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8화
무언가가 흘러들어 왔다
극랍염가 무인들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거리가 멀어 정광만 알아볼 수 있었다.
정광은 일행을 돌아보며 담담히 명했다.
“황금 마차들을 보호해 주세요.”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이미 정한 상황.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차 네 대를 한자리에 모으고 관엽, 민현유, 나민, 섬랑이 마부를 한 명씩 맡았다.
단영을 비롯한 고이륵단가 무인들이 그 밖을 둘러싸고 흑서와 자오는 정광과 함께 길 쪽으로 나갔다.
정광은 고개를 슬쩍 돌려 나민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저, 마부들에게 제대로 주의시키셨죠?
-물론입니다, 진혼.
-잘 부탁해요.
-맡겨주십시오.
다음은 섬랑 차례였다.
-네 역할이 중요해. 현로를 잘 챙겨줘.
섬랑은 전음을 쓸 수 없기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닦아도 닦아도 또 이러네.”
귀곡자의 눈에 진물이 맺혀 있었다.
그것을 깨끗한 천으로 꼼꼼히 닦으며 투덜거리자 귀곡자가 목을 움츠렸다.
“미, 미안.”
“이런 일로 기죽기는. 현로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진물 이놈이 나쁜 거지.”
귀곡자가 메마른 입술을 헤벌쭉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섬랑은 역시 착해.”
“…….”
뭐가 어째?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섬랑은 귀곡자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현로는 벙어리예요.”
“내, 내가? 아닌데. 지금도 말했는데…….”
“지금부터 벙어리라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마시라고요. 현로를 괴롭혔던 악랄한 놈들이 오고 있어요. 아픈 거 싫죠?”
귀곡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섬랑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지웠다.
“대인은 강해요. 그런 대인께서 지켜주실 거예요. 그러니 믿고 안심하세요.”
“대인이라면 진혼?”
“네.”
“진혼이 나를 지켜준다고?”
“물론이죠. 말씀드렸잖아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귀곡자는 정광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만큼 다른 사람들도 정광을 무서워할 거라 생각했다.
섬랑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채근했다.
“아혈을 짚으면 간단한 일인데 대인이 말씀하시길 진짜 고수는 혈이 짚인 걸 알아볼 수 있데요. 시간 없어요, 이해했으면 빨리 알겠다고 말해요. 네?”
“…….”
귀곡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미 벙어리 연기에 몰입한 것이다.
섬랑은 귀곡자를 멍한 눈으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광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꽤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진작 붙여줄걸 그랬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정광은 달려오는 적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주시했다.
인마(人馬)들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얼마 안 가 지척에 이르렀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잔뜩 기대하고 있던 전주들과 도박꾼들은 기수들의 복색을 확인하고 크게 실망했다.
“짙은 청의에 쇄겸도(鎖鎌刀)?”
“텄네, 텄어. 극랍염가잖아.”
“그런데 무슨 일이지? 기세는 왜 저렇게 흉악하고?”
극랍염가 무인들은 근처까지 말달려와 일제히 멈춰 섰다.
히히힝-
말들의 울음소리와 말발굽에 채여 피어오른 자욱한 흙먼지로 좌중이 어수선해졌다.
기다리고 있던 마인들은 손을 내저어 흙먼지를 밀어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이게 무슨 짓이야?”
“다 뒤집어썼잖아! 새 옷인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그때, 굉음이 터졌다.
퍼엉!
뿌옇게 비산하는 흙먼지로 만들어진 벽에 구멍이 뚫리고 한 노인이 말을 몰아 나왔다.
그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고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염소택이 교우(敎友)들께 인사드리오. 마음이 급해 실례를 범했으니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던 욕설들이 잦아들었다.
그 누구도 이해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염소택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였다.
마인들이 나직이 수군거렸다.
“미친.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암쇄혈겸(暗鎖血鎌)이잖아.”
“극랍염가 태상가주의 둘째 아우가 왜?”
