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7화
용기를 가지고
귀곡자는 뛰어난 두뇌와 식견으로 명성을 떨친 군사였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무가(武家)에서 나고 자란 무인이었다.
정광이 주먹을 움켜쥐자 재빨리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몸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최선의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그리고 바로 포기했다.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구나.’
늙어 쇠약해진 데다 오랜 시간 동안 고문에 시달린 몸은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탄식을 억지로 삼키며 정광에게 무겁게 경고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내 입을 열 수는 없다. 무언가를 캐내려는 속셈이면 깨끗이 포기해라.”
정광은 말아 쥐었던 주먹을 풀며 피식 웃었다.
“알아서 잘 열고 계시면서.”
“말장난을 하자는 게냐?”
“아뇨. 진솔한 대화요. 조용한 곳으로 가죠.”
정광은 귀곡자의 마혈을 짚고 어깨에 짊어졌다. 신법을 펼쳐 달리다가 큰 바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오자 그쪽으로 향했다.
바위들 틈으로 들어가 귀곡자를 내려놓고 혈도를 풀어줬다. 마른 나뭇가지들을 가져와 불을 붙이자 찬바람도 안 들어오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늑한 자리가 됐다.
귀곡자는 두 손바닥을 뻗어 모닥불을 쬈다.
정광은 언제 챙겼는지 모를 술병을 꺼내 묵묵히 마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귀곡자가 모닥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극랍염가 놈은 아니군.”
“판단 근거는?”
정광이 난데없이 반말을 해도 귀곡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를 알면 시간을 이렇게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와도 그걸 유지하는 시간이 짧다는 얘기네.”
“눈치가 빠르구나.”
“그렇다고 아주 짧지는 않겠지. 네가 궁금해하는 걸 묻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계산해서 입을 열었을 테니까.”
“역시.”
귀곡자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고 정광을 바라봤다.
눈에 맺혀 있던 화광이 사라지고 차가운 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무력뿐만 아니라 머리도 있어. 남 밑에 있을 위인도 아니고. 재밌는 녀석이구나.”
정광은 눈을 마주 보며 대꾸했다.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는데도 주눅 들지 않아. 상대를 볼 줄 알며 판단도 빠르고. 쓸 만한 녀석이네.”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내게 뭘 원하는 게냐?”
“대단한 건 아니야.”
정광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팔짱을 꼈다.
“일단 건강했으면 좋겠고.”
“…….”
“무슨 비밀을 그렇게 악착같이 지켰는지 말해야 해.”
“꿈이 무척 크구나.”
“아직 멀었는데?”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마차 좀 제대로 몰아. 소경을 데려와도 너보단 잘하겠다.”
“나를 마부로 부리고 있는 것이냐?”
“밥값은 해야지. 밥 먹을 때 품위 있게 먹고. 툭 하면 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울 때 얼마나 흉악해 보이는지 알아?”
귀곡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울었다고?”
“펑펑.”
“머리를 밀고 수염까지 자른 건 안다만 흉악해 보이다니?”
“내가 그렇게 역용해 줬거든.”
“…….”
귀곡자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조합해 현 상황을 유추했다.
“극랍염가에서 나를 탈취한 것이구나. 놈들의 추적을 대비해 내 얼굴을 바꾼 것이고.”
“뻔하지.”
“또 무엇이 남았지?”
정광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제일 중요한 거. 내 명을 제대로 수행해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귀곡자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나를 종복으로 삼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물론. 제정신일 때만큼은 머리가 예전처럼 돌아가는 걸 확인했으니 그렇게 해야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정광은 귀곡자의 윗머리를 움켜쥐며 덧붙였다.
“너는 원래 내 종이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귀곡자가 반발하는 순간.
정광이 마혼(魔魂)을 개방했다.
그것은 귀곡자의 뇌리를 파고 들어가 그의 두 눈을 무저갱보다 어둡게 물들였다.
마침내 세상도 그렇게 변했다.
‘이, 이것은!’
귀곡자는 끝없는 암흑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리며 과거를 돌이켜 봤다.
오래전 있었던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음성을 들었다.
극도로 정제되어 순수하기 그지없는 마기가 실린 의념(意念).
자타 공인 천하마도의 종주(宗主)이자 귀곡자의 주인이었던 진천마의 것이었다.
