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7화 (446/569)

2부 176화

깨달음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 첫 번째 날, 예정되어 있던 생사투가 모두 끝났다.

당연히 정광은 판돈을 쓸어 담았고 황금 마차의 수도 늘어나게 됐다.

오늘 할 일도 끝났겠다, 향리객잔으로 돌아가 민현유부터 손봐주려고 하는데.

독두를 비롯한 전주들이 다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청했다.

정광은 난데없는 제안에 의아해했다.

“네? 아까 술 한잔하자고 하셨던 게 오늘을 말씀하셨던 거예요?”

독두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소인들의 삶이 날카로운 칼날을 딛고 서서 원한이 새겨진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니 되도록 빨리 자리를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청하게 됐습니다.”

“그런 게 걱정되시면 많이 버셨으니 그만 손 터시죠.”

독두는 대머리를 붉히며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하하. 타고난 성정이 그런지라 그만두는 건 좀…….”

“하긴. 그게 천직으로 보이시긴 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누가 봐도 그럴 건데요, 뭐.”

독두가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대인. 소인들이 비록 노름으로 먹고사는 처지이긴 하나 나름대로 신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표시해야지요. 소인들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전주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이 나온 김에 가시지요.”

“아주 좋은 곳을 알아놨습니다. 대인께서도 만족하실 거라 자신합니다.”

정광은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전주들이 간절히 청해서가 아니었다.

이녕임가 무인들은 물론이오, 가주의 시선까지 느껴져서였다.

‘따가울 정도로 노려보네. 이거 잘하면 따라오겠어.’

곧장 향리객잔으로 가 박혀 있는 것보다 밖에 있어야 저들이 접근하기 쉬울 터.

찾아오는 놈이 있으면 가볍게 도발해 주면 된다.

그러면 또 태상가주 놈의 귀에 얘기가 들어갈 거고 놈과 더 빨리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요, 그럼.”

“감사합니다!”

독두와 전주들이 기뻐했다.

정광은 옆에 있던 민현유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현유는 참 운이 좋아.”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분들과 함께 먼저 가서 푹 쉬고 있어.”

“네, 대인.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정광은 전주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들의 수하들이 사방을 철통처럼 경계하며 따랐는데 그 위세가 제법 대단했다.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가 독두에게 물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독두의 대머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흐흐. 이녕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네.”

“그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곳, 이녕에서 제일가는 주루(酒樓), 철화각(鐵花閣)입니다.”

독두의 호언장담대로 철화각은 아름다웠다.

외벽에 차가운 철판을 덧대고 역시 철로 만든 꽃들을 붙여놓았는데, 꽃 하나하나의 모양이 각각 다르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철을 훌륭하게 다루는 야장들의 솜씨가 닿은 게 분명했다.

‘전생에도 소문만 듣고 안 와봤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정광은 외관을 잠시 감상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정반대였다.

정갈한 목재로 마감하고 우아한 장식품들을 곳곳에 놓아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안팎을 정반대로 한다. 재밌는 곳이네.’

정광은 삼 층으로 올라가 큰 방에 들어갔다.

독두가 상석을 가리키며 권했다.

“대인, 이쪽입니다. 편히 앉으시지요.”

정광은 사양하지 않았다.

상석을 차지하고 전주들에게 손짓했다.

“왜 다들 서 계세요? 어색하잖아요.”

전주들은 그제야 앉았다.

독두가 정광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오늘은 일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니 눈과 귀가 많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녀들을 부를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독두의 대머리가 다시 벌게지고 목소리에는 위엄이 실렸다.

“밖에 계신가? 어서 들이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점소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요리와 술을 나르고 기녀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자연스레 앉았다.

점소이들이 모두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정광은 옆에 앉은 아름다운 기녀에게 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름이 뭐예요?”

“상화라고 합니다, 대인.”

“저는 진혼이에요. 잘 부탁해요.”

“……!”

상화는 입을 살짝 벌리고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광이신 것치고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으세요?”

“피, 피부가 원래 하얀 편이라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럼 다행이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상화의 눈에는 생에 대한 절박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어제는 그 노물이었는데 오늘은 이 괴물이라니. 요즘 내 팔자가 참 기구하구나.’

진혼이라는 자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상화로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녀의 생각을 독두가 알 리 있나.

음충맞은 눈으로 정광과 상화를 번갈아 보다가 청했다.

“대인. 좋은 날인데 한 말씀 하시지요.”

“그럴까요?”

정광은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모두 맛있게 드세요!”

전주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

“네, 대인! 맛있게 드십시오!”

“저희도 잘 먹겠습니다!”

정광과 전주들은 요리와 술을 즐기고 기녀들은 시중을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의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신강의 요리가 아무리 뛰어나 봐야 중원의 것만 할까.

더구나 정광은 황궁 밥을, 그것도 황태손의 것을 나눠 먹던 미식가였다.

