. 응?”
“……안 됩니다.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살수를 펼치시지 않았습니까?”
“감히 내 도움을 거부해? 이것들이 진짜!”
흑서가 인상을 찡그리며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
단영이 천막에서 얼굴을 내밀며 담담히 청했다.
“어르신, 제가 더 급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너 안 잤냐? 안색이 왜 그래?”
단영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리할 게 너무 많아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르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살법(殺法)에 능하신 만큼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는 것에 능통하실 테니…….”
“크흠. 나도 잠을 제대로 못 자 피곤하구나. 잠깐이나마 잘 테니 너도 눈을 좀 붙이거라. 몸은 스스로 챙겨야지.”
가만히 지켜보던 정광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까의 평가를 취소했다.
‘흑서보다야 현유가 훨씬 낫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는 게 어디야.’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주야장천(晝夜長川)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자오가 은근슬쩍 다가와 옆에 앉았는데 날씨가 많이 풀렸느니 산세가 웅장하기 그지없느니 하며 수다를 떨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자오. 뭐가 궁금해서 이래요? 말해보세요.”
자오는 계면쩍게 웃으면서도 사양하지 않았다.
“도박꾼들 중 돈을 잃을 때마다 ‘천신(天神)께서 나를 저버리셨구나’라며 탄식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천마신교도들은 교주를 신으로 모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실례하게 됐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네요. 다른 분께 묻지 그러셨어요.”
자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걸려고 하면 다들 도망가느라 바빠서 그만…….”
“……힘내세요.”
“하하.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억지로 가슴을 펴며 웃으면 뭐 하나.
눈에는 여전히 슬픔이 가득한데.
‘어쩔 수 없지.’
정광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전설일 뿐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들으세요. 오래전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 천산산맥에서 두 번째로 높은 한등격리봉에 안착했어요. 한등격리봉이 그곳 말로 천신을 뜻하는 게 그래서죠.”
자오의 눈이 별빛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아! 벌써 흥미진진합니다.”
“진짜 별것 없는데. 천신은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인간들의 땅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어요. 허나 한등격리봉은 너무 낮아 자신의 본가인 하늘과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 보금자리를 꾸몄죠.”
정광은 저 멀리 있는 한등격리봉을 가리켰다가 그보다 더 높은 산을 향해 손가락을 옮겼다.
“거기가 바로 탁목이봉(托木爾峰)이에요.”
“오오! 그래서 천신을 받드는 자들이 저곳에 모여 천마신교 총단을 세운 겁니까?”
“전설상으로는요.”
정광은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천신은 사랑하는 여인과 살다가 아이를 낳았어요. 하지만 자신과 달리 사람이었기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쳤죠. 그리고 이 아이가 나의 대리자가 될 것이니 성심성의껏 보필하라고 사람들에게 명했어요.”
물론 맨입으로 그러라 한 건 아니었다.
여러 무공을 만들어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에게 내려줬다.
“게다가 또 다른 기회도 줬죠.”
“무엇입니까?”
“강자존(强者尊)요.”
정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거 말하기 좀 그런데.”
“단주, 말씀해주십시오.”
“으으. 내 대리자는 강해야 한다. 내 핏줄만이 내 뒤를 이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 겨뤄라. 그리고 쟁취해라. 그 승자만이 나를 대리할 자격이 있다.”
정광은 양팔을 긁으며 탄식했다.
“이거야 원. 섬랑도 아니고.”
“네? 멋있지 않습니까?”
“자오도 마인이 다 됐네요.”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그렇게 됐는데 천신은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자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려줬어요. 일종의 예언이었죠.”
자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정광은 담담히 얘기했다.
“언젠가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다시 세상에 내려와 스스로를 성화(聖火)로 불태우며 세상까지 정화시킬 것이다. 나를 믿어야 금빛 성화에 타지 않고 살아남아 태평성세를 누리게 될 거다.”
자오는 감탄하고 정광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역천마장(逆天魔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벼려낸 검을 쥐고 내공을 주입했을 때 지금의 운룡이 그렇듯이 찬란한 금광을 발했었지.’
총단이 뒤집혔었다.
천신께서 소교주를 통해 현신하셨다고 떠들며 어찌나 소란을 피우던지.
하도 어이가 없어 검이 금광을 냈지 내가 불상처럼 금빛으로 번쩍거렸냐고 소리치며 모조리 쥐어패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하여간 손을 써야 알아듣는다니까.’
정광이 혀를 차는데 자오가 탄성을 질렀다.
“아아! 대단한 위엄이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세월의 힘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이젠 그냥 전설이라니까요. 다들 그렇게 취급해요.”
“……아.”
“물론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천마신교에 속한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니까요. 기대 많이 하셨는데 시시하죠?”
자오가 머리를 긁으며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실망하신 게 보이는데요, 뭐.”
정광은 잠시 입을 닫았다가 열었다.
“자오.”
“네, 단주.”
“제가 어떻게 이런 얘기들을 아는지 궁금해하시면서도 끝까지 묻지 않으시네요.”
자오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항상 그랬듯이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기다리시는 건 좋은데. 진짜 실망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자오의 얼굴이 굳었다.
“단주께 말입니까?”
“네.”
“하하. 제가 단주께 더 이상 실망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오는 어색하게 웃다가 정광이 묵묵히 있자 고개를 홱홱 저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단련됐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를 콕 집어 데려오신 건 그만큼 믿으셔서 그런 것일 터. 그 믿음에 부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오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런 염려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주. 정말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