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9화 (448/569)

2부 178화

단단히 전해

정광은 두 개의 서찰을 번갈아 보다가 민현유를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너를 한 번 손봐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것들이 그걸 막아줄 수 있을까?”

민현유가 서찰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탄식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먼저 몰래 읽어봤을 것 아냐. 별 내용 없나 보네.”

“애매합니다. 대인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단 말이야.”

정광은 민현유를 찬찬히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너처럼 똘똘한 녀석이 왜 가끔 내 신경을 긁을까? 그러다가 이번처럼 선을 넘어버리고.”

민현유가 공손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한번 받아주시니 이 정도는 괜찮은가 싶어 도가 지나치게 까불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장난해? 그건 아니지.”

정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좀 전에 말했잖아. 너는 똘똘하다고. 그런 바보짓을 할 리 있나.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무엇입니까?”

정광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되물었다.

“내가 전대 교주의 후인이라 믿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일족에게 얼마나 호감을 품고 있는지 시험한 것이겠지. 귀곡자를 구해줬으니 더 큰 것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확인하려고.”

“제 목숨을 걸고 말입니까?”

정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적했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네 목숨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

민현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자 정광이 덧붙였다.

“아니면 네가 원하는 게 있어서 독단적으로 벌인 일일 테고.”

“…….”

“흐음. 조금 전보다 눈이 더 흔들리네. 이쪽이 맞아서 그런 걸까, 일부러 그런 걸까?”

정광은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가만. 둘 다일 수도 있잖아.”

“무슨 말씀입니까?”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네 생각에 그건 아니다 싶은 거지. 그렇다고 거역할 순 없고, 명을 따르되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서 너와 네 조직을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대인.”

“왜?”

민현유는 천천히 바닥에 부복했다.

그리고 무거운 음성으로 청했다.

“소인이 뭐라 변명해도 대인의 귀엔 탐탁지 않게 들릴 겁니다. 대인의 뜻대로 하십시오.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정광은 가볍게 거절했다.

“이것도 저것도 버거우니 죽어서라도 빠져나가시겠다? 그건 곤란하지. 누구 좋으라고.”

“허나…….”

“고개 들어.”

정광의 음성엔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민현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었다가 정광의 칠흑보다 어두워진 동공과 그 동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사한 빛을 보고 굳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광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마기가 흘러나와 민현유의 육신을 옭아맸다. 너무 탁해서 오히려 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와 혼백을 짓눌렀다.

“넌 내 거야. 내가 죽으라고 명할 때 죽는다.”

“끄으윽…….”

민현유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뭐 그렇다고 너무 풀 죽지는 말고. 적당히 대드는 건 꽤 귀엽거든.”

“아아아악!”

민현유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눈을 까뒤집었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엄살은. 소리 차단하기 귀찮으니까 일어나서 앉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현유를 짓밟던 힘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민현유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헐떡거리다가 간신히 일어나 비틀거렸다.

“대, 대인. 물수건 좀 써도 되겠습니까?”

“보기 역하니까 제발 써줘.”

“죄송합니다.”

민현유는 정광이 사용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힘없는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느꼈어?”

“그렇습니다. 밑바닥부터 경험하면서 올라가 훗날 경영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 전에 죽기 딱 좋지요. 제 자식은 반드시 편하게 키울 겁니다.”

“그건 더 어렵지.”

“왜 그렇습니까?”

“애가 있긴커녕 혼인도 못 했는데 너처럼 속을 알기 힘든 놈을 어떤 여인이 좋아하겠어? 마음 편하게 빨리 양자를 들이는 게 나을걸?”

민현유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일을 할 때의 소인과 여인을 대할 때의 소인은 다릅니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일을 보느라 바빠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혼인과 출산은 시간문제…….”

“더 바쁘게 만들어서 영원히 문제가 되게 해주기 전에 입 닫아.”

“…….”

“이럴 땐 말을 잘 듣는다니까. 잡담은 그만하고 서신이나 보자.”

이녕임가에서 온 것은 예상대로였다.

단영이 태상가주를 설득하진 못했지만 가주는 잘 구슬렸는지, 가주가 내일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초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태상가주 놈을 또 만나봐야 하니 이걸 핑계로 가서 보면 되겠네.’

