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0화
그건 네 생각이고
이녕임가(伊寧任家)는 마도칠대가문에 속하는 무가(武家)였으나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병기보다 망치를 먼저 쥐여줬다.
자연히 아이는 망치를 친숙하게 여기게 되고 백발이 성성해질 때까지 쇠를 내려치다가 죽어서야 손에서 놓곤 했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명가 무인들이 그런 거친 일에 매진하는 치열한 삶을 살다니.
외부 사람들은 이녕임가 사내들을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야장(冶匠)이자 뛰어난 무인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사는 여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리 있나.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을 질렀다.
“오라버니! 하루의 반은 쇠를 두들기고 나머지 반은 무공을 수련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버님! 소녀도 그렇지만 어머님께서 많이 서운해하십니다! 그만 좀 하시고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십시오!”
“여보! 당장 파혼합시다! 당신과는 도저히 못 살겠소! 인두겁을 뒤집어쓴 짐승이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지! 나야 그렇다 치고. 낳아주신 어머님께 미안하지도 않소?”
“이놈의 영감탱이만 죽으면 돼. 아니, 저놈의 자식새끼도 죽어야지. 가만. 새끼의 새끼도…… 하아아. 끝이 없구나! 이놈의 집안! 아예 쫄딱 망해야 해!”
멸문을 기원하는 건 조금 심했지만, 대부분의 여인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같은 핏줄로 이어졌거나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해야지, 이렇게 남남보다 더 얼굴을 보기 힘든 사이로 사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항의하고 따져도 소용없었다.
대개 장인(匠人)은 고집불통이기 마련.
하물며 장인 중의 장인이라 불리는 이녕임가 사내들은 오죽할까.
쇠심줄보다 질긴 고집을 부리며 꿋꿋이 버텼다.
파도가 너무 거세다 싶으면 잠시 따르는 시늉을 할 뿐, 얼마 안 가 망치질을 하고 병기를 휘두르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당연히 날이 갈수록 집안 꼴은 엉망진창이 됐고 밖으로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그 어떤 처자도 임가 사내와 혼인을 안 하려고 했다.
인생 대부분을 독수공방(獨守空房)하다가 죽을 텐데 미쳤다고 그러겠는가?
반면 임가 처자들은 최고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명성을 떨쳤다.
어느 가문으로 시집을 가든 간에 망할 놈의 임가에 있는 것보다는 낫지,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게 되니 처신도 잘하게 됐고 그만큼 많은 동정과 따뜻한 칭찬을 받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임가 사내들도 변할 수밖에.
하지만 그게 금방 될 리 있나.
너무 조금씩 변했다.
결국 참다못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여인이 있었으니, 현 태상가주 임철환의 아내 모서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년 전.
그녀는 극랍염가(克拉閻家)로부터 흑유(黑油)를 들여와 병기고에 뿌렸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불을 질렀다.
화마가 순식간에 병기고를 휩쓸었다.
그녀는 크게 놀라 달려온 임가 사내들에게 검을 겨누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 병기에 미친 것들아! 내 처소에 불을 질렀어도 이렇게 달려왔을 것이냐?”
“……!”
“당연히 아니겠지! 그랬으면 내가 이럴 일도 없었을 테니까!”
뒤늦게 달려온, 그때는 가주였던 임철환이 분노를 토했다.
“부인!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애써 만든 병기들이 모두 타고 있지 않소? 빨리 불을 꺼야 하니 어서 비키시오!”
모서형은 냉소를 지었다.
“못 비키겠소! 내 목을 치고 그러시오!”
임철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허! 부인!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냉정? 내 앞에서 지금 냉정을 논해?”
모서형의 눈에서 병기고를 집어삼킨 화마보다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지금껏 그따위로 행동해 놓고 뭐가 어째? 그리고 부인이라니? 당신이 언제 나를 아내로 대접했다고!”
“서운한 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소만 말이 지나치…….”
“당신뿐만이 아니야! 식구(食口)가 무엇이오?”
“……?”
“한집에서 살며 밥을 함께 먹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오! 헌데 이놈의 집안은 안 그래! 이래서야 남보다 못하지 않소!”
“……!”
