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2화
영면(永眠)
은호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마령강시(魔靈僵屍)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을 통하는 걸 즐긴다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다녔을 뿐이다.
솔직히 위엄을 뽐내려고 호종하게 한 점도 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소문이 퍼질 줄이야!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요사한 말을 지껄였느냐?”
천마신교 광명좌사자의 분노를 일개 기녀가 감당할 리 있나.
모두 경기를 일으킬 만큼 겁에 질렸다.
“흐윽! 소, 소녀도 모릅니다. 제, 제발 용서를…… 끄르륵.”
한 기녀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애원하다가 기절했다.
다른 기녀들 역시 혼절하기 일보 직전!
그와 반대로 은호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문이라는 것의 속성을 잘 알아서였다.
‘빌어먹을. 마냥 화를 낼 때가 아니야.’
몸이 상하는 아이라도 나왔다간 정곡을 찔린 광명좌사자가 추문을 덮으려고 길길이 날뛰었다는 소문이 신강 전역에 퍼질 게 뻔했다.
그러면 장차 어느 기녀가 반기겠는가?
아니, 방문하는 지역마다 웬만한 주루들은 문을 닫을지도.
풍류객(風流客)이라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소리를 흘린 놈을 잡아 치도곤을 안기는 건 나중 일이다. 헛소문이라는 걸 알려야 해.’
은호정은 분노를 꾹꾹 누르며 자신을 변호했다.
“재미없는 농이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 그렇고말고요!”
“광명좌사자님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기녀들도 모두 동의했다.
허나 말로 그러면 뭐 하는가?
얼굴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천한 것들이 감히!’
은호정은 살기를 쏟아내려다 간신히 갈무리했다.
지금까지 참은 게 아까워서였다.
‘하나만 더 하면 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목을 가다듬고 기녀들에게 부드럽게 설명했다.
“마령강시들을 데리고 다닌 건 교주께서 붙여주셔서다.”
그래도 두려워하는 기녀들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헌데 꽃같이 어여쁘고 여린 너희들이 두려워할 것이란 건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목소리가 더 느끼해졌다.
“사내는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법. 잘 보거라.”
은호정은 신형을 돌려 마령강시들에게 명했다.
“칠살(七殺), 이십삼살(二十三殺). 숙소로 돌아가 기다려라.”
마령강시들은 즉시 주루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등롱(燈籠)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며 아름다움을 견주는 이녕의 밤.
그 화려한 밤을 즐기러 나왔던 마인들이 방립을 눌러 쓴 마령강시들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억! 마령강시잖아!”
“앞을 막으면 피곤죽이 된다! 어서 피해!”
마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마령강시들은 활짝 열린 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완전한 어둠에 잠긴 길에 접어들어 한창 달리는데…….
한 미청년이 갑자기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이야. 가주 녀석의 말을 듣고 혹시 몰라 길목에서 기다렸는데 운이 좋네.’
마령강시들은 미청년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달렸다.
숨을 몇 번 들이쉬면 바로 충돌할 상황!
그사이 미청년 정광은 기감을 퍼뜨려 주변을 살피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멍청이 은가 놈도 없겠다, 얼마나 제대로 복원했는지 한번 확인해 주마.’
뜻을 세우자 몸이 움직였다.
허리춤에 꽂혀 있던 병기 역시 마찬가지.
귀기(鬼氣)를 품은 도가 도갑에서 뛰쳐나와 마령강시들을 베었다.
까앙-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이 어둠을 울렸다.
마령강시들이 각자 한 손을 뻗어 도를 튕겨낸 것이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대충 복원한 건 아니네.’
마령강시를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운 건 사람의 육신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단단한 몸이었다.
헌데 이놈들은 최소한 기본은 갖추고 있는 것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령강시들은 뻗었던 손을 그대로 움직여 정광의 얼굴과 가슴을 후려쳤다.
망자(亡者)가 펼친 권장술(拳掌術)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한 초식!
도를 움직여 막을 새도 없이 정광의 얼굴과 가슴에 마령강시들의 손이 박혔다.
허나 그것은 잔상.
정광은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주르륵 물러난 뒤 미리 봐뒀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손놀림도 제법이고. 행동 양식을 볼까?’
신법을 펼쳐 달리자 마령강시들이 쫓아왔다.
은호정이 내린 명을 따르다가 중도에 공격을 받자 우선순위를 바꾼 것이다.
정광은 흘깃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후를 인식할 줄 아네. 뜀박질도 나쁘지 않고.’
암연풍(暗然風)의 묘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주위 풍경이 쭉쭉 밀려났는데 놈들도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럼 전체를 견식해야지.’
이녕의 화려한 밤과 동떨어진 적막한 야산이 나타났다.
정광은 그 산에 올라 숲을 가로지르다가 주변이 휑한 공터에 이르자 멈춰 섰다.