정광도 의외였다.
염가에게 마귀성은 흑유(黑油)를 퍼 올릴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 요지가 엉망이 됐으니 당장 복수하고 싶겠지만 흉수가 귀곡자를 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을 썼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마귀성 곳곳에 널린 식솔들의 시체를 통해 흉수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확인했을 터. 불도 꺼야 하는 데다 본가를 지키기 위해 태상가주와 가주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대신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흉수의 종적을 찾는 한편, 일이 터진 날 아침 일찍 떠난 정광 일행도 쫓아올 거라 생각했건만.
기껏해야 원로가 올 줄 알았는데 대원로인 저놈이 올 줄이야.
‘나를 콕 집어 의심하는 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정말 그런지 염소택의 시선이 정광에게 꽂혔다.
“네놈이 진혼이냐?”
정광은 전생을 떠올려 봤다.
염소광이 그랬듯이 염소택도 마음에 안 들던 놈이었다.
자연히 나오는 대답도 퉁명스러울 수밖에.
“그런데요.”
“익히 들었다만 말버릇하고는.”
“초면에 너무 무례하시니까 그렇죠.”
“너만 할까. 이쪽으로 와라. 물을 게 있다.”
“그냥 거기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가까이 가긴 좀 무섭네요.”
염소택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건 아니고요. 살벌하게 말달려 오셔서 다짜고짜 오라고 핍박하시는데 누가 순순히 가겠어요.”
지켜보고 있던 마인들이 동의했다.
“내 말이.”
“세 살배기 애면 모를까, 이 삭막한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을 들어?”
염소택이 쏘아보자 마인들은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물론 그러면서도 쑥덕거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염소택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살기를 억눌렀다.
‘천박하기는. 하여간 뒤도 앞도 없는 놈들이란.’
이뤄온 것도 없고 이룰 것도 없는 밑바닥 것들은 항상 저 모양이었다.
저런 망종들과는 다툴 마음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염소택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다. 사례는 할 테니 협조해 다오.
협조하면 정광이 아니지.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답했다.
“전음으로 협박하지 마세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마인들이 웅성거리고 염소택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참자. 냉정해야 해.’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식솔들의 시신을 떠올렸다.
새카맣게 탄 뼈만 남았기에 마라팔곡(魔羅八曲)에 당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지만, 부서지듯 베인 단면과 할퀴어진 자국은 총단 고위직이나 익히는 수라도(修羅刀)와 참살마수(斬殺魔手)의 흔적이었다.
염소택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주름살들이 더 깊어졌다.
‘흉수는 강하다.’
정광의 무공도 대단하게 느껴졌으나 아우인 염소광과 식솔들을 깡그리 몰살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이놈들과 함께 손을 썼으면 가능했을지도 몰라.’
정광의 좌우에 있는 흑서와 자오를 힐끔 봤다.
특히 흑서를.
‘흑조, 이놈은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야.’
오래전 멸문한 북천호가(北天扈家)의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다.
방계의 것이란 말도 있었으나 무슨 상관인가? 사람 자체가 강한데.
‘고이륵단가 소가주 단영의 비밀수신호위로 본가에서 묵을 때 벌써 알아봤지.’
혈조라는 저 평범한 용모의 녀석도 여간내기가 아니고. 쿠차 같은 촌 동네에서 이런 놈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튀어나왔을까?
‘교주와 마뇌가 기른 사냥개들일지도…….’
교주나 마뇌나 둘 다 속을 알 수 없는 위인들이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염가가 충성을 바쳐도 그들이라면 다른 마음을 먹고 뭔가 획책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됐든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어.’
그러기 위해선 꼬리를 잡아야 했다.
염소택은 정광에게 태연히 물었다.
“애 좀 썼구나. 네 일행을 벌써 따라잡고.”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따라잡다뇨? 계속 함께 움직였는데요.”
