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56화 (455/569)

2부 185화

애정

광명좌사자 은호정은 경신술을 펼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빌어먹을 강시 새끼들! 새벽부터 찾아봤는데도 없어! 아무리 뒤져봐도 안 보여! 대체 어디 있는 게냐?’

내일 해가 뜨면 떠나야 하는데 이런 사달이 일어나다니.

나중에 문책을 당하더라도 계속 찾아봐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며칠 더 머물며 이녕을 샅샅이 훑어도 마령강시들을 회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냥 총단으로 가면?

마령강시는 교주와 마뇌가 총력을 기울여 복원한 것이었다.

그런 귀중한 것을 두 구나 잃고 돌아가면 그들이 반길 리 있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온몸이 싸늘히 식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게 뻔해. 어쩌면 나 역시 강시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자결하고 말지.

‘아니. 어떤 일이 있어도 죽기 싫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약한 생각을 털어내고 냉정하게 다시 생각했다.

마령강시들에게 숙소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명했으니 딴 길로 샜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얘기인데…….’

이것 역시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

이녕에서 마령강시들을 잡을 수 있는 건 임가밖에 없는데 그들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설령 임가에서 손을 썼다 해도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건 태상가주 임철환이 직접 나서도 힘든 일이었다.

은호정은 새벽에 봤던 임철환과 식솔들의 용모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아니야. 격전을 벌인 흔적이 있는 놈들은 단 한 놈도 없었어. 이녕에 또 어떤 세력이 있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임가를 제외하면 모두 고만고만한 가문들뿐이었다.

‘타지에서 들어온 녀석이 저지른 짓일지도 몰라.’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을 구경하려고 수많은 교도들이 이녕에 운집한 상태였다.

허나 마령강시를 해할 만한 고수는 전혀 없었다.

‘고이륵단가 소가주 녀석의 비밀수신호위가 한가락 하지만 마령강시들에겐 안 돼. 후우우. 또 이렇게 되는군.’

새벽부터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똑같은 추론을 하다가 여기서 막혔는데…….

‘아!’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철화각(鐵花閣)에서 신경을 북북 긁던 망나니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호정의 눈에서 이글거리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궁지에 몰리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구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녀석이었으나 마령강시 두 구를 해치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야. 이상하게 찜찜해.’

이성은 그럴 리 없다고 소리쳤지만 본능은 그래도 뭔가 수상하다며 물고 늘어졌다.

‘일단 임가로 돌아가 간단히 요기를 하고 향리객잔에 직접 가서 확인을…… 음?’

은호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임가 대장원 정문에 그 수상한 녀석이 있었다.

‘편해지긴 했는데.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온 거지?’

놈도 의아해했다.

“어? 광명좌사자님,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세요?”

은호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가 진혼이라 불리는 망나니 앞에 내려섰다.

“너야말로 무슨 용무로 온 것이냐?”

“제가 먼저 여쭸는데.”

평소의 은호정이었다면 화를 버럭 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혼의 행색을 꼼꼼히 살피다가 눈에서 힘을 풀었다.

‘멀쩡하기 그지없군. 역시 아니었어.’

얼굴도 손도 상처가 있긴커녕 뽀송뽀송했다.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며 짙은 허탈감이 가슴을 채웠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그리고 진혼의 말을 듣자 더 아파졌다.

“그러고 보니 마령강시들이 안 보이네요. 이녕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설마?”

“시끄럽다. 내 물음에 답이나 해.”

진혼이 어깨를 으쓱했다.

“철모(鐵母)께서 신세 진 걸 갚겠다고 오라 하셔서 왔죠.”

은호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게 무슨 신세를 졌길래?”

“얼마 전에 철화각에서 한 취객이 난동을 부리며 기녀를 괴롭혔거든요.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제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막아서…….”

“갈! 난동을 부리다니!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고 해?”

은호정이 분노를 토하자 진혼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깜짝이야. 왜 화를 내세요? 혹시 그 몹쓸 취객과 친분이라도 있으세요?”

“…….”

은호정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진혼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겁박해놓고 자신이 떠벌리는 꼴 아닌가?

억지로 분을 삭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그런 협객 놀이를 할 놈이냐? 그걸 못 믿겠다는 얘기다.”

“마(魔)에도 협이 있기 마련인데.”

“네놈은 아니라니까.”

“음. 그럼 그런 저도 반사적으로 나서게 할 만큼 짜증 나는 취객이었나 보죠.”

“…….”

은호정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툭 불거졌다.

