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2화 (441/569)

2부 171화

내 하루와 타인의 하루

귀곡자는 치병으로 인해 흐린 정신으로 보내는 시간을 꿈도 못 꿀 만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 간주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어서였다.

지금도 그랬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현재 상황부터 살폈다.

‘누워 있고. 낮이군.’

창문으로 들이비치는 햇살이 눈부셨다.

‘마차 안에 있어.’

바퀴가 세차게 구르며 덜컹덜컹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 있었다.

귀곡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밝은 빛을 뿌렸다.

분명 성공할 확률이 몇 할이 아니라 푼이나 리 단위일 수도 있다고 들었건만,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역시 지존!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이 귀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벽에 기대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정광이 핀잔을 줬다.

“그만 좀 울어라. 무섭다니까.”

“죄, 죄송합니다.”

귀곡자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일어나려 하자 정광이 제지했다.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그냥 누워있어.”

“알겠습니다, 지존.”

귀곡자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고개를 돌려 정광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정광의 얼굴에 눈그늘이 내려앉아 있는 것 아닌가?

“아!”

“왜?”

“무척 피곤해 보이십니다.”

“조금 그렇긴 해.”

“소인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정광이 이를 갈았다.

“삼단전(三丹田)을 하나로 잇고 자연지기를 끌어 넣어주는 게 쉬울 것 같냐? 내 몸으로도 안 해봤는데?”

귀곡자는 재빨리 몸을 뒤집어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덕분에 안전하게 실험을 해볼 수 있게 됐으니 너무 주눅 들진 말고.”

“그럼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당당한데. 일단 말해봐.”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그냥 누워있으라고 하셨는데 목적지가 멀었다는 말씀입니까, 완치가 멀었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후자 쪽이지.”

정광은 머리를 벅벅 긁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시작은 나쁘지 않아. 치료를 시작했는데도 살아 있잖아. 앞으론 더 나아질 거야.”

귀곡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르랴?

지존의 말처럼 계속 치료를 이어가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지존께서 잘 가라고 하셨을 때 미처 대답도 못 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해 버려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입니다.”

“아직 안심하지는 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해보니까 감이 잡힐락 말락 해서 말이야. 오늘은 더 제대로 해볼까 하거든.”

“……네?”

정광은 귀곡자에게 바짝 다가가 백회혈과 단전에 손을 댔다.

“혹시 모르니 다시 말할게.”

“아, 아니…….”

“그동안 수고했어. 잘 가.”

“끄아아악!”

정광은 최선을 다했다.

귀곡자도 최선을 다해 버텼다.

주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운명과 맞서 싸우는 시간이 이어졌다.

“오. 제정신으로 돌아왔구나. 근데 또 우냐?”

“지, 지존!”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그냥 누워있어.”

“이, 이번에도 말입니까?”

“녀석, 긴장하기는.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무엇입니까?”

정광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주기가 짧아졌다는 거.”

“……!”

“아마 유지 시간도 길어졌을걸.”

“저, 정말입니까?”

“아마라고 했지만 거의 확실해.”

귀곡자는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못 했고 정광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확인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이녕(伊寧)에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치료해야 하니까.”

정광은 귀곡자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수고했다느니 잘 가라느니 이런 건 이제 생략하자.”

“아, 안…… 크어억!”

귀곡자의 상세는 갈수록 좋아졌다.

정광도 그만큼 요령이 생겨 예전만큼 힘겨워하지는 않았다.

“일어났냐?”

“으음. 여긴 또 어디오?”

“이놈 봐라?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서 아닌 척하네.”

“지, 지존! 그게 아니라…….”

“이번엔 더 제대로 빨리빨리 하자. 하압!”

“끄으으으악!”

이게 치료하는 게 맞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귀곡자는 참다 참다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존. 왜 제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만 치료해 주시는 겁니까?”

“어? 지금 흐릿한 상태야?”

“아닙니다.”

“근데 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해. 멍청할 때의 네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잖아. 아예 미쳐 버릴걸?”

“……아.”

귀곡자는 결국 승복하고 모든 걸 포기했다.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새까만 하늘에서 수많은 별빛이 부서져 내리는 밤.

또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에게 정광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잘 참았다. 원래대로 돌아오는 주기가 많이 짧아졌어.”

귀곡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섭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서 시작하시지요.”

“장난하냐? 나도 좀 쉬어야지.”

정광은 모닥불 옆에 벌렁 드러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술을 마시려면 마시고 생각을 하려면 해.”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단, 잠들지는 마. 유지 시간이 얼마나 늘어났나 봐야 하니까.”

“…….”

귀곡자는 멍한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모닥불이 일렁이며 정광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을 지웠다.

허나 더 짙어진 눈그늘은 없앨 수 없었다.

그걸 보니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바로 술을 꿀꺽꿀꺽 삼켜서 내리눌렀다.

두 개의 뜨거운 열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가 배 속에 고였다.

우습게도 배 속보다 가슴이 더 따뜻했다.

“……지존.”

“응?”

“……감사합니다.”

“아직 멀었어.”

정광은 찬찬히 설명했다.

“확실히 좋아지긴 했고 계속 좋아지고 있지만 완치까진 장담할 수 없어.”

“이미 충분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네가 섬랑과 나민을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니까. 되도록 오래 살면서 말이야. 그새 까먹었냐?”

그럴 리가 있나.

귀곡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존의 명을 받듭니다.”

이날 밤.

귀곡자는 세 시진 동안 하늘을 보면서 술을 즐길 수 있었다.

