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1화 (440/569)

2부 170화

혹시 모르니 지금 말할게

박락하가(博樂賀家)의 비밀서고는 여느 가문과 달리 본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은 폐허를 지나 꽁꽁 얼어붙은 냇물을 건넜다. 말라죽은 잡초들로 뒤덮인 평야를 가로질러 한동안 더 나아가니 작은 돌산이 나타났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어둑어둑한 저녁, 정광은 마차를 멈추고 귀곡자를 어깨에 짊어졌다.

귀곡자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버둥거렸으나 정광의 힘을 이길 리 있나.

금세 체념하고 축 늘어졌다.

정광은 의아해하는 일행을 둘러보며 담담히 명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묵죠. 식사하시고 쉬고 계세요.”

자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단주께서는요? 안 드실 겁니까?”

“급한 일이 있어서요.”

자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밥도 안 먹고 떠나려 하다니.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그럴까?

“알겠습니다, 단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른 이들도 심각한 사안임을 깨닫고 호기심을 억누르며 정광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정광은 씩 웃어 보인 뒤 신법을 펼쳤다.

돌산을 올라가 정상에 서서 가파른 낭떠러지를 굽어봤다.

안력을 돋워 살피니 전생에 귀곡자가 말했던 것들이 보였다.

“둥근 바위와 삐죽한 바위 사이에 만들었다고 그랬지?”

정광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귀곡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말이오?”

“네 가문의 비밀서고.”

“나, 나도 가문이 있소?”

“당연하지. 설마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냐.”

“어떤 곳이오?”

“네가 직접 보고 맞춰.”

정광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덧붙였다.

“아니지, 직접 보고 제정신을 차려봐.”

“히이익!”

날카로운 바위들이 급격히 확대됐다.

귀곡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가 질끈 감으며 원망을 토했다.

“야 이 나쁜 놈아! 이렇게 죽긴 싫어!”

“하아아.”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제 놈을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뭐가 어째?

귀곡자가 완치되면 정말 나쁜 짓을 해주겠다고 다짐하며 신형을 연달아 뒤집었다.

꽤 오랜만에 펼치는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용행구천(龍行九天)이었다.

추락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덕분에 정광은 여유 있게 목표물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기 맞네.’

뚜렷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둥근 바위와 삐죽한 바위 사이에 진법이 펼쳐져 있었는데, 교묘한 눈속임으로 입구를 가리는 환각진(幻覺陣) 아닌가?

정광은 망설임 없이 신형을 틀어 그쪽으로 날아갔고, 숨겨져 있던 암굴 속으로 들어가 안착했다.

그리고 내부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하게 만들어놨다고 자랑하더니. 나쁘지 않아.’

천장에 줄지어 박힌 야명주가 환한 빛을 뿌렸다.

통풍도 잘됐고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소소한 진도 설치되어 있었다.

자연히 서책들의 상태도 좋을 수밖에.

정광은 수많은 서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서가(書架)들을 훑어보다가 귀곡자를 내려놨다.

그는 기절해 있었다.

“야. 일어나.”

귀곡자는 정광이 손바닥을 펴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

“일어나서 직접 봐.”

“으으. 다리가 풀려서 일어날 힘이 없소.”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네.”

정광은 귀곡자의 다리를 몇 번 주무르고 단전에 손을 댔다.

내공을 부드럽게 밀어 넣고 퍼뜨리니 창백해졌던 귀곡자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주름살 가득한 입꼬리도 올라갔다.

“아아…… 따뜻해.”

“그게 다야?”

귀곡자가 찔끔하며 감사를 표했다.

“아! 고, 고맙소.”

“그딴 거 말고.”

정광은 귀곡자를 일으켜 세우고 채근했다.

“주위를 둘러봐. 뭔가 떠오르지 않아?”

귀곡자는 의아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천장에 박힌 저 보석 말이오. 무엇이길래 이렇게 밝은 빛이 나오?”

“…….”

“헉! 진혼 눈이 보석보다 더 밝아졌소!”

정광도 인정했다.

“살기가 맺혔으니까. 한자리에서만 보지 말고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해 봐.”

“아, 알겠소.”

귀곡자는 목을 움츠리고 비밀서고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을 했다.

“하아암.”

“……그게 끝이야?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

“그건 모르겠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소.”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옛 기억이 조금은 영향을 주나 보네. 게으름뱅이였던 시절로 돌아갔어.”