“커라마이에서 나온 뒤 너를 포함한 몇 명이 일행에서 떨어져 북동쪽으로 향하는 걸 본 사람이 있다.”
“말도 안 돼. 앵속에 취한 분인가? 한 번 대질시켜 주세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정광은 자신만만하게 대응했다.
구경하던 마인들도 코웃음 치며 정광을 변호했다.
“대체 뭘 원하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
“진혼 일행은 커라마이에서 여기까지 모두 함께 왔습니다! 우리가 내내 따라가며 똑똑히 봤습니다!”
“헛것을 봤다는 사람은 어딨소? 구경이나 해봅시다.”
염소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들이 감히!
다 같이 합심해서 거짓말을 해?
싸늘한 눈으로 마인들을 노려봤다.
“초록(草綠)은 동색이라더니 과연. 같은 도박꾼이라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며 편을 드는구나.”
마인들이 분노했다.
“진혼이 도신(賭神)이어서 추앙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조금 전 발언, 책임질 수 있습니까? 뭐라도 받았으면 몰라, 우리가 왜 그딴 짓을 합니까?”
“극랍염가의 콧대가 높은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아주 대놓고 시비를 거시는구려! 그대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는 두렵지 않소!”
평상시라면 켕겼겠지만 머리꼭지가 돈 마인들은 집어넣었던 병기를 다시 빼 들었다.
염가 무인들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염소택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런 반응이라니. 정말 아닌가 보군.’
마인들의 머릿수를 다시 세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하기엔 너무 많았고 정광 일행이 더해지면 이길 자신도 없었다.
‘말로 풀어야 하는 상황인데…….’
정광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인들을 돌아보며 두 손을 내저었다.
“자. 자. 모두 진정하시죠. 오해로 비롯된 일인데 왜 아까운 피를 흘려요. 말로 풀면 되잖아요.”
대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독두(禿頭)가 항변했다.
“대인. 평소라면 저희도 참겠으나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쫓아와 모욕하는데 가만히 당하면 추후 얼굴을 들고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냥 빳빳이 드세요.”
“네?”
“저는 건곤일척의 승부들을 함께 하며 울고 웃은 벗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저로 비롯된 일이니 제가 풀게요.”
“대인…….”
돈을 잃어 운 건 도박꾼들뿐이었으나 그들은 물론이오, 전주들까지 감동했다.
밑바닥을 구르며 살던 그들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겠는가?
정광은 다시 신형을 돌려 염소택을 응시했다.
“저는 증인이 있어요. 어르신은 없고요.”
“……사람을 다룰 줄 아는구나.”
“벗을 대할 줄 아는 거죠.”
전주들과 도박꾼들의 눈동자가 한 번 더 흔들렸다.
정광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증거가 있으면 제시하시고 없으면 돌아가세요. 없는데도 자꾸 핍박하시면 저희도 싸울 수밖에 없어요.”
“…….”
염소택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상한 점을 찾아야…… 아!’
찾았다.
염소택의 눈이 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네 일행이 몇 명인지 들었는데. 네 명이 늘었구나.”
“네. 그런데요?”
“뭐 하는 자들이냐?”
“마부요.”
“갑자기 왜?”
“황금 마차가 네 대로 늘었잖아요. 불안해져서 오다가 고용했어요.”
“덮치는 자들이 있을까 봐 그랬다는 말이군. 허나 저들을 지키느라 오히려 손해를 볼 텐데?”
정광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포권했다.
“실례했습니다. 무림맹에서 나오신 대협이셨군요.”
“무어라?”
“위선자 같은 소리를 하셔서요.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버리고 가면 되지, 무슨 말씀이세요?”
마인들은 껄껄 웃고 마부들은 벌벌 떨었다.
염소택은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세 번 세었다가 한참 모자라 더 세었다.
“마차 안에는 누가 있지?”
“아무도 없는데요.”
“보여줘라.”
“아하.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보여주라고 했다.”