진혼이 반색하며 손뼉을 짝 쳤다.

“오. 초췌해 보이던 얼굴에 갑자기 혈색이 돌아왔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이에요.”

“…….”

은호정의 양 뺨이 푸들거렸다.

다행은 개뿔.

안색이 좋아진 게 아니라 피가 거꾸로 솟아 얼굴이 붉어진 것인데 무슨!

“가만.”

진혼이 흐뭇하게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문이 사실인가? 이제 마령강시들로는 성에 안 차셔서 저분들로 바꾸신 거예요?”

“……?”

저분들이라 함은 은호정의 뒤에 늘어서 있는 도올대를 말하는 것.

이번만큼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바꾸다니? 무슨 의미냐?”

“아. 괜히 말했네.”

“어서 대답이나 해!”

진혼이 동정하는 듯한 얼굴로 나직이 속삭였다.

“마령강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사를 치르는 걸 즐기시는데, 이젠 그것으로도 부족해 살아 있는 분들을 데리고 다니신다는 말이 돌더라고요.”

“……!”

은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가라앉히려고 그 애를 썼거늘, 그보다 더 추잡한 얘기가 나돈다니!

화가 나는 걸 넘어 마치 내상을 입은 듯한 느낌 아닌가!

진혼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아니시죠? 꼭 그래야 하는데. 광명좌사자님이야 이미 텄지만 아무 죄 없는 도올대의 영명까지 훼손되면 곤란하잖아요. 안 그래요?”

마지막 물음은 도올대를 향한 것.

그들의 무뚝뚝했던 얼굴이 입고 있는 옷에 수놓인 흉악한 도올(檮杌)처럼 일그러졌다.

물론 은호정의 표정은 더했다.

전설 속의 사흉(四凶)을 전부 합치면 이렇게 될까?

흉신(凶神)같이 변한 얼굴로 진혼을 노려보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놈! 감히 그따위 망발을!”

“이녕에 파다한 소문을 전해 드렸을 뿐인데요.”

“크윽. 그따위 개소리를 하는 놈들은 모두 죽일 것이다! 너부터 당장 죽여주마!”

은호정이 살기를 폭발시키며 손을 쓰려는 순간.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명좌사자께서는 본가에서 피를 보실 셈이오?”

은호정은 눈만 움직여서 모서형을 노려봤다.

“철모, 이놈이 나를 모욕하는 걸 들었을 텐데.”

“광명좌사자께서 먼저 진혼을 겁박하지 않으셨소?”

“겁박이라니! 궁금한 걸 몇 마디 물어봤을 뿐이외다!”

“정말 그러셨으면 이럴 일도 없지. 죄인을 문초하듯 하시더이다. 본가에서 본가의 귀빈에게 말이오.”

모서형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아무리 광명좌사자이시라 해도 이럴 순 없소. 이 일은 반드시 교주께 보고를 올리겠소.”

은호정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면 교주께서 나를 벌하실 것 같은가?”

모서형이 대꾸하기 전에 진혼이 나섰다.

“근데요, 그 전에 나쁜 소문이 나지 않을까요?”

은호정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망할 놈의 소문 타령은 그만해라!”

“다른 건인데.”

“무어라?”

진혼은 두 팔을 살짝 벌리며 설명했다.

“오늘 내내 임가 분들이 이녕 곳곳을 열심히 뒤지시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묵고 있는 향리객잔에도 밀고 들어와 샅샅이 살피고 가셨다고 들었고요.”

“그게 뭐?”

“광명좌사자님께서 마령강시들을 분실하셔서 찾는 걸 돕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대던데. 그런 도움을 받으셔 놓고 임가에서 이 야밤에 소란을 피우시면 배은망덕한 분이라고 또 소문이 퍼지지 않겠냐는 얘기죠.”

“…….”

은호정은 이를 지그시 물고 주위를 둘러봤다.

모서형은 물론이오, 소란이 일자 몰려온 임가 식솔들이 하나같이 언짢은 얼굴로 은호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혼이 빙긋 웃으며 은호정에게 권했다.

“그래도 가주님과 태상가주님이 안 나오신 걸 보면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모르는 척 넘어가실 용의가 있으신 것 같네요. 내일이면 더 힘들어지실 텐데 여기까지 하시죠.”

“……그건 또 무슨 뜻이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올대는 내일 떠날 테고. 그럼 광명좌사자님 홀로 남게 되시는데 임가의 협조가 더 절실해지시지 않겠어요? 뭐 도올대와 함께 가실 예정이면 상관없겠지만요.”

