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3화 (442/569)

2부 172화

역시 내 장자방(張子房)

정광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단잠을 자서 그런지 얼굴에 가득했던 눈그늘은 말끔히 사라지고 몸 역시 가뿐해진 상태.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단전에 쌓여 있는 내공을 운기했다.

기경팔맥(奇經八脈), 십이경맥(十二經脈), 십이경별(十二經別)은 물론 전신의 세맥까지.

천천히 움직이며 내부를 관조하다가 속도를 올렸다.

소주천(小周天)을 거쳐 대주천(大周天)에 이르렀다. 그마저 끝내고 나니 온전한 몸 상태를 되찾게 됐다.

정광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잠시 있다가 이맛살을 좁히며 손가락을 들어 뺨을 긁었다.

‘이거야 원. 습관이란 건 정말 무섭다니까.’

잠들기 전에 세웠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귀곡자를 치료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삼단전(三丹田)을 만지작거려 보려고 했거늘, 평소 습관대로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기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슷하단 말이야.’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고 천하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는 셋.

이중 인(人)이 지닌 단전 또한 세 개다.

뿐이랴.

불교에서는 삼존(三尊)을 모시고 도교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삼청합일신공의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이오, 이는 곧 원시천존(元始天尊),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상노군(太上老君)이다.

이렇게 온통 셋투성이.

삼단전을 하나로 이으나 삼청을 하나로 합치나 셋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건 같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귀곡자의 상세를 호전시켰지만 제대로 된 방법으로 그런 게 아니라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편법을 쓴 것이었다.

이런 판국에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내 몸에 무턱대고 쓸 수야 있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계속 궁리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래도 얻은 것이 적지 않기에 뿌듯했다.

불존이 소림에서 던졌던 화두를 잡고 논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

자연히 표정이 밝아질 수밖에.

빙그레 웃으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마침 사냥해 온 사슴을 내려놓고 있던 자오가 반색했다.

“단주, 일어나셨습니까?”

“네. 웬일로 사냥을 하셨어요?”

“몸이 허해서 늦잠을 주무시는 것 같아 고이륵단가 소가주에게 부탁해 여럿이서 다녀왔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단가 무인들이 사냥해 온 사슴과 멧돼지를 해체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하하. 관 숙수가 모처럼 솜씨를 발휘할 거라 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자오는 예를 표하고 관엽을 도우러 갔다.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귀곡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주위가 소란스러운데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정광은 그의 옆에 털썩 앉아 나무랐다.

“추운데 뭐 해? 천막에 들어가서 하지 않고.”

귀곡자가 눈을 뜨고 빙그레 웃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지존. 정신이 온전할 땐 자연을 느끼고 싶어서 그럽니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키웠다.

“더 느끼다간 감기 걸리겠다. 몸 상태는 어때?”

“회춘한 것 같습니다.”

“이젠 아첨도 할 줄 아네. 아무리 덧칠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무슨.”

“허허.”

귀곡자는 작게 웃다가 설명했다.

“한결 좋아진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마음도 젊어졌지요.”

“무슨 말이야?”

“극랍염가에 갇혀 계속 고문당하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지존께서 돌아와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육신과 정신을 치료해 주시며 임무까지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아. 더 구르고 싶어서 마음이 들뜬다고?”

정광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귀곡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렇게까진 아닙니다만 의욕이 솟습니다. 이런 열정을 다시 가지게 될 줄이야. 회춘한 것과 다를 게 없지요.”

“뭐 나쁘진 않네. 애들 품평은 끝났고?”

“품평이라니요?”

“쉽게 가자. 네가 내가 시킨다고 무턱대고 할 녀석이냐? 뭐 좀 가르쳐도 될 만한 녀석들인지 판단을 했을 거 아냐.”

“지존의 안목을 의심한 게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귀곡자는 정중하게 사과한 뒤 땅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섬랑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드는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좋은 인재입니다. 한 이십 년만 돌봐주면 나머지는 시간문제일 뿐,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네게 남겨진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귀곡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거라 예상했습니다. 허나 제가 없어도 다른 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걔는 지금 천막에서 홀로 뭐 하는 거야? 화두라도 몇 개 던져줬어?”

귀곡자는 나민의 천막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리 좀 아플 겁니다. 그래도 그럴듯한 답을 가져올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너만큼 똘똘한 애는 아니야.”

“경험이 부족하고 마음이 조급한 게 흠이지만 경험이야 쌓게 하면 되고 조급함은 거둬내면 되지요. 시야도 넓혀주고 말입니다.”

“예상 기간은?”

“지존,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정광은 보수적으로 낮춰 말했고 귀곡자는 만족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군요. 제가 죽기 전에 기초 정도는 쌓을 수 있겠습니다. 그 후엔 스스로 발전하며 섬랑을 보필할 겁니다.”

“점수가 후하네.”

“지존께서 안배하신 대로 고이륵단가가 두 아이를 지지할 거고 오로나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그렇게 매겼습니다.”

“다른 가문 애들은?”

“지존께서 환생하신 것을 널리 알리면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럴 생각 없으니 계산한 걸 말해.”

“일단 이녕임가(伊寧任家)는 넣었습니다.”

정광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놈이 살아 있으면 당연한 일이지만 죽었잖아.”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귀곡자의 눈이 빛나고 목소리엔 힘이 들어갔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꼭 넣어야 해서 넣었으니 그들을 거둬주십시오.”

정광이 귀곡자를 노려보다가 입을 여는데.

멀리서 자오가 외쳤다.

“점심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기가 식기 전에 오셔서 드십시오!”

