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55화 (454/569)

2부 184화

순수하게

화르르르-

이녕임가 대장원 한복판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태상가주 임철환은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삼십여 년 전에 병기고를 불살라 놓고 이젠 자신의 집무실까지 건드리다니!

그간 꾹 참고 하라는 대로 다 했거늘, 그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자연히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도 거칠 수밖에.

혼인한 후 처음으로 반말을 써가며 분노를 토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불쾌하면 목을 치란다.

예전에도 그래놓고 또!

그때는 참을 인 자를 수도 없이 세며 가까스로 넘겼다만 지금은?

임철환은 저도 모르게 검파(劍把)에 손을 댔다.

스르릉-

애검도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서늘하게 으르렁거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임철환은 그것을 뻗어 아내에게 겨눴다.

“대체 뭐가 문제여서 이러는 게야?”

모서형도 검을 뽑아 똑바로 세우며 대꾸했다.

“뭐가 문제인지 당신이 모르는 게 문제지.”

“말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이깟 집무실, 차라리 없는 게 나으니까 그랬다고 말했을 텐데. 가주가 원하는 일을 끝끝내 막는 고집불통 영감이 또 무슨 어리석은 궁리를 할지 모르니 없애야지.”

임철환은 모서형을 노려보다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섬랑이라는 꼬마를 밀어주는 걸 반대했다고 불을 지르다니.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

모서형은 날카롭게 쏘아붙인 후 석상처럼 굳어 있는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주. 못난 부모가 다투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을 소모하게 해서 미안하오.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임종호는 굳은 얼굴을 풀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부모가 격돌하면 온몸을 내던져서라도 막으려고 했는데 한숨 돌린 것이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식솔들에게 손짓으로 흩어지라고 명한 뒤 어미를 바라봤다.

“말씀하십시오.”

모서형은 지체 없이 물었다.

“가주께선 왜 섬랑을 밀어주고 싶으시오?”

“녀석이 소교주가 되고 무사히 교주 자리에까지 오르면 본가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왜 뜻을 꺾으셨소?”

임종호는 아비를 슬쩍 봤다.

“아버님께서 반대하셔서입니다. 이유 없는 반대였으면 따르지 않았겠지만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쓸데없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르니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 말이구려.”

“아쉽지만 본가의 안위를 고려하면 그쪽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서형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모험을 하느니 안주를 택하겠다니. 이 어미가 아는 가주와는 다르군.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이오?”

“완전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아이가 싸우는 걸 한 번 더 보고 정하려 했지요. 헌데…….”

임종호는 활활 타고 있는 전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모서형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가주께선 태상가주의 주장에 흔들리긴 했으나 스스로 다시 판단하고 결정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이해해도 되겠소?”

“맞습니다.”

“가주, 다시 생각해 보시게.”

임철환이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이제껏 본가는 교내(敎內) 권력 싸움을 멀리하고 야장의 본분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헌데 이제 와서 그랬다간…….”

“본분 같은 소리!”

모서형이 말을 자르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가주, 지금부턴 귀를 막아주시오.”

“네?”

“어미의 부탁이외다!”

“아, 알겠습니다.”

모서형은 아들이 수긍하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임철환에게 쏘아냈다.

“야장 짓거리가 본분이면 계속 망치나 휘두를 것이지 왜 가주의 일에 참견해? 늙으면 죽어야지, 왜 아들의 앞길을 막느냐고!”

임철환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말본새하곤! 당신은 안 늙었어?”

“그쪽보단 젊지!”

“자랑이다! 그래 봐야 몇 년이나 차이 난다고! 주방 일만 하기로 했으면 거기 박혀 있을 것이지 왜 가문의 일에 끼어들어? 당신이 뭘 안다고!”

모서형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아하하.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번영했을까?”

“분쟁이 줄고 병기 생산성과 품질이 향상된 건 당신 덕이지만 내 역할도 컸는데 무슨!”

“질이 좋은 철광석이 매장된 광산을 발견해서 싸게 사들이고 후한 금액으로 총단과 새로 계약을 맺은 거?”

“그것들이 대표적인 것들이지!”

모서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둘 다 전대 교주님이 명하셔서 귀곡자가 도와준 것인데 아직도 모르다니.”

“……뭐?”

“그런 좋은 광산을 우연히 찾는 게 말이 돼? 총단 계약 건은? 총단에서 미쳤다고 웃돈을 얹어주냐? 전대 교주님께서 돌아가시고 현 교주가 들어서자 바로 깎았잖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당연히 임철환은 머리가 있었기에 미심쩍은 점을 깨달았다.