모서형은 검을 똑바로 세워 전면을 방어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최소한 식사는 같이해야 하오! 내가 죽으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고! 그러겠다는 확답을 받을 때까지 불을 못 끄도록 막을 것이오! 더 번지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을 것이외다!”
임철환과 임가 사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는 임가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점이 있었다.
저마다 병기를 꺼내 들고 모서형 옆에 늘어섰다.
목숨을 걸고 그녀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시위였다.
모서형은 그들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둘러보고 임철환을 응시했다.
“요리는 내가 책임질 것이오. 이제 당신의 책임만 남았소.”
결국 임철환과 사내들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인들의 울분을 그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그 결과, 임가 사람들은 밥만큼은 함께 먹게 되었다.
이 일로 모서형은 철모(鐵母)라 불리게 됐는데 주방을 관장하며 그간 쌓였던 울화를 풀었다.
“아들이라는 녀석이 새벽부터 망치질을 한답시고 문안 인사도 안 해? 오늘은 삼시 세끼 풀죽으로 준비해라.”
“네, 철모.”
숙수들은 명을 충실히 따르고 임가 사내들은 괴로워했다.
온종일 풀죽을 먹었는데 힘을 어찌 쓸까.
이 사태의 원흉인 임종호는 어미에게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는 효자가 됐다.
허나 모서형은 만족하지 않았다.
“내게만 잘하면 뭐 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네 아내에게 더 잘해야지. 하루에 최소 반 시진은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라.”
“……네, 어머님.”
“듣는 척만 할 속셈이었으면 당장 포기하는 게 좋을 게다. 아주 사소한 얘기도 진지하게 들으며 대응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처음에는 잡음이 많이 나왔으나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
임가 남녀들은 서로를 더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었다.
이는 놀라운 변화를 끌어냈다.
이녕임가의 주 사업은 병기 제작 및 판매.
생산성도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거기에 가정까지 전보다 화목하게 됐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하지만 모서형은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꾸준히 변화를 유도했다.
덕분에 임가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들은 가주의 체면을 고려해 자세한 사정은 숨겼지만 모든 귀를 막을 순 없었다.
이 놀라운 소식은 총단에 있는 소교주의 귀에 들어갔다.
“꽤 재밌네.”
모든 게 귀찮아져서 빈둥대고 있던 소교주가 움직였다.
직접 임가에 행차한 게 아니라 입술만 움직여 명을 내렸다.
“모서형이라는 애, 데려와.”
“존명!”
며칠 뒤.
모서형은 총단으로 달려와 소교주 앞에 부복했다.
“만세만세…….”
“응. 네가 임가를 먹었다며?”
천하의 모서형도 소교주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아닙니다. 조금 바꿨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덕분에 웃었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
“없어? 그럼 그만 가고.”
“아, 아닙니다!”
소교주가 부른다는 말에 두려움을 꾹 참고 왔거늘, 이런 기연이 생길 줄이야!
‘뭐가 좋을까? 아!’
모서형은 재빨리 머리를 굴린 뒤 입을 열었다.
“폐가(弊家)의 가주가 죄를 범하더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소교주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하. 걔가 반란이라도 획책하고 있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주가 과거 소교주께 천하제일신검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냥 편하게 두들겨 맞았다고 그래.”
모서형은 자신과 소교주가 무슨 사이인지 몰랐으나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주는 기절하기 직전에 반드시 해낼 거라고 선언했지요.”
“그래서?”
모서형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허나 힘들 것 같습니다. 감히 소교주께 허언을 한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놈이 그렇게 자백했어?”
“가문의 중론입니다.”
“하긴. 내가 봤을 때도 그랬지. 그런데…….”
소교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놈을 죽이고 싶지 않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가주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네.”
“아닙니다. 폐가를 위해서입니다. 한창 성장하는 이때, 그가 없으면 중심이 흔들립니다. 제발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흐음. 밉지만 너도 임가 사람이라 이건가?”
“그렇기도 합니다만 소인이 지금껏 쏟아부은 노력에 금이 가는 게 싫어서 그럽니다.”
모서형의 눈에 열기가 어렸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그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소교주는 모서형을 내려다보다가 씩 웃었다.
“자존심이 강하네. 그럼 아까워할 만하지. 좋아. 그렇게 하자.”