“내가 게을렀소?”

“그랬는데 내가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어줬지.”

귀곡자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랐다.

“난 누구요? 이곳은 어디고?”

“넌 귀곡자. 여긴 네 가문인 박락하가의 비밀서고야.”

“……귀곡자? 박락하가?”

“그래. 지금은 둘 다 의미 없는 이름이지만 그랬지.”

귀곡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기억을 쥐어짰다.

정광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서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걸 주면 좀 나아지려나.’

서고 끝까지 가서 주먹으로 벽을 부쉈다.

작은 공간이 나타나며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두꺼운 서책이 보였다.

그것을 집어 들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휘리릭 넘겨봤다.

‘맞네. 상당히 그럴듯해.’

전생에 귀곡자가 말했던 게 분명했다.

다시 귀곡자에게 돌아가 서책을 내밀었다.

“한번 봐봐.”

생각에 잠겨 있던 귀곡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또 무엇이오?”

“네 깨달음.”

정광은 찬찬히 설명해 줬다.

“너는 내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네 가문을 위해 이곳을 만들었어. 권모술수에 능한 마뇌에게 당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던 거지. 네가 한발 늦었는지 마뇌가 빨랐는지, 박락하가는 멸문해 버렸지만 말이야.”

정광은 마뇌도 귀곡자도 똑같은 심복이었기에 공평히 대했다.

천마신교는 강자존(强者尊).

정광이 죽고 난 후엔 둘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귀곡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진혼은 살아 있잖소? 마뇌는 또 누구기에…… 헉!”

정광은 귀곡자의 손에 서책을 쥐여주며 으르렁거렸다.

“일단 읽어. 그사이에 생각 좀 해봐야겠다.”

“아, 알겠소.”

귀곡자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서책을 읽었고 정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현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에 오니 편안해하는 건 확실한데 딱 거기까지야.’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적은 서책을 읽어도 큰 효과는 못 볼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보다 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

별다른 소용이 없어 보이면 나민에게 주면 되고.

귀곡자의 깨달음이 담긴 것이니 장차 천마신교를 관장하길 원하는 그녀에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어쨌든 헛걸음을 한 건 아니야. 이제 치병을 치료할 방법을 정해야 하는데…….’

그동안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해 봤으나 뚜렷한 확신이 드는 게 없어 미뤄왔다.

허나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터.

다소 위험하더라도 시도해 봐야 했다.

정광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또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만. 그나마 이게 제일 그럴듯하잖아.’

꽤 오랫동안 궁리하다가 너무 바빠 손을 놓고 있던 것들.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지며 나름 괜찮은 그림을 그렸다.

‘아니야. 너무 위험해.’

생각난 김에 해보고 싶었지만 막 할 수야 있나.

남은 시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무리수를 두는 건 꺼림칙했다.

‘상태를 보고 움직이자.’

정광은 귀곡자를 면밀하게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서책에 집중하고 있던 귀곡자가 갑자기 장탄식을 했다.

“아아…….”

정광이 반색했다.

“뭔가 알겠어?”

“서책에서 너무 퀴퀴한 냄새가 나오.”

“……망할. 또?”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라는 것밖에 모르겠소.”

정광은 결정을 내렸다.

천하의 귀곡자가 일자무식이 되어버리다니.

저대로 사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래, 당장 하자.”

“뭐, 뭘 말이오?”

“뭐긴 뭐야, 치료지.”

정광은 귀곡자의 팔다리를 척척 접어 가부좌를 틀게 했다.

그리고 마혈을 짚은 뒤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匯穴)과 단전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귀곡자의 눈빛이 달라지고 말투 또한 바뀌었다.

“아! 지존!”

“정신이 들었어?”

“그렇습니다. 여긴…… 으음. 아늑하다 했더니 소인이 만든 비밀서고군요.”

“응. 바보인 너도 편해하더라.”

“그랬습니까? 치병에 걸려도 본능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헌데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정광은 양손을 떼고 자신의 뒷머리를 긁었다.

“네 의사를 듣고 하는 게 낫겠지. 치료하려고 했어.”

“네? 방도를 찾으신 겁니까?”

“완전한 건 아니야.”

“성공 확률이 몇 할이나 되기에 그러시는지…….”

“할? 푼이나 리일지도. 감이 전혀 안 잡히네.”

귀곡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확률이 그 정도로 떨어진다고 말씀하시니 어떤 방법인지 궁금해집니다.”

