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9화
보러
정광 일행은 계속 말달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해가 아래로 떨어졌고 회색빛 하늘이 진홍색 노을로 물들기 시작하자 노숙을 할 준비를 했다.
독두를 비롯한 마인들도 열심히 따라왔는데 근처에 있는 공터에 천막을 치며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이봐. 아까 암쇄혈겸(暗鎖血鎌) 표정 봤어?”
“크흐흐. 똥 씹은 얼굴이었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니까.”
“인과응보라는 말이 딱 떠오르더군. 항상 잘난 체하며 내려다보더니 꼴좋게 됐어.”
“하여간 진혼을 따라다니면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한다니까.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계속 따라가세. 진혼이 말했듯이 우리는 건곤일척의 승부들을 함께 하며 울고 웃은…….”
말을 하던 중년인이 말끝을 흐리자 다른 마인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뭘 그리 부끄러워하나?”
“용기를 내서 마저 말해보게.”
중년인이 벌게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우리는 버, 벗 아닌가?”
마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가가대소했다.
“크하하! 말하란다고 진짜 하냐?”
“낯짝 한번 두껍군. 정말 다시 보게 됐어.”
“우냐? 울어? 크흐흐…… 컥!”
중년인을 놀리던 한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이 휘두른 거치도(鋸齒刀)에 팔목이 잘린 것이다.
“이 새끼가 감히 암습을!”
노인도 단창을 꼬나쥐고 중년인을 공격했다.
중년인은 거치도로 막아내며 이죽거렸다.
“누가 선을 넘으래? 죽어, 새꺄!”
두 벗은 혈전을 벌였다.
다른 벗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며 열심히 응원했다.
그리고 중년인이 승리하자 노인의 시체를 멀리 던지고 축하했다.
“하하! 자네가 이길 줄 알았다니까!”
“수고했네. 덕분에 크게 땄으니 이녕(伊寧)에 도착하면 내가 술 한잔 사지.”
“헉. 헉. 그러든가. 빌어먹을, 힘들어 죽겠네.”
마인들은 다시 떠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정광은 죽과 육포를 먹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남은 여정을 떠올렸다.
‘이녕이라…….’
현 위치에서 이녕까지의 거리는 약 육백리.
멸혼생사투 마지막 예선인 사차 예선이 그곳에서 열렸다.
‘이번 예선만 통과하면 바로 총단으로 갈 수 있어.’
끝이 멀지 않았다.
이는 귀곡자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얘기였다.
‘신강을 떠나기 전에 고쳐놔야 섬랑과 나민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두 사람은 도움을 받긴커녕 귀곡자를 시중들고 있었다.
“아, 진짜. 왜 그렇게 얼굴에 묻히면서 드세요? 현로, 닦아야 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요.”
“응? 그, 그래.”
섬랑은 천으로 귀곡자의 얼굴을 쓱쓱 훔쳤다.
“됐어요. 다시 드세요.”
“섬랑은 정말 착해.”
“……미치겠네 진짜.”
“헤헤. 지금처럼 인상 써도 착해. 나는 다 알아.”
귀곡자는 실실 웃으며 죽을 들이키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우욱, 쿨럭쿨럭.”
이번엔 나민이 나섰다.
귀곡자의 등을 쓸어내려 주고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천천히 드십시오. 나아질 겁니다.”
“크흑. 고, 고마워.”
귀곡자는 물을 급하게 삼키다가 바로 뿜었다.
나민은 그걸 얼굴에 직격으로 맞았고 귀곡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 어?”
나민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으며 담담히 말했다.
“천천히 드시라고 했습니다만.”
“미, 미안. 마음이 급해서…….”
“이제 괜찮아지셨습니까?”
“어라? 응. 바로 나았네.”
“그럼 됐습니다. 죽이 많이 남았는데 더 드릴까요?”
“고마워. 너도 착한 아이구나.”
나민은 착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아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참을 줄 아는 어른이었다.
귀곡자에게 죽을 퍼주며 정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열심히 돌보다 보면 얻는 게 있을 거라 했지.’
치병에 걸린 노인네가 뭘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솟았으나 정광이 허언을 했을 리는 없으니 최선을 다해봐야 했다.
‘좋아. 일단 경계심은 많이 줄였어.’
나민도 무인인데 그깟 물을 못 피할 리 있나.
그래도 그냥 맞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낼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친절을 베풀어 귀곡자의 호감을 샀다.
‘계속 보살피며 호감을 사는 거야. 그러다 보면 뭔가 보일지도 몰라.’
그때를 떠올리며 눈을 빛내는데 귀곡자가 헤벌쭉 웃으며 빈 죽 그릇을 내밀었다.
“나, 한 그릇 더 먹고 싶어.”
“……그러시지요.”
귀곡자는 참 잘 먹었다.
정광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식탐이 없는 녀석이었는데 저렇게 게걸스럽게 먹다니.
빨리 고치지 않으면 돼지가 되어버려 명이 더 짧아질 게 분명했다.
‘계속 미적거리며 그럴듯한 치료법이 없나 궁리만 할 순 없어. 충격 요법을 써볼까?’
정수리를 찍어버리거나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겠다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정광은 무인이 아닌 의원.
주먹이 아니라 의술 요법으로 충격을 주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정광은 나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저. 경로를 조금 수정할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이녕까지 육백리 남았죠?”
“맞습니다.”
“내일은 정하(精河)에서 묵을 예정이고요.”
“그렇습니다.”
“정하에서 북쪽으로 육십리쯤 올라가 묵는 거로 해요.”
나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방향에 그 거리면…… ‘보러’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는데 대답해 드리긴 싫네요.”
