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7화
꼭 오세요
정광은 임가 대장원에서 나오자마자 신법을 펼쳤다.
얼마 안 가 향리객잔에 도착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민현유가 점소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 바빠 보이네.”
“대인, 오셨습니까.”
민현유가 담담히 맞이했다.
“떠나기 전에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었는데 다 끝났습니다.”
정광은 어깨에 멘 짐을 탁자 밑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잘됐네. 할 얘기가 있으니 사람들을 모아줘. 술도 좀 내주고.”
“간단한 안줏거리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더 좋고.”
잠시 뒤.
여러 곳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일행이 일 층에 모여 탁자에 둘러앉았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짧게 설명했다.
“이녕임가가 전장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섬랑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물론 나 소저도요.”
후원에서 치열하게 수련을 하다가 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섬랑이 눈을 억지로 뜨며 으스댔다.
“하하. 임가가 줄을 설 줄 아네요. 앞으로 잘 대해줘야지.”
“멸혼생사투에서 우승이나 하고 어깨를 으쓱대.”
섬랑이 진지하게 맹세했다.
“그거야 기본이죠. 꼭 해낼게요.”
“그래, 명심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야.”
정광은 옆으로 시선을 옮겨 나민과 눈을 맞췄다.
“고이륵단가, 오로나가에 이어 이녕임가까지 돕기로 했어요. 하지만 지원은 지원이고, 소저가 잘해야 하는 거 아시죠?”
나민은 전보다 다소 수척해진 모습이었으나 눈은 더 밝게 빛났다.
“물론입니다. 되도록 외부 힘에 기대지 않고 섬랑을 보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믿을게요.”
다음은 제정신인 상태의 귀곡자였는데.
굳이 말할 필요 없었다.
정광이 슬쩍 보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녕임가가 합류한 걸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겠다는 의미였다.
민현유도 눈치가 빨랐기에 귀찮게 입을 놀릴 필요 없었다.
그는 정광이 씩 웃으며 보자 손가락을 하나 들어 입을 바늘로 꿰매는 시늉을 했다.
“함구하겠습니다, 대인.”
“그래. 그러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정광은 민현유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자오를 바라봤다.
자오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제 차례군요.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정광은 술병을 들어 술을 한 잔 따라줬다.
“드세요.”
자오는 술을 호쾌하게 삼키고 가슴을 폈다.
“술까지 권하시는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가 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뛰어들라고 하셔도 기꺼이 따를 테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말씀드렸는데요.”
“……네?”
“술과 안주를 즐기시면 돼요.”
“……아.”
정광은 한 잔 더 따라주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잔에도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일 얘기는 다 했고. 멸혼생사투 본선 진출을 축하하죠. 섬랑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생해서 이뤄낸 성과니 간소하게나마 즐기는 거예요.”
사람들은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미소 지었다.
술잔을 높이 들어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고 술을 들이켰다.
웃고 떠드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원래는 간단하게 끝낼 계획이었으나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았다.
술병이 비면 새 술병이 왔고 안주가 사라지면 다른 안주가 빈자리를 메웠다.
자오는 눈치 빠르게 늦은 밤까지 수고하는 점소이들과 숙수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했다.
자연히 더 좋은 요리와 술이 탁자 위에 줄을 지어 놓일 수밖에.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 계속됐는데 섬랑이 불콰한 얼굴로 술을 홀짝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인,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응.”
“바닥에 있는 그거, 뭐예요?”
“임가 태상가주님에게서 얻어 온 병기들.”
“아. 그거였…… 헉! 진짜요?”
“그럼 가짜겠냐? 현유, 접시들 좀 치워줄래?”
“네, 대인.”
점소이들이 달라붙자 탁자 위가 금세 깨끗해졌다.
정광은 바닥에 내려놨던 짐을 들어 텅 빈 탁자 위에 올려놨다.
천을 풀자 그 속에 있던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랑은 탄성을 터뜨리며 부러운 눈으로 구경하다가 비명을 질렀다.
“억! 서, 설마!”
쌍단봉, 비수, 권갑.
누가 봐도 자신의 것 아닌가?
이녕임가에서, 그것도 마도제일야장(魔道第一冶匠)에게서 얻어온 것들이라면 그 품질은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할 터!
섬랑은 벌떡 일어나 정광에게 쪼르르 달려가더니 힘껏 껴안았다.
“역시 대인! 투자할 줄 아시네요! 잘 쓸게요!”