그다음은 총단에서 보낸 서찰이었는데 뜻밖의 내용이었다.

‘총단에 오면 자기들부터 만나달라?’

정광의 어미가 몸담았었던 이 조직은 한등민가(汗騰閔家)가 운영하는 향리객잔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당연히 한번 들러볼 예정이었지만 그쪽에서 이렇게 초청할 줄이야.

‘흐음.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신강에 돌아온 이래로 그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듣긴 했으나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유야.”

“네, 대인.”

“좀 묻자. 제대로 대답해야 해.”

정광의 눈에서 새카만 불꽃이 일렁이고 민현유의 안색은 시커멓게 죽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아침 식사를 하고 일행과 함께 향리객잔에서 나왔다.

섬랑은 곧 있을 생사투를 대비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는데 뜻밖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주들과 그들의 수하들이 퀭한 눈을 끔벅이며 객잔 앞에 모여 있는 것 아닌가?

“어? 독두 아저씨, 몰골은 왜 그러시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왜긴.

광명좌사자 은호정이 야밤을 틈타 살인멸구를 하려고 들지도 몰라 잠을 설쳐서 그렇지.

낮이라고 방심할 순 없어서 진혼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나.

독두가 움푹 들어간 눈을 억지로 둥글게 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네가 잘 싸울지 걱정이 돼서 밤을 지새웠다. 내친김에 응원하러 왔고. 몸 상태는 괜찮느냐?”

섬랑은 황당한 얼굴로 독두 패거리를 훑어봤다.

웬 걱정에 응원?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저야 괜찮은데 아저씨들이 걱정이네요. 그 몸으로 오늘 도박판, 제대로 벌이실 수 있겠어요?”

‘도박판’이라는 말에 독두 무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으하하하! 그걸 말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너는 잘 싸우고 이기기만 하면 돼.”

“꼭 회광반조(回光返照) 같네요.”

“어허! 어른을 놀리면 쓰나. 좋다. 이녕임가에 도착하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마.”

독두는 허언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물 만난 고기보다 훨씬 더 생기발랄하게 움직였다.

이는 다른 전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자! 탁자는 여기에!”

“대인의 마차에서 재물들을 꺼내라!”

“뭣들 하느냐? 고객들에게 나눠줄 목패(木牌)를 준비하지 않고?”

“저울을 다시 한번 확인해라. 얕은 수작을 부리는 망종이 반드시 나올 것이야.”

수하들의 눈그늘이 더 짙어졌다.

입으로 떠드는 건 쉽지만 그걸 직접 하는 사람은 죽을 지경 아닌가?

그래도 어쩔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존명!”

죽어라 움직여 명을 완수했다.

독두는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목청을 가다듬고 우렁차게 외쳤다.

“으흠! 흠! 독두가 교우(敎友)들께 인사드리오! 오늘도 더없이 공정하며 신명 나는 판을 벌일 것이니 다 같이 참여하여 역사에 남을 즐거움을 누립시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함성을 질렀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굳은 얼굴로 대장원 정문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광명좌사자가 오늘도 데리고 나오겠지?”

“마령강시(魔靈僵屍) 말인가? 당연하지. 어제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뽐냈는데 오늘이라고 다를까.”

“거참. 전대 교주님께서 몽땅 폐기하시고 제조법까지 불사르셨는데 어떻게 된 거야?”

“현 교주가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출신이니 그쪽에 조금이나마 조예가 있겠지. 그리고 마뇌가 무슨 수를 쓰지 않았을까?”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대단하긴 한데,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전대 교주께서 관을 부수고 나오시고도 남을 일 아닌가?”

“흐윽!”

한 마인의 말에 다른 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대 교주인 정광은 소싯적부터 강시를 극도로 싫어했다.

신강 전역을 발아래에 두게 되자 모두 절멸시켰고 앞으로 만들 여지조차 없애 버렸는데 그걸 복원하다니?

마인들은 전대 교주의 성깔을 떠올리며 두려워하다가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흠. 흠. 꽤 재밌는 농이군.”

“내 말이. 그분이 아무리 대단하셔도 부활하시는 건 말도 안 되지.”

허나 오래가지 못했다.

“제기랄. 그래도 영 껄쩍지근하네.”

“아 몰라. 노름이나 즐기자고.”