* * *

‘으음.’

언제나 그랬듯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귀곡자는 현재 상황부터 살폈다.

‘앉아 있고 아침이군.’

해가 밝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식사 중이야.’

고소한 맛이 나는 죽이 입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또 얼굴에 잔뜩 묻히면서 드시네. 현로, 닦아드릴 테니 가만히 있으세요.”

‘…….’

그래, 입가에 질척질척한 죽이 묻어 있지.

벽안(碧眼)의 어린아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더니 깨끗한 천으로 입가를 꼼꼼히 닦아줬다.

귀곡자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아이가 지존께서 말씀하셨던 섬랑인가.’

지존의 사후에도 충성을 다했던 묵영권가(黙影權家)의 유일한 생존자.

독종에 승부사라더니 과연.

똘똘하게 생긴 데다 심성도 괜찮아 보였다.

녀석은 안 닦은 곳이 없는지 귀곡자의 입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됐네요. 다시 드세요.”

“…….”

귀곡자는 상대를 직접 파악하기 위해 정신이 돌아온 걸 숨기기로 했다.

눈의 초점이 안 맞게 해서 흐리멍덩하게 보이게 했다.

“응.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죽을 다시 떠먹다가 그릇을 완전히 비우니, 이번엔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로, 다 드셨으면 물을 드릴까요?”

귀곡자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부가 가무잡잡한 미인이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나민이겠군.’

오로나가(烏魯羅家)의 피를 이으며 그 놀라운 능력까지 계승한 인재라 했다.

말투도 차분했고 처세술도 훌륭해 보였다.

“응. 고마워.”

“별것 아닙니다.”

귀곡자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가죽 주머니를 돌려줬다.

그리고 두 사람을 관찰했다.

장단점과 수준을 명확히 파악해야 제대로 가르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섬랑과 나민의 표정이 거의 동시에 굳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섬랑이었다.

“가만. 눈빛이 바뀌셨네? 어떻게 된 거지?”

귀곡자는 태연히 물었다.

“내가?”

“현로밖에 더 있어요?”

“어떻길래?”

“원래는 흐리멍덩했는데 밝게 빛나면서도 깊게 가라앉은 느낌? 뭐야 이거, 혹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신 거예요?”

나민도 동의했다.

“현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습니다. 후학들을 놀리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대해주십시오.”

“아닌데.”

“안 그래도 전보다 피부에 윤기가 돌고 눈의 진물도 적어져서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귀곡자는 살짝 놀랐다.

“내가?”

“네. 마치 살짝 회춘하신 것 같습니다.”

“아…….”

귀곡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존이 불어넣어 준 자연지기가 치병을 치료하며 육신에도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더 버텨봐야 소용없겠구나.’

귀곡자는 깨끗이 포기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옅게 웃었다.

“허허. 솔직히 말해보거라. 그 능력으로 본 것이냐?”

“아닙니다.”

“눈썰미가 좋구나.”

옆에 있던 섬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투도 바뀌셨네? 진짜 제정신으로 돌아오신 거 맞죠?”

귀곡자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렇다.”

“흐음.”

섬랑은 이마를 찡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이 더 나은데.”

“무어라?”

“귀찮게 굴지만 나름 귀여운 면이 있던 분이 무게 잡는 노인네가 되어버렸잖아요.”

“…….”

지존께 이미 듣기 했지만 말버릇하고는.

어이가 없어 물끄러미 보는데 섬랑이 벌떡 일어섰다.

“그만 갈게요.”

“어딜 가려고?”

“식사 시중이 끝났으니 수련해야죠.”

“멸혼생사투를 위해?”

“네.”

“조금 쉬었다가 하지 않고?”

섬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저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한데.”

“네 말은 앞뒤가 안 맞는구나. 그런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조금 더 수련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섬랑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저는 자질이 뛰어나니까 괜찮아요. 제 하루는 타인의 하루와 완전히 다르거든요.”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군.”

“안목이 있으시네요. 그럼 이만.”

섬랑은 관엽과 자오가 있는 곳으로 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두들겨 맞았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랄 만큼 단명하거나 놀랄 만큼 장수할 녀석이군.”

조용히 앉아 있던 나민이 물었다.

“오만한 성품 때문에 일찍 죽던지 저 실행력 덕분에 강해져서 오래 살 거란 말씀입니까?”

“잘 아는구나.”

“저는 어떻게 보십니까?”

“내겐 너와 같은 능력이 없다. 진체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여러 사항을 조합해 추측할 뿐이야.”

“그 추측이 듣고 싶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립니다.”

귀곡자는 가늘어진 눈으로 나민을 응시했다.

“마음이 너무 급하구나. 내가 널 가르칠 만하다고 판단했는지 빨리 알고 싶어 그러느냐?”

“……!”

귀곡자는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나민에게 똑똑히 말했다.

“조급함으로 현명함을 가려 버리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불안해하지도 말고. 진혼이 내게 청했으니 무조건 너를 가르칠 것이다. 아까 정신이 흐린 척한 것은 너를 품평해 거두거나 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신감을 잃지는 말고.”

“네?”

“너는 이미 내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나민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귀곡자가 잔잔하게 웃었다.

“넘겨짚은 건데 진짜였군. 똑똑한데 경험이 부족해.”

“아!”

“일단 저 녀석은 땀 좀 빼라 하고.”

귀곡자는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섬랑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말을 이었다.

“네가 저 아이에게 배울 게 하나 있긴 하구나. 앞으로는 네 하루도 타인의 하루와 달라져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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