“만세만세…….”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사람이 어떻게 만세를 살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소교주!”
“뭘 그런 걸 가지고.”
소교주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시킬 만한 일이 생기면 얘기할게. 그때 제대로 하기나 해.”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가만. 계산은 제대로 해야지. 하나씩 주고받는 모양새가 됐잖아.”
“네?”
소교주는 옆에 있던 귀곡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잘 들었지?”
“네, 소교주.”
“얘가 뭐가 필요한지 알아보고 적당히 도와줘.”
귀곡자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 간다.”
소교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로 향하다가 돌아섰다.
“어? 우냐?”
모서형은 소교주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다가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펑펑 흘리는데.”
소교주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철모라는 별호는 안 어울려. 뭐 그래도 네가 애써서 얻은 것이니 평소엔 그렇게 쓰고. 흠. 뭐가 좋으려나.”
소교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나는 철혈화(鐵血花)라고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
약 이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 * *
정광은 전생에 부렸던 변덕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름 괜찮은 추억 아닌가?
그 어렸던 녀석이 이렇게 성장…… 늙다니.
어쨌든 감회가 새로웠다.
허나 세월과 생사의 벽을 뛰어넘어 다시 만난 모서형은 정광을 다그쳤다.
“네 입이 그렇게 고급이라 가리는 게 많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사실이긴 한데.
정광은 단영을 노려봤다.
‘대체 얘한테 뭐라고 지껄인 거야?’
얼굴이 굳은 단영에게 전음으로 물어볼 새도 없었다.
모서형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뭐? 절대 미각?”
“…….”
내가?
금시초문이었지만 모서형의 시선은 정광에게 꽂혀 있었다.
“콩이나 채소는 예외지만 고기 요리만큼은 완벽하게 판별한다고 들었다. 그 감각으로 본가의 요리를 견식하겠다고?”
“…….”
아닌데.
나도 ‘절대’를 붙일 수 있는 감각은 없다고 믿는데 무슨.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단영이 모서형의 자존심을 건드려 고기 요리만 준비하게 했다는 걸 눈치채서였다.
‘이거야 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명을 완수하면 뭐 하는가? 이런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켰는데.
정광은 모서형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철모, 오해예요.”
“무어라?”
“이녕임가의 고기 요리가 천하일품이라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거든요.”
“그렇긴 하지.”
모서형은 식솔들의 행실이 마음에 안 들면 형편없이 먹였지만 괜찮다 싶으면 더없이 화끈하게 먹였다.
그를 위해 최고의 숙수들만 고용했기에 이런 자신감을 표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래서 딱 한 번만이라도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단가 소가주님이 저를 놀리려고 장난을 치셨나 봐요.”
정광은 단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나무랐다.
“하여간 짓궂으시기는. 소가주님 때문에 놀랐잖아요.”
단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더니 시커멓게 죽었다.
모서형은 날카로운 눈으로 정광과 단영을 번갈아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것 봐라? 가만 보니 너희 관계가 수상하구나. 빈객과 소가주가 아니라…….”
모서형은 말끝을 흐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임가 가주 임종호가 들어왔다.
“어머님, 오늘도 가문을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서형은 담담히 예를 표했다.
“가주, 오셨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습니다. 혹시 이들에게 용무가 있으셔서 오신 겁니까?”
모서형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로 중요한 자리를 망쳐서야 쓰나.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돌아와서 캐물으면 되리라.
“아니오. 이만 나가보겠소. 시간이 되면 요리를 들이리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모서형이 나가자 임종호는 정광을 빤히 바라봤다.
“자네는 참 흥미로워.
“왜요?”
“어머님이 자네에게 흥미를 느끼고 계시고 있지 않은가?”
“전 아닌데.”
“나는 자네가 의심스럽네.”
“네?”
“아버님께서 자네를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아무런 설명도 안 하셨을 것 같은가? 아버님께 무엇을 부탁하려고 했지?”
그때, 문이 열리고 태상가주 임철환이 들어왔다.
그는 정광을 똑바로 노려보며 경고했다.
“무슨 꿍꿍이든 간에 소용없다. 밥을 먹고 일 얘기를 한 뒤 바로 떠나라.”
정광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