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77화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이녕임가 태상가주 임철환은 재차 요구했다.
“네 도를 보여다오.”
정광도 지지 않고 다시 물었다.
“훌륭한 분을 떠올리신 거죠?”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제가 드릴 말씀이네요. 제가 먼저 여쭸으니 대답을 해주셔야죠.”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를 몇 차례.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가다간 끝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듣던 대로 고집이 세구나.”
“야장답게 끈질기시네요.”
“내가 언제까지 너를 말로 대할 것 같으냐?”
“쇠를 두들기듯이 저를 두들겨 패시려고요?”
임철환은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거무튀튀한 망치를 어루만지며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봐도 똑같아.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군. 그러다가는 철화각(鐵花閣)이 모두 무너질 텐데 그런 효율적이지 못한 짓을 하는 건 곤란하지.”
“탁월한 선택이시네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려고 한다.”
“어떤 거죠?”
“네 도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이지.”
“그건 곤란한데.”
“무슨 뜻이냐? 내게 그것을 보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저 말고 태상가주님이 곤란해지실 거라고요.”
정광은 술을 한 잔 마시고 찬찬히 설명했다.
“이녕임가에서 만든 작품들보다 더 뛰어난 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왔던 태상가주님이 확인도 안 하고 돌아가셨다는 얘기가 돌면 어떻게 될까요?”
“소문을 퍼뜨리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구나.”
“무슨 그런 큰일 날 말씀을. 협박이 아니라 조언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정광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임철환에게 내밀었다.
“야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솔직히 궁금하시잖아요.”
“술은 끊은 지 오래다.”
“저런. 이 좋은 걸 왜.”
정광은 술을 꿀꺽 삼키고 문 쪽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안내해 드릴게요, 가시죠. 다른 방에서 조용히 얘기해요.”
“너는 객(客)이고 내가 주(主)다. 이곳에 대해 뭘 안다고 안내를 하겠다는 말이냐?”
“여느 취객이 아니라 광명좌사자님이 소란을 피웠는데 누가 아직도 남아 있겠어요. 아무 방이나 골라 들어가면 되지.”
임철환은 정광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증이 늘어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다른 재주도 많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정광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히 서 있는 전주들을 둘러봤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좋은 시간 되세요.”
“…….”
전주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좋은 시간은 개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목격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여기에 온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 판에 무슨 놈의 좋은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빌어먹을 내 팔자야.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대인이 우리의 구명줄이다. 무조건 따라야 해.’
풍전등화(風前燈火)라.
광명좌사자에게 찍혔으니 그들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였다.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려면 최근 들어 그 누구보다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진혼에게라도 기대야 했다.
독두가 술잔을 치켜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대인, 마음 편히 다녀오십시오. 그동안 소인들은 한껏 즐기고 있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시지는 말고요.”
“하하. 물론이지요. 내일도 큰 판을 벌여야 하지 않습니까?”
독두가 대머리를 빛내며 너스레를 떨고 다른 전주들도 억지로 호응하는 사이, 임가 무인들이 들어와 혼절한 기녀들을 수습했다.
정광과 임철환은 방에서 나와 다른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임철환이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냐?”
“무슨 말씀이죠?”
“고이륵단가 소가주가 은근히 네 칭찬을 하더구나. 전장 사업에 대해 논할 땐 더 없이 객관적이면서 네 얘기를 할 때만큼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썼어.”
“저랑 사이가 좋은 편이라 그러셨나 보네요.”
“그리고 네 도가 본가에서 만들어낸 병기들보다 뛰어난 신도(神刀)라는 소문이 갑자기 퍼졌다. 소문이라는 것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빨리 전해졌지.”
“그러게요. 신기하네.”
“그뿐만이 아니다.”
임철환의 이마에 패인 주름들이 더 깊어졌다.
“네가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녀석이라는 건 많이 들었으나 일개 기녀를 위해 광명좌사자와 맞섰다고? 정파 위선자 놈들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하물며 마인인 네가 그러는 건 말이 안 되지.”
“마(魔)에도 협이 있기 마련이죠.”