“마혈부터 풀어줄까?”

“괜찮습니다. 듣다가 뒤로 넘어가는 건 곤란하니까요.”

“내 생각도 그래.”

정광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전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환생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했지?”

“시간이 없어 굵직굵직한 것들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응. 그때 안 한 얘기야. 소혜라는 애가 있거든. 걔가 명교의 잡술을 익혔는데 의외로 대단한 심공이었어.”

귀곡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소인이 그걸 익히게 하시려는 겁니까?”

“비슷하긴 한데 문제가 있어. 자연지기(自然之氣)를 하단전에 쌓아놓고 내공으로 발출하듯이 상단전(上丹田)에 넣어 둔 뒤 심공으로 쓴다는 게 말이 돼?”

귀곡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상단전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본체를 보는 능력을 길러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곳이거늘. 그곳을 단전처럼 쓸 생각을 하다니. 배교자(背敎者)들이 만든 것답게 기괴하군요.”

“내 말이. 상단전에 기를 심어놓고 수련해서 활성화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른 이가 들었으면 상단전에 기를 심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했겠지만 귀곡자는 믿었다.

전생의 정광이 그와 마뇌에게 해줬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소혜라는 아이는 그걸 어떻게 익힌 겁니까?”

“무공을 아예 몰라서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수련했다더라. 익힐 수 있었던 건 나쁘지 않은 머리와 타고난 감각이 있어서 가능했을 거야.”

“저도 그런 자질이 있다고 보시나 봅니다.”

“그야 모르지.”

“……음. 그래서 성공 확률이 낮다고 하신 거였습니까?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것도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어.”

“……갈수록 첩첩산중이군요.”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이라는 게 있거든.”

“……이름만 들어도 본교와 친하지 않은 녀석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감이 있지.”

“어떤 이론입니까?”

“진공(眞空)을 해야 묘유(妙有)가 생긴다. 쉽게 정리하면 단전을 비워야 신묘함이 생긴다는 거야.”

“단전에 쌓은 내공을 수시로 소모해서 그릇을 키우는 것이군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특별해. 단전에 내공을 쌓지 말라는 말이거든.”

“……네?”

“내공을 단전에 가두지 말고 자신을 그릇으로 삼으래.”

지금껏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애쓰던 귀곡자가 입을 떡 벌렸다.

“자, 자신을 그릇으로 삼는다고요? 천하에 그런 해괴한 사술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여기. 그리고 사술이 아니라 불문 것이야.”

“역시 숨어서 몰래 고기를 뜯고 술을 탐하는 땡중들답……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 나물에 그 밥이어도 도사는 엄연히 다른데 뭐.”

귀곡자가 눈치를 보다가 힘주어 말했다.

“지존. 승려보다는 도사가 백배 멋집니다.”

“그렇긴 하지. 근데 이 토납술이 자연지기를 논하더라고. 불문 무공답게 뜬구름 잡는 소리로 떡칠을 해놔서 헷갈리는데, 내 생각엔 자연지기를 단전에 쌓지 말고 자신을 통로로 삼아 들이고 내보내라는 말인 것 같아.”

“자신을 통로로 삼다니요? 무슨 수로 말입니까?”

“몸 전체를 말하는 건 아닐 거고.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이 세 가지를 전부 칭하는 게 아닐까?”

정광은 지금껏 추측한 것들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삼단전(三丹田)이면 정(精), 기(氣), 신(神)을 아우르는 것이니 자신 그 자체라 할 만하지. 이 세 개를 하나로 이어서 통로로 삼는 것일 확률이 높아. 푼이나 리 정도겠지만.”

귀곡자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하단전이야 당연히 자연지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소혜라는 아이가 상단전을 쓴 전례가 있으니 그 역시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중단전은…….”

정광이 미소 지었다.

“혼에 마를 심어 마혼도 키운 난데 그깟 자연지기쯤이야.”

“아!”

“어떻게든 되겠지.”

“……아.”

“네가 결정을 내려.”

정광은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손상된 뇌는 그 어떤 것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어. 하지만 죽었던 수풀을 살려내고 만물을 키우는 자연지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할래, 말래?”

귀곡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뿐더러 정광을 믿어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존.”

“좋아.”

정광은 귀곡자의 백회혈과 단전에 손을 대며 환하게 웃었다.

“혹시 모르니 지금 말할게.”

“무엇을 말입니까?”

“그동안 수고했어.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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