“후우우. 너무 강압적이시네요. 이번 한 번만이에요.”
정광은 일행을 시켜 마차 문을 열게 했다.
사람이 아닌 금은보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됐죠?”
“……아직이다.”
염소택은 날카로운 눈으로 마부들을 훑었다.
마부들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염소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 놈이면 모를까, 네 놈 전부 역용을 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인지.
정광이 아닌 마부들에게 직접 물었다.
“너희들은 왜 역용을 하고 있는 것이냐?”
마부가 아니라 나민이 나섰다.
“오로나가의 나민이 암쇄혈겸께 인사드립니다.”
“소문은 들었다. 아릅답다더니 명불허전이군.”
“과찬이십니다.”
“헌데 왜 네가 나선 것이냐?”
“제가 이들을 역용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나민은 또박또박 설명했다.
“긴 여정이라 큰 삯을 주고 고용했는데, 이들은 무공이 약해 그것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용모를 바꿔 보호해 주는 것이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풀어봐라.”
“불가합니다.”
“무어라?”
나민은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폈다.
“꺼리는 이들을 본가의 이름으로 안심시켰습니다. 가주이신 아버님께서 오셔도 이건 번복할 수 없는 약조입니다.”
“……네가 지금 나가의 위세를 믿고 이러는 것이냐?”
나민은 자꾸 위축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에게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노인은 그 능력을 안 써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고수였다.
‘하지만 전혀 느낄 수 없는 진혼과 비교하면…….’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에 부딪혀 조각날 때, 두려움 또한 깨버렸다.
“정론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크하하하!”
염소택이 대소를 터뜨리며 호통을 치려고 하는데.
마차와 마부들을 보호하고 있던 단영이 나섰다.
“어르신. 단가의 체면도 생각해 주십시오.”
“……자네까지 이러긴가?”
“마차들 중 두 대는 본가의 것입니다. 마부 또한 그렇지요. 일전에 전장 사업에 대해 그렇게 설명해 드렸는데도 부정적인 점만 짚으시며 거절하셔서 이러는 건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오.”
마인들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 그따위로 굴어놓고 뭘 바라느냐는 말 아닌가?
염소택은 살심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지금 손을 쓰면 추후 나가는 물론 단가와도 싸워야 해.’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야 있나.
‘진혼, 흑조, 혈조. 저놈들은 예외로 하고. 도박에 찌든 놈들은 모두 역용을 안 한 맨얼굴이야.’
귀곡자가 여기 있다면 반드시 마부들 중에 있을 터.
손만 뒤로 돌려 손짓하니 짱딸막한 중늙은이가 뛰어왔다.
“인경. 네가 확인해라.”
“존명.”
엄인경은 음침한 빛이 어린 눈으로 마부들을 뜯어봤다.
마부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나 나민이 신신당부한 말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닫았다.
‘헛소리만 안 하고 참으면 돼!’
‘그렇게만 하면 금원보가 세 개나 생긴다!’
이렇게 다들 잘 견디는데.
귀곡자는 아니었다.
역용을 하고 솜옷을 두 겹으로 껴입혀 비대한 체구로 바꾸면 뭐 하나.
‘히익! 저, 저놈! 무서워! 너무 무서워!’
엄인경은 그를 고문했던 전문가들 중에서 제일 잔인했던 자였다.
그 사실을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새겨진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으아아! 안 돼! 도망가야 해!’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생소한 작은 손이 귀곡자의 쭈글쭈글한 손을 꼭 잡았다.
‘……섬랑?’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작은 손에서 무언가가 흘러들어 왔다.
간질간질하게 느껴질 만큼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섬랑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게 뭘까?’
호기심이 솟았으나 얼마 안 가 다른 점에 집중하게 됐다.
마음이 조금씩 따스해졌다.
덕분에 귀곡자는 견딜 수 있었고.
딱히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한 염소택 무리는 이를 악물고 돌아갔다.
섬랑의 정을 받은 귀곡자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