하지만 마령강시들은 그러지 않았다.
달려오던 기세를 죽이지 않고 정광을 덮쳤다.
정광은 전륜보(轉輪步)를 밟아 옆으로 세차게 돌며 수라도(修羅刀)를 펼쳤다.
끼이이이-
첫 공방 때 보다 많은 내공이 담기고 회전력까지 더해진 도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귀곡성을 토했다.
콰직!
칼로 벤 소음이 아니라 도끼로 찍은 듯한 굉음이 터졌다.
동시에 마령강시 한 구가 포탄처럼 맹렬히 날아가 아름드리나무와 충돌했다.
콰앙!
그 굵은 나무가 그대로 꺾여 쓰러졌다.
그사이 정광은 다른 마령강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훌쩍 뛰어올랐다가 신형을 세 번이나 뒤집고 내려섰다.
그리고 폐부에 쌓인 탁기를 밖으로 내뱉는데…….
나무를 부러뜨리고 처박혔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연신 헛손질을 했던 놈도 정광을 향해 돌아섰다.
정광은 피식 웃었다.
‘제대로 복원했네. 그럼…….’
시험은 그만 끝내고 분쇄할 차례였다.
바로 마혼(魔魂)을 개방했다.
정광의 눈에서 지옥의 겁화(劫火)가 일렁였다. 그 불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정광의 전신을 흑염(黑焰)으로 불태웠다.
이런 극심한 변화는 외부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엄청난 살의가 들끓으며 고양감이 치솟았다.
그렇다고 그것들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스스로 원해서 불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모든 불순물을 소멸시키고 순수한 마(魔) 그 자체가 되어버린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폐기하기 전에 면상부터 확인해 볼까.’
마령강시의 무위는 생전의 무공 경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놈들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는 안면이 있는 놈들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였다.
마침 마령강시들이 쇄도했다.
정면에서 동시에 펼쳐진 합공!
살아 있었으면 마혼에 굴복하거나 주눅 들었겠지만 혼백(魂魄)을 잃은 놈들이 뭘 알까.
정광은 쥐고 있던 도를 위로 살짝 던지고 쌍장(雙掌)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심후한 내공이 터져 나가 마령강시들이 눌러 쓴 방립을 박살 냈다.
자연히 놈들의 용모가 드러났고 정광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현 교주와 마뇌를 향한 살소(殺笑)였다.
‘최대한 괴롭게 죽여주마.’
그와 반대로 이 마령강시들은 되도록 편안하게 보내줘야 했다.
죽어서도 온전히 잠들지 못한 망자에 대한 예의이자 쓸 만했던 수하들에게 베푸는 온정이었다.
‘호경, 관태. 이승에서 그만 떠돌고 푹 자라.’
허공에서 떨어지는 도를 잡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도신이 부르르 떨며 귀기를 미친 듯이 쏟아냈다.
정광은 진각을 강하게 밟으며 도를 크게 휘둘렀다.
도가 표출하는 귀기(鬼氣)와 마령강시들이 흘리는 사기(死氣), 똑같이 죽음을 바탕으로 하는 두 기운이 격돌했다.
힘과 힘의 싸움!
콰자작-
마령강시들은 허리가 거칠게 베여 두 동강 났다.
그리고 바로 양팔이 잘렸다.
정광은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도신을 살피다가 혀를 찼다.
칼날이 손상되어 이가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한동안 쓰다 보니 손에 익었는데 이 꼴이 되어버렸네. 임가에서 하나 새로 얻어야겠어.’
숨을 몇 번 몰아쉬자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도를 도갑에 넣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마령강시들에게 다가갔다.
하체에는 용무가 없었기에 상체만 한자리에 모았다.
마령강시들은 정광을 물려고 이를 딱딱거렸다.
“어쭈. 이것들이 진짜.”
정광은 양손으로 놈들의 천령개를 한 번씩 쥐어박고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그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직이 속삭였다.
“성불(成佛)이라도 시켜주고 싶은데 부처와는 친하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볼게.”
귀곡자를 치료하며 얻은 경험을 떠올리면서 삼단전을 조심스레 운용했다.
상단전 인당(印堂)을 활짝 열어 주변에 흐르는 자연지기와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중단전 옥당(玉堂)의 성질을 중용(中庸)의 도(道)로 이끄는 것과 동시에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의 구결대로 호흡하여 하단전 석문(石門)을 열었다.
그리고 들숨에 실려 들어온 자연지기가 석문에 쌓이기 직전, 숨을 도로 내뱉으며 끌어올려 양손으로 배출했다.
자연히 그 기는 마령강시들의 백회혈(百匯穴)로 스며들었다.
정(精), 기(氣), 신(神) 삼단전을 하나로 이어 통로로 삼은 게 아니라 흉내만 낸 편법에 불과했으나 귀곡자를 치료했을 때처럼 효과가 있었다.
