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6화
작별 인사
정광은 모서형과 함께 가주 집무실에서 나와 병기고로 향했다.
한동안 묵묵히 걷다 보니 외벽을 철판으로 덧댄 거대한 창고가 나타났는데 주변에 있는 여타의 고풍스러운 전각들과 다르게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이란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정광은 창고를 눈으로 훑으며 감탄했다.
“누가 또 태울까 봐 아예 쇠로 덮어버렸네. 얼마나 학을 뗐길래 이렇게까지.”
이녕임가 병기고가 이런 모습을 갖추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모서형이 헛기침했다.
“크흠. 철화각(鐵花閣)도 이렇지 않습니까?”
“장식을 하기 위한 것과 방화를 대비하기 위한 게 같나.”
정광은 철벽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충격을 받은 철판이 둔중한 소리를 토해냈다.
과할 정도로 두껍다는 증거였다.
정광은 철판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뭐 덕분에 이런 명물이 생겼으니 나쁜 건 아니지. 대대로 임가를 상징하게 될 거야. 중원에 있는 철혈장(鐵血莊)에도 이런 건 없거든.”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정광은 모서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자 덧붙였다.
“그렇다고 다른 전각들도 불태우지는 말고. 하나니까 특별해 보이지, 전부 그러면 쓸데없는 돈지랄로 보일 거야.”
“……지존, 밤바람이 찬데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정광은 문을 열려는 모서형을 제지했다.
“나 혼자 갈게.”
“그건…….”
“내가 네 남편을 때릴까 봐?”
“…….”
모서형이 머뭇거리자 정광은 혀를 찼다.
“쯧쯧. 나를 뭐로 보고. 그 녀석, 내게 병기라도 하나 주면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있으면 불편해할걸.”
모서형은 얌전히 물러났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응. 이따 봐.”
정광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기가 빼곡히 채워진 선반들이 사방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그 중앙에 화상으로 뒤덮인 얼굴에 땅딸막한 체구를 가진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정광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아 빙긋 웃었다.
“다리 안 저리세요?”
이녕임가 태상가주 임철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은 이전과 달리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
“그럼 다행이고요.”
임철환은 정광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본가에 불이 난 것을 가지고 도박을 벌였다고 하더구나.”
“설마 그걸 탓하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
“내가 널 제대로 봤는지 확인을 하려고 묻는 것이다. 밖에 있던 군중이 이런저런 억측을 하며 소란을 부리는 걸 막기 위해 내기에 집중시킨 게 맞느냐?”
“아.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난 기분이네요.”
“겸사겸사 돈도 벌고.”
“후우. 종자기가 흔할 리 없지.”
정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돈을 벌다뇨. 잃었어요. 그것도 많이. 고귀한 희생이었죠.”
임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에 도움이 된 일이니 언짢은 마음을 애써 눌렀는데 이제야 풀리는군.”
“저는 언짢아졌고요.”
“그래? 내 삶의 대부분이 그랬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더구나.”
임철환은 병기고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여기도 그랬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불편한 기억뿐이었거늘, 이젠 추억이 됐어.”
“보기보다 긍정적이시네요.”
“그뿐만이 아니다.”
임철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를 보면 전대 교주가 떠오른다고 했지?”
“그 훌륭하신 분요?”
“아니, 알면 알수록 그의 탁본을 뜬 것 같아. 아주 쏙 빼닮았어.”
임철환의 눈빛이 음울하게 변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증오했다. 왜 나를 그렇게 알아주지 않았는지, 왜 무시를 했는지. ‘넌 안 돼. 꿈 깨’라니. 그 이유라도 제대로 말해줬으면 이렇게까지 원망하진 않았을 텐데…….”
임철환의 눈이 다시 잔잔해졌다.
“헌데 그가 왜 그랬는지 아내가 오늘 말해줬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었어.”
“큰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축하드려요.”
임철환은 정광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선언했다.
“나는 천하제일검을 만들 거다.”
“힘내세요.”
임철환의 이어지는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던 정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 그걸 네가 사용해 줬으면 한다.”
“네? 왜요?”
임철환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는 그의 진전을 이은 게 확실해. 기질도 똑같고. 그런 네가 장차 천하제일인이 안 되면 누가 될까? 내 검이 기뻐할 만한 주인이 필요해.”
“과욕이 아닐까요?”
임철환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도 헛된 욕심인가 수십 번 고민해 봤으나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내 마음이 그러라 명하고 내 머리도 받아들이고 있어.”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시려고요.”