“헛된 투자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
정광은 근엄하게 당부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섬랑은 어느새 정광을 감았던 팔을 풀고 병기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와. 진짜 끝내주네. 뭐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서늘하지?”
“……금속은 원래 다 서늘하지.”
“이 질긴 가죽은 또 뭐고? 뱀 가죽은 아닌 것 같은데 기이하게 번들거리네.”
“그래 봐야 가죽 아닐까.”
정광이 퉁명스럽게 쏘아대도 입을 귀에 걸고 있던 섬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 또 뭐야?”
도신(刀身) 폭이 좁은 기형도였다.
“도갑도 투박하고. 모양새도 이상하잖아.”
섬랑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도를 뽑았다.
그러자 시퍼런 도신이 자태를 드러내며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섬찟한 예기(銳氣)를 쏘아냈다.
“오오! 죽여주는 놈이었잖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 것이 아니지.”
정광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를 낚아챘다.
그리고 일행 중 한 명에게 내밀었다.
“관 숙수, 받으세요.”
“……!”
“왜 눈을 크게 뜨세요? 관 숙수 것이에요.”
관엽은 놀란 눈으로 정광과 도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왜 내게 이것을…….”
“섬랑을 가르치고 지키신 데다 노숙할 땐 요리까지 하셨잖아요. 다른 분들은 다들 괜찮은 병기를 가지시고 있는데 관 숙수만 볼품없는 걸 쓰시면 되나요.”
사람들은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의 병기들은 전부 철혈장에서 만든 명품들이었다.
나민은 오로나가의 금지옥엽답게 훌륭한 창을 지녔고 민현유는 민 씨 일족만의 독특한 병기를 썼기에 다른 종류의 병기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큰 소용이 없었다.
정광은 그 점을 지적하고 들고 있던 도를 다시 한번 내밀었다.
“빨리 받으세요. 팔 아파요.”
관엽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지존이 그간의 공을 치하하며 상을 내린 것이다!
주변의 눈을 의식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고맙네.”
“뭐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도를 건네주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자. 술자리는 이쯤에서 파하고 푹 자죠. 내일 아침에 봐요.”
하지만 정광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짐을 챙겨서 일 층에 내려가 보니 섬랑이 퀭한 눈으로 새로 얻은 병기들을 살피고 있었다.
“너 설마 안 잤냐?”
섬랑이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당연하죠.”
“왜?”
“공감 능력이 없으시네. 어떻게 자요?”
섬랑은 쌍단봉, 비수, 권갑 순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쌍교(雙蛟), 비섬(秘閃), 투혼(鬪魂)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침이 밝았어요.”
“……셋 다 입이 안 보이는데? 이름은 또 왜 다 그 모양이야?”
섬랑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정광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새로 얻으신 검, 이름이 뭐죠?”
“만마(萬魔).”
“작명 실력만큼은 제가 대인보다 한 수 위죠. 안 그래요?”
모여 있던 일행이 작게 웃으며 수긍했다.
정광은 황당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눈썹을 꿈틀했다.
“관 숙수도 안 주무셨어요?”
허리춤에 꽂은 기형도를 계속 쓰다듬으며 잔뜩 충혈된 눈을 빛내고 있던 관엽이 얼굴을 굳혔다.
“음. 아예 안 잔 건 아니지만 조금…….”
“하아. 애나 어른이나 똑같네. 밥이나 먹죠.”
모두 배를 든든히 채우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사이 정광은 객잔 문을 열고 밖에 있는 이들에게 손짓했다.
“잠깐 들어오세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서성이고 있던 사내들이 흠칫했다.
독두를 비롯한 전주들과 그들의 수하들이었다.
정광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청했다.
“전주님들만요. 급히 논의할 일이 있어요.”
독두와 전주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들어와 쭈뼛거렸다.
“그냥 객잔일 뿐이에요. 편히 앉으세요.”
정광은 부드럽게 권하고 자신도 앉았다.
그리고 그들 하나, 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 꽤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라고 했는데. 기억하시죠?”
전주들이 잠을 설쳐서 핏발이 선 눈을 번뜩였다.
독두가 대표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대인. 그 좋은 일이 생긴 겁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들어보시고 판단하세요.”
정광은 찬찬히 설명했다.
“아무리 광명좌사자님이라 해도 죄를 지었으면 모를까, 칠대가문의 빈객을 함부로 대할 순 없죠.”