자연지기(自然之氣)는 곧 생기(生氣). 마령강시들의 사기(死氣)와 상극 아닌가?
다소 변질되긴 했지만 자연지기에 가까운 기가 꾸준히 침투하자 마령강시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몸부림쳤다.
허나 정광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령강시들은 계속 괴로워했다.
정광도 얼굴을 점점 일그러뜨렸다.
‘망할. 편히 보내주려고 했는데.’
손을 떼고 다른 방도를 강구하려고 하는 그때.
마령강시들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푸르딩딩했던 피부가 칙칙하지만 사람의 것처럼 돌아오고 표정 역시 평온해졌다.
정광은 한시름 놓으며 두 쌍의 눈을 번갈아 봤다.
두 쌍의 눈도 마혼이 이글거리는 정광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곧 둥글게 휘었다.
그 끝엔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광은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양손 엄지로 눈물을 닦아줬다. 눈꺼풀까지 내려주자 마령강시들이 축 늘어졌다.
아니, 마령강시가 아니었다.
호경과 관태는 사람이 되어 영면(永眠)에 들었다.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자연지기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 기적을 일으킨 정광은 기분이 더러웠다.
‘쪽팔리게 이게 뭐야? 더 제대로 익혔으면 가뿐하게 보내줄 수 있었는데.’
자연지기 운용법을 더 신경 쓰리라 다짐하며 적당한 곳을 찾아 구덩이를 두 개 팠다.
그 속에 호경과 관태를 각각 묻고 저승길에서 노잣돈으로 쓰라고 금원보를 넣어줬다.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뒷마무리까지 하고 나니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정광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마령강시와 상극이라 그런지 자연지기의 효과가 확실하네. 능숙하게 쓰게 되면 놈들을 상대하기 훨씬 쉬워지겠어. 가만. 역천경(逆天鏡)을 부려서 사기를 흡수하게 해도 되잖아. 사기를 극도로 응축시켜 넣어서 생을 불어 넣은 놈들이니까 쓸모가 있을 거야.’
전생에 폐기할 때도 고생깨나 했으니 현생엔 더 힘겨울 터.
허나 자연지기와 역천경을 쓰면?
전자는 천하를 유유히 흐르며 찬성도 반대도 안 했으나 후자는 정광의 품속에서 진저리를 치며 의사를 확실히 표현했다.
-우웅! 우웅!
-시끄러워, 인마.
역천경은 한 대 쥐어박자 가늘게 떨었다.
정광은 내친김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아까 일을 떠올리며 명상에 잠겼다.
괴물들의 격전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풀벌레들이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을 떠돌던 자연지기가 몰려와 정광을 따뜻하게 감쌌다.
* * *
광명좌사자 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루에서 나왔다.
‘이 나이에 이게 웬 고생인지. 그래도 내일부턴 나아질 테니 다행이려나.’
점잖게 차를 마시며 기녀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헛소문을 최대한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래도 애쓴 보람은 있었다.
기녀들이 두려움이 많이 가신 얼굴로 시중을 든 것이다.
‘거참. 감질나 죽는 줄 알았네.’
그 대가로 내일부턴 제대로 즐기리라.
은호정은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오가던 마인들이 재빨리 길을 틔우며 예를 표했다.
“광명좌사자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풍류를 즐기고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살펴 가십시오.”
은호정은 턱을 거만하게 끄덕이며 뻥 뚫린 길을 위엄 있게 걸었다.
그러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접어들자 경신술을 펼쳐 달렸다.
어서 임가 대장원에 가 주린 배를 요리로 채우고 못 이룬 욕망을 술로 적시기 위해서였다.
은호정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배정받은 전각에 들어갔다.
시비를 불러 술상을 봐오라 하고 의자에 편히 앉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거야 원.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별것 아닌 일로 신경 좀 썼다고 두통이 느껴지다니.’
세월이 야속했지만 어쩔 수 있나.
이럴 때일수록 더 즐겨야지.
술상이 들어오자 열심히 먹고 마셨다.
배를 채우고 술도 취해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자 피곤이 몰려왔다.
‘끄응. 그만 자야겠군.’
내일이면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이 끝난다.
마지막 밤을 실컷 즐기고 그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려면 일찍 자는 게 현명했다.
은호정은 방에 들어가 비단 금침에 몸을 눕혔다.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가고 입에선 하품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하품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호정은 퉁기듯 일어나 방 안을 살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 안 보였다.
“치, 칠살? 이십삼살?”
은호정은 방문을 박차고 나가 전각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어, 없어? 왜?”
교주가 붙여준 마령강시들이 사라지다니!
은호정은 전각 밖으로 뛰쳐나가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칠살! 이십삼살! 어딨느냐? 어서 숙소로 돌아와라!”
몇 번 더 소리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임가 사람들은 물론이오, 도올대(檮杌隊)까지 몰려와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 마령강시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은호정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