“이 정도 애착도 없으면 병기를 왜 만들까 싶은 의구심이 들더구나. 해서 이대로 매진하기로 했다. 내 결정이 틀렸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
모서형은 임철환이 이 화두를 붙잡고 고민 중이라 했다.
정광은 잘못된 욕심이 아니니 네가 알아듣게 설명하라고 말했었는데 그럴 필요 없이 임철환은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철혈화가 기뻐하겠네.’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러시죠. 받을게요.”
“고맙다.”
“그런 말씀도 할 줄 아세요? 근데 저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임철환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와도 상관없다. 나는 없더라도 네 검은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건 좀…….”
정광은 양팔을 긁으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심 좀 쓰시죠. 훗날 사용할 것 말고 지금 쓸 것도 가져가도 되죠?”
“뛰어난 병기가 필요한 것이냐? 역시 네 도는 신도(神刀)가 아니었구나.”
임철환은 정광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도와 운룡을 번갈아 봤다.
“안 그래도 도보다 검이 훨씬 더 훌륭해 보여 의아해하던 참이다.”
“검신을 보시지도 않고 어떻게 아세요?”
“검집을 보면 알지. 검파(劍把)도 그렇고.”
철혈장에서 새로 만들어준 검집에는 짙은 흑색의 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검파에는 원래 새겨져 있던 구름 문양 대신 용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임철환처럼 안목이 있는 자의 눈에는 수수하면서도 멋스럽기 그지없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이야. 본가의 작품은 아니니 그 유명한 철혈장의 것인 듯한데 네 생각은 어떻느냐?”
정광은 거센 바람이 불자 돛을 돌렸다.
“아무 생각 없는데요. 그냥 쓰면 되죠. 좋은 병기를 주기 싫으셔서 말을 돌리시는 것 같네요.”
“……너야말로 돌리고 있는 것 같다만.”
“그럼 비긴 거로 하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면 되나요?”
“…….”
임철환은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골라주마. 네 도를 줘라.”
“교환하시려고요?”
임철환이 인상을 찡그렸다.
“병기엔 주인의 흔적이 남는다. 그걸 보고 네게 적합한 것을 주려는 게야. 진짜는 검일 테지만 그건 달라고 해봐야 안 줄 것 아니냐?”
“말씀을 들으니 그러고 싶어지네요.”
“내 자존심을 걸고 좋은 것을 내주려는 것이니 어서 건네라.”
“여기요.”
임철환은 정광의 도를 받고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귀기(鬼氣)가 흘러나왔다.
“……!”
임철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귀기 때문이 아니라 칼날이 손상되어 이가 듬성듬성 빠져 있어서였다.
“나쁘지 않은 도인데 이 꼴이 되다니…….”
정광이 친절히 설명했다.
“도법을 수련하다가 바위를 후려쳐서 그만. 의외로 약하더라고요.”
“…….”
임철환은 나무망치로 도신을 세심히 두드렸다.
도가 나직이 울며 온몸을 가늘게 떨다가 천천히 멎었다.
“바위 따위에 이가 빠질 녀석이 아니야. 게다가 네가 주인 아니냐?”
임철환의 눈이 번들거렸다.
“마령강시. 네가 친 것이냐?”
“네?”
“놈들을 베다가 이렇게 됐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구나.”
“이런. 어쩔 수 없네.”
정광은 가슴을 활짝 펴고 우쭐댔다.
“맞아요. 마령강시들의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찹쌀을 던진 뒤 닭 피를 잔뜩 뿌려서 마무리했죠.”
“…….”
“황당하시죠?”
그걸 말이라고.
천하의 마령강시가 민초들 사이에서나 회자되는 그딴 것들에 당할까.
정광이 자신의 가슴과 임철환의 가슴을 번갈아 가리켰다.
“지금 제 마음이 태상가주님의 것과 같아요. 적당히 하시죠.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네요.”
“…….”
하긴.
지나친 억측이지.
임철환은 내심 자책하며 손에 쥔 도를 내려다봤다.
자존심을 걸기로 했으니 제대로 봐야 했다.
차분한 눈으로 정광의 도에 묻은 흔적을 샅샅이 파헤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대단하군. 정말 마령강시들을 해치웠을지도…….”
“그냥 갈까요?”
임철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벌떡 일어나 한 선반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한 자루 가져와 정광에게 내밀었다.
“역시 검이 낫겠지. 당장은 이것밖에 없다.”
정광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검을 받았다.