독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칠대가문 중 한 곳에 의탁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들이 저희 같은 놈들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전주님들이 어때서요? 그리고 말이 빈객이지 동업자로 일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동업자라니요?”
“이녕은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곳이죠. 그런 이녕을 다스리는 임가에서 고이륵단가의 전장 사업에 동참하고 도박장을 크게 열기로 했어요. 저는 도박장 운영자로 전주님들을 추천했고요.”
“……!”
전주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 입은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더 크게 벌어졌다.
“전주님들은 좋아하시는 일을 크게 벌이시게 될 거예요. 이녕은 병기뿐만 아니라 도박의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되겠죠. 전주님들의 이름은 도박꾼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걸 넘어 도박사(賭博史)에 길이 남을 거고요. 한번 해보실 만하죠?”
그렇다마다!
어떤 전주가 이런 원대한 계획을 듣고도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정광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는 그들에게 찬물을 살짝 부었다.
“전문가인 전주님들이 도박장 운영을 총괄하시겠지만 임가에서 투자를 많이 하는 만큼 간섭을 받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죠. 어느 정도 견제를 받아야 썩지 않으니까요.”
“…….”
전주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적당한 제동이 필요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아서였다.
정광은 그들이 수긍하자 상세한 설명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마음에 드세요?”
독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려다가 대머리를 붉혔다.
“크흠. 그렇긴 한데 소인들이 가진 게 적어 그만큼 투자할 여력이 없습니다.”
“모자란 만큼 투자받으시면 되죠. 황금 마차 세 대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
“부족하면 말씀하시고요.”
그럴 리 있나.
정광이 이자와 수익 배분율까지 말하자 전주들이 열광했다.
“역시 대인이시군요! 아주 적절한 수준입니다!”
“아니, 소인들이 대인께 뭘 숨기겠습니까? 조금 낮은 것 같습니다. 더 올리셔도 됩니다.”
정광은 단호히 거절했다.
“한두 해 하고 끝낼 사업이 아니니 길게 보세요. 돈을 버시면 버실수록 아깝다고 느끼실걸요?”
전주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도박꾼이자 무인.
분위기가 싸해졌다.
독두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했다.
“소인들은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시길 바랄게요. 수익이 나면 제 지분은 나 소저에게 보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인.”
정광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럼 곧장 임가로 가셔서 실무자들과 논의하세요. 광명좌사자님이 계시겠지만 전주님들을 건드릴 정신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걱정하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독두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세부적인 합의를 이루려면 며칠 걸릴 겁니다. 끝나는 대로 바로 총단으로 가겠습니다.”
“네? 왜요?”
“하하.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섬랑을 응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전주들도 떠들썩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소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얘기를 하느라 바쁩니다.”
“칠대가문의 적자가 아닌 밑바닥을 구르던 아이가 소교주가 된다! 그 광경을 직접 보면 얼마나 짜릿하겠습니까?”
한쪽에서 떠날 채비를 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섬랑이 두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저씨들! 꼭 오세요!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게요!”
뭐가 어째?
전주들이 야유했다.
“예선이 아니라 본선이야! 비열한 수는 적당히 쓰고 좀 멋지게 이겨봐라!”
“꼭 이겨야 해! 그래야 험준한 탁목이봉(托木爾峰)을 오르는 보람이 있지!”
“나중에 소교주가 됐다고 우리를 모르는 척하면 안 된다!”
“예끼! 장차 소교주님이 되실 분께 무슨 망발인가? 지금부터 받들어 모셔야지!”
전주들은 껄껄 웃으며 섬랑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정광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대인. 그럼 총단에서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전주들이 떠나고 얼마 안 가 단영 일행이 왔다.
정광은 마차 마부석에 훌쩍 뛰어올라 옆을 바라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귀곡자가 말고삐를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마, 마차 몰 줄 모르는데. 무, 무서워.”
“네가 더 무섭다니까.”
정광은 말고삐를 빼앗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려쳤다.
히히힝-
말이 길게 울며 지면을 박찼다.
“자! 가죠!”
질주가 시작됐다.
목적지는 탁목이봉에 있는 천마신교 총단이었다.
정광은 한동안 달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만. 가는 길에 거기가 있잖아. 잠깐 들를까?’
고개를 돌려 민현유를 보니 같은 곳을 떠올리고 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곳은 민 씨 일족의 터전인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