그때, 이녕임가 대장원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전날과 똑같은 이들이 나왔다.

마인들은 저도 모르게 마령강시들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대동소이한 생각을 했다.

‘진짜 재주도 좋아. 저것들을 다시 복원할 줄이야.’

‘칠살(七殺)과 이십삼살(二十三殺)이라고 했었지? 그럼 최소 스물세 구(具)는 있다는 얘기잖아.’

‘몇 구 없는데 일부러 이십삼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허장성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아니야. 금방 드러날 텐데 그런 얕은수를 쓸 리 없지.’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교주의 힘과 권위가 더 강해졌구나. 조심해야겠어.’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다들 조용해질 수밖에.

은호정은 적막해진 장내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교주의 위엄이 한층 높아진 걸 느껴서였다.

정광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다가 크게 외쳤다.

“곧 시작되겠네요! 오늘은 판마다 전부 걸게요!”

“……!”

마령강시들에게 신경을 쏟고 있던 마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건 진혼 목소리인데?”

“파, 판마다 전부?”

“자네도 들었나?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았군!”

사람들은 일제히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광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 함께 달려보죠!”

조용했던 장내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진혼이 한 말 들었지? 나도 오늘은 전력으로 간다!”

“망할. 도박 따윈 관심 없는데 솔깃하네. 나도 가마!”

독두와 전주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추겼다.

“사내로 태어나 이런 판에 안 낄 수 있나!”

“여인으로 태어났으면 한 방을 노려야지!”

“도박에 귀천이 어딨고 성별이 어딨소? 음양인(陰陽人)도 고자도 어우러져 즐길 수 있으니 어서 준비들 하시오!”

“와아아아아!”

마인들이 열광했다.

은호정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그는 모든 일의 원흉인 정광을 노려보며 전음을 보냈다.

-네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교의 중요한 행사이자 잔치인 멸혼생사투를 즐기는 것뿐인데요.

은호정의 전음에 살기가 실렸다.

-항상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정광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광명좌사자님은 앞도 조심하시고요.

-무어라?

-높은 자리에 계시니 적이 많으실 거 아니에요. 걱정돼서 드린 말씀이니 곡해하지 마세요.

은호정은 정광을 주시하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뻔한 도발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나이를 먹는 게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진기는 조금씩 흩어지고 육신은 쇠약해졌다.

어린놈들은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고 교주와 마뇌 또한 그를 대우하는 정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내게 마령강시들을 두 구나 맡겼어. 아직 신임하고 있는 거야.’

은호정은 불안감을 애써 씻어내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노비가 상전을 걱정하는 꼴이군. 말이 나온 김에 언젠가 너를 종으로 삼아 실컷 부리다가 죽여주마.

-네? 제가 훨씬 더 부자일 텐데. 천하에 노비보다 가난한 주인도 있나요?

-이놈이 진짜!

은호정이 폭발하려고 하는데.

이녕임가 가주가 비무대 위에 올라가 소리쳤다.

“멸혼생사투를 시작하라! 모두 출전자들의 무운을 빌어주시오!”

“와아아아아!”

가주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천막으로 가다가 정광을 흘깃 바라봤다.

정광은 씩 웃으며 두 손을 우아하게 모았다.

초대를 기꺼이 수락하고 방문하겠다는 의미였다.

가주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정광은 시선을 돌려 다른 천막에 있는 단영을 응시했다.

단영도 정광을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애 좀 썼나 봐. 수고했어.

-아닙니다, 지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근데 태상가주 놈, 어제 만났거든.

-네? 어디서 말입니까?

정광이 간략하게 설명하자 단영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거 안 좋군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속이 좁은 놈이었어. 은호정이 시비를 걸지는 않았고?

-흑서 어르신을 몇 번 도발했는데 잘 참으셨습니다.

-흑서 걔도 속이 좁은데. 꽁해서 조용히 있는 거구나. 가주 녀석은 나를 무슨 용무로 보려는 거지?

-지존이 전장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함께 논의해 보자고 청했습니다.

-잘 처리했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무겁게 명했다.

-단영.

-네, 지존.

-가주 녀석에게 단단히 전해.

단영이 바짝 긴장하며 답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정광이 명을 내리고.

단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콩이 들어가는 요리는 전부 빼고 고기 위주로 준비하라고 해. 이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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