검집과 검파가 너무 수수해서 오히려 인상적인 검이었다.
하지만 정광의 눈엔 아니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가 이렇게 화려해요? 조금의 틈도 없이 악귀를 오밀조밀하게 잘도 새겨넣으셨네.”
임철환이 담담히 반박했다.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거다. 너니까 그렇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아. 겉에 신경 쓰지 말고 속을 봐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정광은 검을 뽑았다.
새카만 검신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며 섬찟한 마기를 뿜었다.
정광은 작게 휘파람을 불며 무게중심을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겼다.
어디를 때려도 맑은 소리가 일정하게 났다.
“괜찮네요.”
정광은 검을 몇 번 휘두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꽤 묵직한 게 현철도 많이 섞였고. 강도(强度)는 확인할 필요도 없겠어요.”
“아버님은 현철을 통으로 쓰셨지. 아버님을 뛰어넘으려고 다른 방도를 찾다가 만든 검이다. 실패작이긴 하나 한동안은 쓸 만할 게야.”
임철환의 음성에 열기가 담겼다.
“지금껏 계속 실패해서 좌절했지만 반드시 현철을 능가하는 합금을 만들 거다. 그 합금을 이용해 제작한 검, 그것이 내 목표다.”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사람의 생각은 비슷하기 마련이고 경지에 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혈장에서 무각공(無角公)의 비늘과 정광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용해 적금강(赤金剛)이란 합금을 만들어 철혈무쌍용갑에 호심경을 달았듯이, 임철환도 비슷한 목표를 세운 것이다.
“마음에 드네요. 잘 쓸게요.”
“다행이군,”
“이름을 뭐라 지을까. 아, 만마(萬魔)면 되겠네.”
“……진심이냐?”
“검집과 검파에 악귀가 만 마리는 새겨져 있으니 딱이죠.”
“……네겐 다행이지만 검에겐 불행이구나.”
임철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른 선반으로 다가갔다.
원래 자리로 돌아온 그의 양팔에는 병기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이것들도 가져가거라.”
“오오.”
거무튀튀한 쌍단봉(雙短棒)과 날이 시퍼런 비수, 뱀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가죽에 날카로운 철편을 덧댄 권갑(拳甲)이었다.
“섬랑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상하셔라.”
임철환의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이 일그러졌다.
“녀석이 소교주가 되어야 계획이 시작되고 본가에 이익이 될 것이니 주는 것일 뿐이야.”
정광은 일행이 지닌 병기들을 떠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것을 찾았다.
“덤으로 저것도 주시죠.”
“…….”
“베풀 때는 통 크게. 그래야 받는 사람이 더 감동하지 않을까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가져가거라.”
정광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챙겼다.
천도 달라고 해서 얻은 것들을 둘둘 감아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계세요. 태상가주님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꿈, 계속 꾸세요.”
무척 상투적인 인사말이었으나.
“……!”
임철환의 잔잔했던 눈이 뜨거운 격랑에 휩싸였다.
왜인지는 몰랐다.
오래전 들었던 ‘넌 안 돼. 꿈 깨’라는 말이 산산이 부서지며 ‘태상가주님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꿈, 계속 꾸세요’라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섰다.
아니, 여러 의혹과 확인을 통해 이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정광이 신형을 돌려 걸음을 내딛는데.
임철환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말을 던졌다.
완전히 바뀐 말투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정광은 아무 대답 없이 씩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모서형이 젖은 눈으로 정광을 응시했다.
“또 우냐?”
모서형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지존. 너무 기뻐서 그만.”
정광도 임철환도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굳이 막지 않았기에 모서형은 모든 걸 들은 상태.
그녀가 이십오 년 전과 달리 순순히 인정하자 정광도 피식 웃었다.
“그래, 철혈화(鐵血花)라고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네 남편, 지지해 주면 알아서 잘할 거야. 네게도 잘할 거고.”
“감사합니다, 지존.”
“뭐 그런 걸 가지고. 갈게. 잘 있어.”
정광이 떠나려고 하자 모서형이 급히 잡았다.
“돌아오겠다고 하셨으나 소인은 다시 못 뵐 것 같습니다.”
모서형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정중히 인사했다.
“지존의 앞길에 광명이 비추길 빌겠습니다.”
정광은 걸음을 내디디며 희미하게 웃었다.
“거창하기는. 너희는 각자 맡은 일을 하며 알콩달콩하게 잘 살다가 가.”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더 어려우려나? 그래도 해내기만 하면 즐거운 삶이라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