“객쩍은 소리 말고 그만 털어놔라. 무슨 용무로 나를 부르고 기다린 것이냐?”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제법 똘똘하더니 과연.
거기에 연륜까지 더해졌다.
껍데기에 치중하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모습이 꽤 날카로웠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 상관없지. 그보다 그 일을 아직도 마음속에 품고 있을까?’
그럴 리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사람 마음쯤이야 당연히 변해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웬만하면 좀 그래라.’
정광은 처음 던졌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까 저를 보고 무척 훌륭한 분을 떠올리신 거죠?”
화상으로 뒤덮인 임철환의 얼굴이 더 흉측하게 변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철화각을 다시 지어야겠어.”
“농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사안에 대한 답을 들어야 다음 말을 이을 수 있어서 그래요.”
임철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팔짱을 끼고 정광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나직이 내뱉었다.
“놀랍군.”
“뭐가요?”
“설마설마했거늘, 묵영권가의 후인이 아니라 전대 교주의 진전을 이었나 보구나. 하긴, 그래야 네 놀라운 무위가 설명되지.”
정광이 대꾸하려고 하는데 임철환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전대 교주를 내세워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그렇게 계속 물은 것이냐? 내가 그를 어떻게 여기는지 확인하고 말하려고?”
정광은 감탄했다.
“저를 닮았다는 분이 그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의 전인이라뇨? 비약이 심하네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여쭌 건데.”
“정말 비슷하군, 비슷해. 네 나이로 미루어보면 직접 사사하진 못하고 비급을 통해 익혔겠지. 묵영권가의 생존자에게서 얻었을 테고.”
“태상가주님,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죠?”
임철환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이런. 큰일이네.”
임철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담담한 표정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글로 남겨지지 않았을 비사를 말해주마.”
“오오. 호기심이 생기네요. 세이공청(洗耳恭聽) 할게요.”
임철환의 눈에 냉기가 어렸다가 깊게 가라앉았다.
“내 아버님께선 전대 교주로부터 천하제일검을 만들라는 명을 받고 수십 년이 넘게 매진하셨다. 그리고 결국 현철을 통으로 써서 벼려낸 신검을 진상하셨지.”
“대단하시네요. 가히 천하제일야장이라 할 만해요.”
“전대 교주도 기뻐했다. 칭찬에 극도로 인색한 그가 아버님께 역천마장(逆天魔匠)이라는 별호를 내리며 치하했다. 심지어 그 검에 마혼(魔魂)이란 이름을 붙인 뒤 자신의 일부를 불어넣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것이지.”
임철환은 그때를 회상하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결심했다. 아버님의 신검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전대 교주에게 진상하여 내 실력을 인정받겠다고 말이다.”
임철환이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선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포부를 토로했더니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정광은 뺨을 긁으며 딴청을 부리다가 술병을 잡았다.
“목 안 마르세요? 한 잔 따라드릴 테니 시원하게 들이켜시죠.”
“네 꼴을 보아하니 짐작하는 것 같구나. 그대로 읊어주마.”
임철환의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넌 안 돼. 꿈 깨.”
“저런.”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혹시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니에요?”
임철환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정확하다. 수십 년이 넘었는데도 매일같이 떠올라. 아무리 잊으려 해도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자, 이제 내가 물으마. 내가 전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갔느냐?”
“음. 애증의 대상?”
“웃기는 소리. 증(憎)만 있을 뿐 애(愛) 따윈 없다.”
정광은 탄식했다.
“아직도 과거에 얽매이시다니 안타깝네요.”
“더 안타까운 건 너다. 나는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야. 한때 모셨던 자의 후인이니 그 정도 예는 취해야겠지.”
임철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정광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안 돼요? 어떤 일이 있어도요?”
발걸음을 옮기던 임철환이 우뚝 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기 어린 음성을 흘렸다.
“물론이지. 그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절대로 안 돼.”
* * *
정광은 전주들과 함께 철화각에서 나왔다.