그래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있어. 내가 전대 교주님께 부탁드려서 이뤄진 일이야.”

“……다, 당신이 왜?”

“늙어 죽지도 않는 영감탱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쇠를 원 없이 두들기다가 죽으라고 그랬지!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뤄보라고! 신검을 만들어내라고!”

“거짓말! 당신은 내가 신검 제작에 매달리는 걸 싫어했잖아!”

“침식을 잊고 그러니까 제동을 걸었던 거야! 그래선 될 일도 안 되니까!”

“나를 그렇게 위했다는 걸 믿으라고?”

모서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정색했다.

“흥. 가문을 위해서지 무슨. 나도 임가 사람이야. 당신, 전대 교주님께 반드시 신검을 만들겠다고 바락바락 대들지 않았어?”

“하지만 그는…….”

“그분께서 먼저 귀천하셔서 화를 입진 않았지만 말을 입 밖으로 꺼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아버님께서 만든 검을 뛰어넘어야 본가의 위상이 올라갈 거 아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 이러고 있을 때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현 교주와 마뇌가 마령강시를 복원했잖아. 교주의 가문인 아극소연가가 한 손 거들었겠지. 걔들 위상이 올라갈 거야. 그게 끝일 것 같아? 고이륵단가는 전장 사업을 도모하고 있고 극랍염가는 흑유를 끝없이 퍼 올리고 있지. 토로번손가는 애초에 교주의 수족이고…….”

“그만! 나도 할 수 있어!”

“또. 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네. 그런 정신머리론 안 돼. 전대 교주님께서 당신을 뭐라고 평하셨는지 알아?”

임철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들은 말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으나 이 말만큼은 꼭 알고 싶었다.

“직접 들은 거야?”

“아니, 귀곡자가 듣고 내게 알려줬지.”

모서형이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 아버님은 최고의 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당신은 최고의 검을 만들어 인정받으려 한다고 하셨어. 그래서 안 될 거라고…….”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고!”

“신검 자체가 목적인 것과 수단에 불과한 것의 차이지. 이렇게 생각해 봐.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것과 아이를 낳기 위해 정략혼인 한 게 같은지. 전자였으면 지금처럼 서로 검을 겨누며 다투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지 않아?”

“……!”

임철환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목적이냐 수단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의 차이를 혼인 생활에 빗대어 설명하니 확연히 느껴서였다.

모서형이 살짝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귀곡자가 말하길,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봐야 소용없을 거라 했어. 고집불통에 자존심만 세서 화만 버럭버럭 낼 거라고.”

“…….”

그래, 그랬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해보니 아니네. 그만큼 늙어서 그런 걸까.”

“…….”

그래, 그럴지도.

모서형의 음성에 온기가 담기고 말투도 변했다.

“진정 신검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더 늙어서 죽기 전에, 당신 집무실처럼 전소되기 전에 신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보시오. 그걸 이용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가주에게 맡기시고. 당신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해내셔야 내가 지금껏 애쓴 보람이 있지 않겠소?”

“…….”

임철환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전각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굳이 애쓸 필요 없이 주위에 불이 옮겨붙지 않은 게 다행인가.’

미련을 버리자 모서형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금껏 애쓴 보람이라.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온 걸까?

정녕 순수하게 신검을 만들기를 원하는 건가?

그걸 위해서 내 혼을 불사를 수 있고?

임철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모서형이 양 뺨을 씰룩거리다가 아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주. 무엇 하시오? 어서 식솔들에게 지시를!

임종호는 은은한 먹빛을 발하며 무아지경에 빠진 아비를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알겠습니다.

-잠깐! 분명 귀를 막아주시라고 청했는데 전음을 어떻게 들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뒤.

임가 무인들이 태상가주 임철환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철통같은 경계를 섰다.

임종호와 모서형은 외부의 소리가 임철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내공을 운용했다.

그리고 임철환이 발하는 먹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짙어져만 갔다.

* * *

대장원 외부에 있는 임가 무인들은 가주의 명대로 군중을 진정시키고 멸혼생사투를 진행했다.

섬랑은 악전고투 끝에 상대를 쓰러뜨리고 가슴이 벅차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아아아! 해냈다! 본선에 진출했어!”

목숨을 걸고 싸운 건 둘째 치고, 지금껏 수련해 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사투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치열한 나날들 아니었던가?

이런 고난을 겪으며 간신히 쟁취한 성과였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대장원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뚫어져라 보다가 거의 동시에 함성과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 불이 꺼졌다!”