정광은 귀곡자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섬랑도 코를 벌름거리더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런 섬랑에게 정광이 외쳤다.

“나 소저 데리고 와!”

“네? 제가요?”

“응. 그럼 내가 가랴?”

“그것도 괜찮은 생각…… 이크. 다, 당연히 제가 해야죠!”

정광이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리자 섬랑은 나민의 천막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나 소저. 나와서 식사하세요.”

“…….”

“소저! 자요? 밥 드시라고요!”

“…….”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섬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묵묵부답이라니!

마음이 상해 소리를 더 크게 지르려고 하는데…….

천막 안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가라. 머리가 복잡해서 안 먹을 거다.”

섬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소저 생각이고요.”

“……뭐?”

“대인이 나와서 드시래요. 그럼 그러셔야죠.”

“…….”

나민은 치켜세웠던 눈썹을 가라앉혔다.

섬랑의 말뜻을 알아채서였다.

‘그가 시킨 일엔 다 이유가 있어.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고.’

싫어도 가봐야 한다는 얘기.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갔다.

섬랑이 나민의 표정을 보고 앗 뜨거라 하며 재빨리 도망가다가 변명했다.

“배, 배가 너무 고파서요. 먼저 갈게요.”

“…….”

나민은 작게 한숨 쉬고 섬랑의 뒤를 따라갔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 도착해 보니 섬랑은 벌써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나민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직이 쏘아붙였다.

“네 한 끼는 타인의 한 끼와 다르구나.”

섬랑이 즉시 받아쳤다.

“저처럼 수련해 봐요. 이렇게 안 먹고 배기나.”

정광도 동의했다.

“머리를 혹사하는 것도 몸을 굴리는 것만큼 힘든 일이니까 소저도 많이 드세요.”

“……아.”

나민은 정광이 부른 이유를 깨닫고 수긍했다.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마음이 급해 저버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진혼.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귀곡자에게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현로. 마음을 또 조급히 먹었습니다.”

귀곡자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 훈계했다.

“실수를 연거푸 하는 건 큰 문제지만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건 칭찬받아 마땅하지. 상쇄한 셈 치고 앞으로 노력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고기를 먹었다.

주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귀곡자를 힐끔거렸다.

‘치병에 걸려 있던 노인이 갑자기 현인처럼 변해?’

‘지존께서 치료하신 건가?’

‘나민은 왜 저렇게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거야? 마치 제자처럼 행동하잖아.’

‘단주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는 눈치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모였다.

정광은 가볍지만 효과적으로 정리했다.

“현로는 현로예요. 끝.”

“…….”

정광이 그렇다는데 별수 있나.

사람들은 호기심을 접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목적지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정광은 나민에게 권했다.

“아까운 시간 허비하지 마시고 재물이 덜 실린 마차에 들어가 궁리하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혼.”

다음은 민현유였다.

“나 소저는 바쁜 일이 생겼으니까 현유가 일정을 관리해 줘.”

“네, 대인.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다음은 섬랑.

“많이 지친 것 같은데 너도 마차를 타고 가.”

“대인, 저야말로 시간 없어요. 신법을 펼치다가 힘들면 말에 타고 그럴게요.”

“뭐 그것도 좋지.”

마지막은 귀곡자였다.

-네가 마차를 몰아. 잘할 수 있지?

귀곡자는 반드시 잘해내야 했다.

다행히 실제로도 잘했다.

말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마차를 매끄럽게 몰았다.

정광은 옆에 느긋이 앉아 있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정신이 아닐 때도 이렇게 하면 좀 좋아.”

“죄송합니다.”

“알면 됐고. 오랜만에 이러니까 옛 생각이 나네.”

“마찬가지입니다. 속하가 가끔 모셨었지요.”

두 사람은 과거를 회상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정광이었다.

“옛일은 옛일이고.”

“네, 지존.”

“아까 이녕임가를 꼭 거둬야 한다고 했지?”

“속하의 계산으론 그렇습니다.”

“네 머리가 여전해서 다행이야.”

“지존께서도 그렇게 정하셨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일단 가서 보자고. 여의치 않으면 바로 쳐내고 땀을 더 흘려야 해.”

“그들에겐 무척 안 된 일이지만 그래야겠지요.”

정광이 씩 웃으며 칭찬했다.

“너는 역시 내 장자방(張子房)이야. 일이 그렇게 됐을 때의 대응책은?”

귀곡자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속하의 생각으론…….”

그리고 곧 흐리멍덩해졌다.

“어라? 여,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 어억!”

말고삐를 잘못 잡아당겨 말들이 난리를 쳤다.

정광은 바닥에 장력을 쏘아 쓰러지는 마차를 일으켜 세우고 귀곡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널 믿은 내가 미친놈이지. 차라리 자라.”

“컥!”

귀곡자는 기절하고 정광 일행은 계속 말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큰 도시가 보였다.

멸혼생사투 사차 예선이자 마지막 예선이 열리는 이녕이었다.

‘흐음.’

정광은 안력을 돋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하네.’

여러 무인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저마다 한두 군데씩은 입은 화상이 눈에 띄었다.

철을 잘 다루는 이녕임가 무인들이니 그럴 수밖에.

그들이 패용한 검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운룡을 봤다.

‘아까 귀곡자에게도 말했지만 그놈이 살아 있으면 편할 텐데.’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원 최고의 야장(冶匠)들이 모인 철혈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운룡.

이 신검보다 먼저 현철을 통으로 써서 벼려낸 마혼(魔魂)을 진상했던 역천마장(逆天魔匠)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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