임철환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안 돼? 고집불통 녀석. 늙어서 조금이나마 유해졌나 했더니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전생에 ‘너는 재능이 다소 부족하니 힘들 것이다. 그러니 아까운 시간 허비하지 말고 마음 편히 사는 게 좋을 것 같구나’라고 친절히 충고했을 때가 떠올랐다.
얼이 나가 망연히 서 있다가 갑자기 두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모습이라니.
어이가 없어 죽도록 패려는데 녀석의 아비인 역천마장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해서 기절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내 진체를 드러내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또 그러겠지. 역천마장이 살아 있으면 바로 복종했을 텐데. 일이 귀찮게 됐어.’
섬랑과 나민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귀곡자가 계산했던 것처럼 고이륵단가와 오로나가는 물론이오, 이녕임가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또 다른 방안을 하나 더 생각해 두었지만 먹힐지 안 먹힐지 아리송한 상황.
‘결국 피를 흘려야 하나.’
땀을 흘릴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광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전주들이 간절히 말했다.
“대인, 오늘 일은 모두 잊었습니다.”
“소인들은 보기보다 입이 무겁습니다. 대인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광명좌사자 은호정이 부린 행패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전주님들을 믿으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독두가 반색했다.
“저, 정말입니까?”
“당연하죠. 입이 무거우신 건 이미 한 번 증명하셨잖아요.”
정광이 귀곡자의 본가인 박락하가(博樂賀家)에 가기 위해 함께 움직이고 있던 전주들과 헤어졌던 사례를 돌려 얘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시지는 말고요.”
환해졌던 전주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서, 설마 저희를…….”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아니라 광명좌사자님을 말하는 거예요.”
“아!”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숙소를 옮기세요.”
“향리객잔에서 함께 지내자는 말씀이군요! 확실히 훨씬 안전해질 겁니다.”
“아뇨. 그러면 너무 좁아져서 제가 불편하죠.”
“……아.”
“그리고 솔직히 향리객잔, 불편하시잖아요.”
“…….”
“객잔이 됐든 민가가 됐든 간에 향리객잔 주변에서 묵으세요. 소란이 일어나면 제가 달려가 구해 드릴게요.”
“……!”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전주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이게 어디야.’
‘대인은 허언을 안 해.’
‘돈이 많이 들더라도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군.’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이녕을 빠져나갔겠지만, 독두의 말마따나 날카로운 칼날을 딛고 서서 원한이 새겨진 주사위를 던지는 삶을 사는 전주들은 도망칠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안 했다.
“자. 이제 됐죠?”
됐다마다.
정광의 물음에 전주들이 힘차게 답했다.
“네! 대인!”
“그럼 내일 봬요.”
“만수무강…… 아니, 푹 주무십시오!”
“전주님들도요.”
정광은 홀로 향리객잔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안에 들어가 보니 민현유가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지 않고 뭐 해? 무슨 일 있어?”
민현유가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며 답했다.
“객잔 주변에 감시자들이 붙었습니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오면서 봤어. 별놈들 아니던데?”
“대인의 눈엔 그렇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 모자란 자들이 아닙니다. 임가에서 나온 것 같은데 혹시 사고라도 치셨습니까?”
“내가 아니라 광명좌사자가 쳤지.”
정광은 철화각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덧붙였다.
“이 얘기가 밖으로 퍼지면 여럿이 곤란해질 거야.”
“광명좌사자도 그렇겠지요.”
“만약 그렇게 되면 너는 더할걸? 시험해 보고 싶으면 하던가.”
“명쾌히 이해했습니다. 이 건만큼은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서.”
정광이 두 손을 매만지자 민현유가 공손히 부탁했다.
“대인, 제발 목숨만큼은…….”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무슨 말이야? 단전만 깨줄게.”
민현유는 묵묵히 정광을 보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양손을 소매 속에 넣었다.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난감을 꺼내서 놀자고? 네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을 텐데.”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민현유가 천천히 손을 뺐다.
두 손에는 서신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하나는 총단에서, 하나는 이녕임가에서 보내온 서찰입니다. 대인께 온 것이니 읽어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