“땄어! 드디어 땄다고!”

“빌어먹을! 벌써 꺼지면 어떡해? 최소 일각은 더 탈 줄 알았는데!”

“후우우. 생사투도 못 맞췄는데 여기서도 잃었네. 빈털터리가 됐어.”

“가만. 진혼도 잃은 거 아니야?”

“뭐? 설마…… 아니, 그렇네?”

사람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모였다.

정광은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당하네. 불이 언제 꺼질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해 놓고 제가 잃었네요. 그것도 많이.”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포복절도했다.

“으하하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아니지! 도신이 갑자기 호구가 된 격이야!”

“클클. 이제야 좀 사람 냄새가 나는구먼.”

“정말 고맙네. 자네가 잃으니 이상하게 위안이 돼.”

정광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서형이 아무리 불같은 성정을 지녔어도 고집불통 임철환을 요리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거늘, 보기 좋게 당하지 않았는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난 것도 의아했지만 대장원에서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디 보자.’

정광은 기감을 넓혀서 살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원진을 그리고 있어? 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내공을 퍼뜨리고? 그 중심엔…… 이것 봐라?’

누군가 깨달음을 얻는 중이었다.

기운의 성질은 예전보다 부드러워졌으나 그 크기로 미루어 보아 임철환인 게 분명했다.

‘과한 색시를 얻더니 운이 트였네.’

정광은 피식거리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섬랑이 코앞에 다가와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인.”

“왜?”

“저 이겼어요.”

“그런데?”

“최종 예선을 통과했는데 아무도 축하를 안 해주네요.”

정광은 섬랑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잘했어.”

“후우우. 엎드려 절 받기네요.”

“겨우 이 정도로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야. 네 목표는 훨씬 높잖아.”

섬랑의 눈이 반짝였다.

“헤헤. 그렇죠.”

“그래. 어쨌든 수고했고 의자에 앉아서 쉬어.”

“네? 통과했는데 그만 가면 안 돼요? 굳이 다른 애들 싸우는 걸 볼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정광은 임가 무인이 호명하는 아이들을 보고 전주들을 향해 걸었다.

“잃은 돈을 복구해야 해.”

정광은 이기고 또 이겼다.

결국 복구하는 걸 한참 넘어 막대한 이익을 봤는데 대장원 정문이 살짝 열리더니 모서형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전음을 보냈다.

-지존, 내일 아침에 떠나실 계획이지요?

-응.

-오늘 해시(亥時)쯤에 방문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해시면 대략 두 시진 뒤.

그때쯤이면 임철환이 깨달은 것들을 갈무리하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그래.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후끈하지 않던데. 사랑싸움은 잘 매듭지었어?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쿵!

모서형의 얼굴이 사라지고 문이 거칠게 닫혔다.

생사투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대장원을 쳐다보다가 저마다 돈을 건 소년을 응원했다.

소년들이 흘린 피로 비무대가 붉게 물들어갈수록 하늘 역시 그 피를 머금는 것처럼 진홍색 노을로 변해갔다.

* * *

정광은 향리객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다가 길을 나섰다.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이라는 큰 행사가 끝나서 그런지 밤을 즐기러 나온 마인들이 무척 많았는데, 모두 정광을 알아보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보게, 진혼. 돈을 잃은 건 속이 쓰리지만 자네 덕분에 재밌었네.”

“오늘이 마지막이라 아쉽기 짝이 없군. 자네와 언제 또 이렇게 놀아볼 수 있을까?”

정광은 씩 웃으며 물었다.

“총단에서 열리는 본선은 구경 안 하실 거예요?”

한 마인이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본선에서는 도박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섭섭하게 왜 이러세요. 섬랑을 응원하면서 순수하게 즐기시면 되잖아요.”

“순수하게?”

“네.”

정광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칠대가문의 적자가 아닌 밑바닥을 구르던 녀석이 소교주가 되는 모습을 목도하시면 짜릿해지실 텐데.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

마인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제히 물었다.

“섬랑이 정말 우승할 것 같나?”

“물론이죠.”

정광은 자리를 떠나며 덧붙였다.

“제 안목은 정확해요. 아, 오늘 화재 건만 빼고. 총단에서 뵐게요.”

마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끼리끼리 모여 웅성거렸다.

정광은 그 소리들을 감상하며 임가 대장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정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애쓰네.’

그새 잔뜩 초췌해진 광명좌사자 은호정과 도올대였다.

‘잠깐 놀려주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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