-내가 돌아왔다.
‘지, 지존!’
-다시 너를 쓸 거야. 대답은?
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그 뜻을 따라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귀곡자는 주인을 경배하며 혼을 담아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짧게.
‘……영광입니다!’
힘차게 대답한 뒤 역시 지존이시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까맣게 물들었던 귀곡자의 눈이 원래의 것으로 돌아오고 세상도 그렇게 됐다.
원래의 세상을 지키고 있었던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놈의 만세 타령은. 마지막까지 나를 시험하려고 해?”
귀곡자는 바로 부복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몰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머리가 여전히 잘 돈다는 증거니까 그래줘도 되겠지. 제정신이 드는 주기와 유지되는 시간은?”
“감금되어 있던 처지라 주기는 짐작하기 힘듭니다. 유지 시간은 보통 반 시진쯤 됩니다.”
“얼마 안 남았네. 일단 앉아.”
“네, 지존.”
귀곡자는 공손한 자세로 앉아 정광을 조심스레 뜯어봤다.
‘홀로 세월을 비껴가신 건가. 전보다는 훨씬 못한 용모지만 미청년이시구나. 말투도 여전하시고.’
그와 달리 자신은 얼마나 늙었는지. 이렇게 늙게 된 긴 시간 동안 받아온 무수한 고문이 떠올랐다.
갑자기 꾹 눌러 참고 있던 설움이 폭발했다. 그것은 눈물로 화해 뺨을 타고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노인의 서러운 눈물이라…….
평소의 정광이라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망할. 제정신이어도 우네. 무섭다니까. 가만. 지금 협박하는 거냐?’라며 핀잔을 줬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생의 충신이 눈물을 전부 쏟아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오랜 감금 생활을 통해 쌓였던 눈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메말랐을 때.
그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나를 다시 만난 게 기뻐서 운 거지?”
귀곡자는 주인의 배려에 감사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지난 시간이 떠올라서 그럽니다.”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왔을 때도 고문 많이 받았어?”
“티를 안 내려 했지만 극랍염가에는 전문가가 많았습니다. 더 집중적으로 당했습니다.”
“고생 좀 했네.”
“많이 했지요.”
“예전처럼 흑유(黑油)에 불을 질러줬으니 마음 풀어.”
“감사합니다, 지존. 그쯤은 해주셨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네가 지키려고 했던 비밀이 뭐길래 그래? 새 교주 놈과 마뇌가 뭘 알아내려고 한 거야?”
귀곡자는 자초지종을 낱낱이 털어놨고, 정광은 크게 분노했다.
“이것들이 미쳤나! 내가 없앤 걸 복원해? 게다가 감히…….”
귀곡자는 정광의 살기를 간신히 견디며 사정했다.
“지, 지존. 제발 그만해 주십시오.”
정광은 두 눈을 번들거리다가 살기를 갈무리했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었지만 이렇게 선을 넘어버릴 줄이야.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했다.
동시에 자신의 사후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치다가 모친 고초를 당한 귀곡자가 고마워졌다.
정광은 귀곡자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치하했다.
“그래, 그놈들에게 쏟아줘야지. 귀곡자, 잘했어.”
“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영광을. 무엇이든 명해주십시오.”
“별것 아니니 긴장 풀고 들어.”
별것을 한참 넘어 대단한 것이었다.
정광은 자신이 신강에 돌아온 이유와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임무를 내렸다.
그간 감금되어 있느라 바깥소식을 전혀 몰랐던 귀곡자는 지존이 곤륜 도사로 환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했으나 곧 본분을 되찾고 임무를 완수할 방도를 궁리했다.
그리고 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해내겠노라 맹세했다.
“지존.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다시 정신이 흐리멍덩해질 것이란 의미였다.
정광은 귀곡자를 빤히 보며 힘주어 물었다.
“일을 잘했으면 상을 받아야지. 안 그래?”
“……?”
“남은 생이 길지는 않지만 내내 그 꼴로 살다가 가는 건 좀 그렇잖아.”
“……!”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는 마.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볼게.”
“…….”
귀곡자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가슴이 벅차다 못해 뻐근해질 정도였다.
치병은 불치의 병이거늘, 최선을 다해 고쳐보겠다는 말 아닌가?
천하제일의 의술과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것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위인이!