‘대충 먹고 얘한테 주자.’

정광은 상화에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

“요리를 덜어주시는 건 고마운데. 콩은 빼주세요.”

“네?”

“소저도 드시고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배는 채우며 일해야죠.”

“아, 알겠습니다. 대인.”

상화는 정신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이 애처럼 편식하는 것만 해도 놀랍거늘, 소저라 칭하며 시중만 들지 말고 먹으라니?

빈말이 아니었다.

정광은 상화가 요리를 덜어줄 때마다 그녀의 몫도 덜게 했다.

“드세요. 전엔 몰랐는데 같이 먹어야 맛있더라고요.”

“……네, 대인.”

“근무 중이시니까 술은 마시지 마시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상화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긴장의 끈을 늦추지는 않았다.

신강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도덕군자가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더 조심해야 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정광은 여전했다.

정광이 이렇게 행동하니 전주들도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독두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기녀에게 요리를 권했다.

“이, 이거 한번 먹어보거…… 아니지. 드, 드시게.”

잘린 손목에 갈고리를 낀 노인이 갈고리로 고기를 찍어서 기녀에게 내밀었다.

“허허. 대, 대인이 하신 말씀 못 들었는가?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배는 채워야지.”

자고로 사람이란 어울리는 짓을 해야 하는 법.

흉악한 마인들이 아무리 친절을 베풀면 뭐 하나? 받는 입장에선 협박과 위협으로밖에 안 느껴지는데.

기녀들은 온몸을 가늘게 떨면서도 음식을 억지로 삼켰다.

이런 어색하다 못해 괴이한 시간이 계속됐다.

전주들은 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다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빨리 끝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어허! 상화를 들이라 하지 않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다른 방에 있는지라…….”

“시끄럽다! 명했으면 따라!”

“더 좋은 아이를 데려올 테니 제발 한 번만 사정을…… 어억!”

정광은 술을 마시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행패를 부리는 자의 목소리가 익숙해서였다.

‘모자란 놈.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버릇은 여전한가 보네.’

전생엔 날을 잡고 패니 정신을 차렸는데 지금은 패주는 이가 없어서 저러는 것이리라.

‘좋아. 현생에도 날을 한번 잡아보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령강시(魔靈僵屍)들의 기운도 느껴질뿐더러 보는 사람도 너무 많았다.

‘하여간 오라는 임가 애들은 안 오고 술 취한 개가…… 응?’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만. 여기 주인은 임가잖아. 게다가 임가 장원과 거리도 가깝고.’

소란이 벌어지면 그 소란을 일으킨 개를 막을 만한 자가 달려올 터.

임가에 그럴 수 있는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개를 좀 긁어볼까.’

마침 그 개가 방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여기 있는 게냐?”

“……!”

이런 무례한 짓이 있나!

전주들이 분노해서 병기를 빼 들려다가 얼어붙었다.

“헉!”

“과, 광명좌사자?”

“여, 여기는 왜?”

술 취한 개는 광명좌사자 은호정이었다.

그는 불콰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다가 상화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흐흐.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느냐? 보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느니라.”

상화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좌, 좌사자님. 어제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자그마치 하루나 지나지 않았느냐? 너를 보러 왔으니 나오너라.”

상화는 떨리는 눈으로 은호정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어. 가야 해.’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소저. 가만히 있으세요.

‘……!’

-개는 제가 치울게요.

‘……!’

상화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봤다.

진혼이 일어나 은호정에게 포권을 하고 있었다.

“광명좌사자님, 안녕하세요?”

은호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넌 또 뭐냐?”

“진혼인데요.”

“진혼? 아! 그 망종?”

“그렇게까진 아닌데.”

“……?”

“지금 좌사자님께서 하시는 행동이 그쪽에 더 가깝잖아요. 제 말이 틀렸나요?”

“…….”

은호정의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내공을 일으켜 취기를 몰아낸 것이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소문이 오히려 부족하구나.”

“나름 착하게 살고 있는데요.”

“꼬박꼬박 말대꾸하기는. 네가 묵영권가의 후인이라고 못 죽일 것 같으냐?”

“당연하죠. 교주님의 위엄을 깎는 짓이라 불쾌해하실 거예요. 일을 벌이실 땐 통쾌하시겠지만 수습하는 게 문제죠. 교주님께 뭐라고 말씀드리려고요?”

은호정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죄를 지어서 죽였다고 보고드릴 것이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까 낮에도 마음에 안 드는 분들을 교주님께 불충한 무리로 몰아서 죽이시더니 과연.”

“무어라?”

“지금 저도 그렇게 몰아가시려는 거잖아요. 낮에도 그랬는데 밤에도 그러신다? 사람들이 믿을까요?”

“…….”