“…….”
나민은 정광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정광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다들 그렇게 아시고 하실 일 하세요. 저는 그만 들어가 잘게요.”
사람들은 군말 없이 식사를 마치고 흩어졌다.
섬랑은 마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관엽과 자오도 따라갔는데 섬랑의 발전이 마음에 드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흑서는 아니었다.
단영의 비밀수신호위 노릇을 하면서 받았던 불쾌감을 풀려는 듯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섬랑의 속을 박박 긁었다.
단영은 식솔들과 함께 뭔가를 논의했고 정광과 민현유는 각자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민은 일렁이는 모닥불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해가 안 가.’
항상 빠르게 이동하길 원하는 정광이 조금이지만 돌아가려고 하다니.
‘왜 갑자기 거기에 가려는 거지?’
그곳에 뭔가 있다는 의미였는데 ‘보러’하면 떠오르는 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마도명가 중 하나인 박락하가(博樂賀家)와 그곳 출신 사람 중 제일 유명한 귀곡자였다.
‘가만. 귀곡자? 설마…….’
나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현로! 귀곡자가 살아 있으면 저 나이쯤 되겠지.’
노인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잠꼬대를 했다.
“나, 나한테 나쁜 마음 품지 마. 무섭단 말이야.”
“……후우우.”
나민은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이었다.
그뿐이랴.
훤칠한 체형이었다고 들었는데 저 노인도 그랬다.
‘비약이 심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귀곡자가 극랍염가에 구금되어 있었고 진혼이 그를 구했다.
헌데 불치병인 치병에 걸려 있는 상황.
나민은 의술을 몰랐지만 정신의 병이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나고 자란 고향에 가면 병세가 호전될지도 모르니 길을 돌아가더라도 데려가려는 것이겠지.’
현로가 정말 귀곡자고 제정신을 찾으면 나민과 섬랑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터.
이 추측이 사실이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나민은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니야. 그렇다고 확신을 해선 안 돼.’
스스로 인정했듯이 심한 비약이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으니 담담히 대처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가보면 알게 되겠지.’
나민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귀곡자의 입에서는 먹구름 같은 트림이 흘러나왔다.
“꺼어억. 헉! 미, 미안!”
“…….”
나민은 불의의 일격을 받았는데도 꾹 참고 미소 지었다.
살벌한 미소였다.
‘꼭 귀곡자여야 해.’
* * *
정광 일행은 동이 트자마자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뒤 떠날 준비를 했다.
독두를 포함한 마인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 대인. 벌써 출발하시려는 겁니까?”
“네.”
“이런. 저희도 빨리 정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네? 무슨 말씀입니까?”
정광은 찬찬히 설명했다.
“단영 소가주님과 나민 소저가 잠깐 들르자는 곳이 있어서요. 이녕에서 다시 보죠.”
독두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도칠대가문 중 두 가문이 관계된 일입니까?”
“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비밀이에요. 지켜주실 거죠?”
독두는 양쪽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넉살을 부렸다.
“소인은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안심하시고 조심히 가십시오.”
다른 마인들도 킥킥거리며 합세했다.
“이거야 원. 나이를 먹어 그런가, 가는귀가 먹었다니까.”
“응? 자네 뭐라고 했나? 귀가 앵앵거려서 못 들었네.”
정광도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라 마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눈은 잘 보이시죠? 작별 인사예요! 이녕에 도착하시면 모두 나으시기를 빌게요! 그때 만나 다시 놀아요!”
마인들이 활짝 웃으며 포권했다.
“고맙소이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겠소!”
“진혼! 그대의 무운을 비오!”
정광 일행은 바로 출발했다.
길을 조금 돌아가게 됐기에 그만큼 더 빨리 가야 했다.
정광은 귀곡자의 손에서 말고삐를 빼앗으며 권했다.
“현로. 마차는 내가 몰 테니 푹 주무세요.”
귀곡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정말이오?”
“싫으시면 말고요.”
“좋소! 무조건 좋소!”
정광은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찬바람이 얼굴을 계속 할퀴고 지나갔는데 어제에 비하면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려는 걸까?
날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겨울보단 봄이 낫지. 이대로 가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어.’
예상대로였다.
정광 일행은 일몰이 시작되기 직전 목적지에 도착했다.
현 교주와 마뇌에 의해 폐허로 변해 버린 보러였다.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혀를 찼다.
‘이거야 원.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귀곡자를 숙청해 놓고 그의 가문인 박락하가를 가만히 놔둘 리 있나.
멸문을 시켰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깨끗이 밀어버렸을 줄은 몰랐다.
‘꼼꼼하기도 해라. 하긴. 원래 그런 녀석들이었지.’
정광은 전생의 기억을 되짚으며 마차를 몰았다.
작은 야산을 돌아가 말라붙은 논밭을 지났다.
헐벗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니 박락하가 본가가 있던 평지가 나타났다.
정광은 옆에서 자고 있는 귀곡자를 깨웠다.
“현로. 일어나요.”
“으응…….”
“일어나게 해드릴까요?”
“으응? 헉! 이, 일어났네. 일어났어!”
귀곡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뜨며 퉁기듯 일어났다.
정광은 그가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한번 둘러보세요. 어딘 것 같아요?”
귀곡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폐, 폐허?”
“…….”
“노, 노숙할 곳?”
“…….”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꼴로 변한 건 못 봐서 아무런 생각도 안 드는 건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뭐가 있어야 옛 기억을 떠올릴 것 아닌가?
그래도 과거와 똑같은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을 게 분명했다.
정광은 전생에 귀곡자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마차를 몰았다.
박락하가의 비밀서고가 숨겨져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