“…….”

은호정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도올대 중앙에 서 있는 건장한 중늙은이의 삭막한 눈을 응시했다.

-일조장, 정말 떠날 것인가?

중늙은이는 지체 없이 답했다.

-교주께서 정해주신 일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나를 보필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는가?

-정해주신 일정 내에서 그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저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은호정은 속으로 탄식했다.

도올대가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막상 들으니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진혼이라는 저 간악한 놈이 문제가 아니야.’

앞날이 깜깜했다.

총단으로 바로 떠날지, 더 남아 마령강시들을 찾을지 그것부터 고민해야 했다.

은호정은 묵묵히 숙소를 향해 걸었다.

평소의 오만한 것이 아닌, 다소 초라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도올대가 그 뒤를 따랐다.

일조장이 중간에 슬쩍 돌아봤지만 정광은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다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모서형에게 말을 건넸다.

“광명좌사자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최소한 철모께는 사과할 줄 알았는데.”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나름 양보한 것이다.”

모서형은 손을 내저어 식솔들을 흩어지게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응.”

정광은 씩 웃고 그녀와 함께 걸었다.

“여기에선 보이지 않는데. 아까 뭘 태웠던 거야?”

“태상가주의 집무실입니다.”

“달랑 하나?”

“그렇습니다.”

“짧고 굵게 갔구나. 역시 철혈화야.”

“과찬이십니다.”

정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덕에 그 녀석이 고집을 꺾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깨달음까지 얻었잖아. 그뿐이야? 아들 녀석도 제법 괜찮게 키웠지. 임가는 네게 절을 해야 해.”

모서형의 차가운 얼굴이 밝게 빛났다.

칭찬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지존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서였다.

허나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에 다시 서리가 내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섬랑이 소교주가 되면 교주 놈과 마뇌를 죽일 거야.”

“네, 지존.”

“섬랑이 교주가 될 자격을 갖추고 나민이 군사 노릇을 제대로 할 때까진 시간이 필요해. 그동안 꽤 시끄러워지겠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회이기도 하니까 네 아들을 도와 맘껏 뜻을 펼쳐봐.”

“가주가 내부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외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무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네 남편 녀석에게 떠넘기고. 지금도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할걸?”

모서형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청했다.

“지존,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보고.”

“그는 지금 병기고에 박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낸 것들을 돌아보며 쓸데없이 품었던 욕심을 털어낸다고 했습니다.”

“야장에서 도사로 전업한 것 같네.”

“그건 아닙니다.”

모서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본인이 순수하게 천하제일검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건 확인했으나 그 검이 그에 걸맞는 이의 손에 쥐어지길 원하는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

“그것마저 떨쳐내야 아버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욕심이야 당연히 있어야지.”

“……네?”

“자신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검을 위한 거잖아. 자기 작품에 그런 애정도 없으면 그게 야장이야? 그 녀석 아비도 그랬는데 무슨.”

“아!”

“도사 흉내 그만 내고 땀이나 흘리라고 해. 네가 말하면 대충 알아듣겠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존.”

모서형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살뜰히 챙기네. 적당히 하고 일 얘기나 빨리 하자.”

그들은 이녕임가 가주 임종호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임종호와 단영이 반갑게 맞이했다.

정광은 단영 발치에 은신해 있는 흑서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논의를 주도했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안들을 도출해 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주님, 그만 갈게요.”

“벌써 말인가?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시게.”

임종호는 정광을 한결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정광은 한결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서요. 단 소가주님, 향리객잔 앞에서 만나 떠날까요?”

“그러세나.”

“철모, 안녕히 계세요.”

모서형이 아들을 돌아봤다.

“가주, 어미가 진혼을 배웅해 줘도 되겠소?”

모서형은 임가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척 아꼈다. 그런데 진혼이 철화각에서 일하는 기녀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그것도 광명좌사자 은호정과 맞서며.

임종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승낙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어머님.”

“고맙소. 진혼, 가자.”

“잠시만요.”

정광은 임종호에게 물었다.

“하나만 부탁드려도 돼요?”

“나도 마침 그럴 셈이었네.”

“이런. 뭔데요?”

“병기고에 잠시 들르시게. 아버님이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임종호가 덧붙였다.

“자네에게 뭔가 주고 싶다고 하셨네.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테니 가보시게나.”

“그럼 가야죠.”

“이제 자네 청을 말해보게.”

정광은 싱긋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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