“더구나 기녀 때문에 이러시는 걸 보고 들은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말이에요. 설마 전부 살인멸구 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질 텐데.”

은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광의 말에 틀린 점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야 있나.

경고라도 해야 했다.

은호정은 기녀들과 전주들을 차갑게 쓸어보다가 살기를 발산했다.

무공을 모르는 기녀들은 바로 혼절했다.

전주들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병기를 빼 들었다.

은호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흐음. 이놈들은 어떡할까?”

이쯤 되면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게 정상이거늘.

정광은 달랐다.

은호정의 질문에 답을 줬다.

“그냥 두시죠.”

“…….”

“상화 소저도 기절했는데 흥이 안 깨지셨어요? 그만 돌아가셔서 푹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네놈만큼은 죽여야 할 것 같구나.”

“저 신법 빠른데.”

“그래 봤자지.”

“이런. 마음을 굳히셨나 보네요.”

정광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후우우. 그럼 나가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

“무슨 말이냐?”

“밖에서 해보자고요. 으슥한 곳에 가서 손을 쓰시면 굳이 살인멸구 같은 것 때문에 고민하실 필요 없잖아요.”

정광은 은호정의 등 뒤에 있는 마령강시(魔靈僵屍)들을 가리켰다.

“그렇게 하면 저분들과 합공을 하실 수도 있고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시죠?”

“……!”

뭐 이런 건방진 놈이!

감히 누구에게 이따위 망발을!

은호정은 두 눈을 이글거리며 살기를 일으켰다.

그 살기가 응축되어 정광에게 쏘아지려는 순간.

창문이 박살 나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화상으로 뒤덮인 얼굴에 땅딸막한 체구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만하시오.”

은호정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내가 교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쇠나 두들기더니 이곳엔 어인 일이오?”

“일이 있어 오다가 광명좌사자께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소.”

“소란이라니. 버릇없는 놈을 훈육하는 중이외다.”

“내 얼굴을 봐서 여기서 그쳐주시오.”

은호정이 반발했다.

“태상가주. 여기서 멈추면 내 체면이 뭐가 되오?”

이녕임가 태상가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솔직히 말합시다. 기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소? 그만하는 게 오히려 체면을 살리는 길이오.”

“……끄응.”

“이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조치할 테니 그만 끝냅시다.”

“…….”

은호정은 아무 말 없이 정광을 노려봤다.

태상가주도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진혼이지?”

“그런데요.”

“지금껏 약조한 건 모두 지켰다고 들었다.”

“그렇긴 하죠.”

“너와 네 일행의 입은 네가 봉해라. 기녀들의 입은 내가 책임지마.”

“설마 다 죽이시려고요?”

“이녕에서 이런 주루를 누가 운영하겠느냐? 기녀들도 본가의 사람이니 입단속을 하겠다는 말이다.”

정광은 흔쾌히 승낙했다.

기다리던 녀석이 왔는데 모자란 개새끼와 더 다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요, 그럼. 태상가주님도 약조를 지키셔야 해요.”

“나 역시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은 적은 없다.”

정광은 전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아닌데.”

“무슨 말이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넘어가죠.”

태상가주는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은호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광명좌사자, 이제 되었소이까?”

“태상가주의 말은 믿어도 저놈의 말은 못 믿겠소.”

“진혼이 약조를 어기면 나도 응징하겠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광명좌사자도 성의를 보여주시오.”

은호정은 못마땅한 얼굴로 태상가주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태상가주는 그와 같은 배분이었고 마도칠대가문의 한 축인 이녕임가의 큰 어른이었기에 이쯤에서 합의하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물론 정광을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흥이 깨졌으니 그만 가마.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무척 재미난 일이 일어날 테니 알아서 해라.”

정광이 반색했다.

“얼마나 재밌는 일인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사방에 떠벌리고 싶어지잖아요.”

은호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오늘만 날인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혼내줄 수 있는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칠살, 이십삼살. 가자.”

그는 마령강시들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광은 그들이 떠난 방향을 주시하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광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던 태상가주가 물었다.

“왜 놀라느냐?”

“광명좌사자님이 정말 무서운 분이라는 걸 깨달아서요.”

태상가주도 인정했다.

“그가 강한 건 사실이지.”

“아뇨. 그게 아니라 기녀를 만나러 왔으면서 강시들을 데려왔잖아요. 남들이 보는 가운데 거사를 치르는 취향이라니. 얼마나 무서워요?”

“…….”

“사람이 아니라 강시들을 데려오신 걸 보면 그래도 부끄러움은 있으신 건가? 의외인데.”

“…….”

태상가주는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은근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무척 훌륭한 사람이겠네요.”

태상가주가 말을 돌렸다.

“이제 내 용무를 말하마. 네 도를 보여다오.”

정광도 요구했다.

“제 말에 대답부터 하시죠. 무척 훌륭한 분을 떠올리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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