“지존!”
귀곡자는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쿵쿵 찧고 다시 일어나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입을 여는 그 순간, 정신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응? 여, 여긴 또 어디오?”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너무 무섭소.”
정광은 장탄식했다.
“네가 더 무섭다니까. 이러다 두들겨 패서 죽이겠네. 진짜 고쳐야겠어.”
“히익. 나, 나를 때리려는 것이오?”
“계속 떠들면.”
귀곡자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고 정광은 그의 뒷덜미를 잡고 신법을 펼쳤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 풍경이 쭉쭉 밀려났다.
노숙하는 곳으로 돌아가 보니 모두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광은 일행을 안심시키고 섬랑과 나민을 불렀다.
“섬랑.”
“네, 대인.”
“현로, 보기 딱하지?”
섬랑은 귀곡자를 힐끔 보고 무성의하게 답했다.
“뭐 그럭저럭요.”
“그러니까 이제부턴 네가 돌봐.”
“……네?”
정광은 나민에게도 명했다.
“소저도 도우세요.”
“……네?”
정광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노력하면 얻는 게 있을 거예요. 두 명 모두.”
* * *
다음 날 아침, 정광 일행은 배를 채우고 출발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말과 마차를 다소 느긋하게 몰았다.
뒤에 처진 전주들과 도박꾼들이 따라잡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속도를 이렇게 늦췄는데도 귀곡자의 솜씨는 다시 형편없어졌다.
“헉! 너, 넘어간…….”
옆에 앉아 있던 정광이 마차가 쓰러지는 쪽 바닥으로 장력을 쏟아냈다.
퍼엉!
땅이 움푹 패이며 마차가 바로 섰다.
“휴우우우.”
귀곡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소. 고맙소이다.”
“진짜 큰일 날 뻔했죠. 장력을 현로 머리에 날릴 뻔했으니까요.”
“히익! 제, 제발 살려주시오.”
“저 혼자 해서 될 일이 아닌데. 그러게 좀 도와주시죠.”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차를 탈 때도 섬랑과 나민을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근데 왜 이리 안 와? 한 번은 넘겨야 편해지는데.’
말들이 지쳐 잠깐 쉬는데, 기다리고 있던 무리들 중 한 무리가 도착했다.
전주들과 도박꾼들이었다.
선두에서 달려온 독두(禿頭)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대인! 오랜만입니다! 무척 뵙고 싶었습니다!”
정광도 미소로 맞이했다.
“저도요. 우리가 빨리 가서 쫓아오기 힘드셨죠?”
“하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감이 있습니다.”
“저도 이러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정광은 독두와 마인들에게 마차들을 가리켰다.
“황금 마차가 네 대로 늘었잖아요. 노리는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 마부도 고용했어요.”
“으음. 고이륵단가 정예 무인들을 마부로 쓰는 건 확실히 아깝지요. 좋은 판단입니다. 헌데 걱정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왜요?”
독두가 두 손을 비볐다.
“누가 감히 대인의 재물을 털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하. 본교에 정신 나간 분들이 한둘이에요? 되도록 조심해야죠.”
“거참. 그것도 맞는 말씀이라 부정할 수 없군요.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저를 생각해 주셔서 그런 건데요 뭐.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 같이 거하게 놀아요.”
독두와 다른 전주들은 물론이오, 도박꾼들도 한마음이 되어 함성을 질렀다.
“으하하하! 영광입니다!”
“화끈하시구먼! 역시 진혼이라니까!”
“좋아! 다 같이 놀아보자고!”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휴식을 취하는데.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마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병기를 챙겼다.
“빌어먹을. 보통 숫자가 아니잖아.”
“뭐 하는 놈들일까?”
“설마 진혼을 털려고 오는 놈들은 아니겠지?”
정광이 손을 번쩍 들고 청했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면 도와주세요.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게요.”
“……!”
개평도 통 크게 나눠주는 진혼이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하겠다니!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마인들의 전신에서 투지가 솟구쳤다.
‘한밑천 벌게 생겼구나!’
‘제발 도적놈들이기를!’
‘아니어도 와서 쳐! 용기를 가지고! 어서!’
마인들의 바람과 달리 오고 있는 이들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정광은 기다리고 있던 무리들 중 마지막 무리가 나타나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왔냐? 극랍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