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6화
현로(賢老)
정광은 귀곡자의 머리를 좀 더 살피다가 명문혈에서 손을 떼고 눈살을 찌푸렸다.
‘더 볼 것도 없어.’
혈도가 손상되고 탁기(濁氣)가 가득한 상태였다.
치병이 확실했다.
‘이러니 아직까지 살아남았지.’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굳건한 의지로 입을 꾹 다물고 버틴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가서 대답을 못 한 게 분명했다.
모진 고문을 하면 뭐 하나?
뭘 알아야 대답하지.
정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해라. 고생깨나 했겠네.’
귀곡자가 아니라 극랍염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시간 동안 답이 안 나오는 귀곡자를 상대하며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그렇다고 그냥 때려죽일 수도 없고.
기대를 안 하면 실망도 없는 것을.
언젠가는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버티다가 숱한 좌절에 빠졌으리라.
‘그건 그거고. 이걸 어쩌지?’
의술과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치료할 수 없는 병들이 있기 마련.
정신의 병이 그중 하나였다.
전생에 천마신교에 즐비했던 미친놈들을 고쳐보려고 몇 번 시도했다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괜한 짓이었어.’
그때도 안 됐는데 지금이라고 될 리 있나.
됐으면 귀곡자의 치병과는 다르지만 역시 정신에 문제가 있는 철월을 진작 치료했지.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아니. 그나마 그놈은 훨씬 나은 편이야.’
사천당문은 몸을 과하게 보하다 못해 생을 억지로 붙잡는 영약을 만들어 철월에게 먹인 뒤 두 가지 대법을 연달아 펼쳐 치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강철처럼 튼튼한 철월도 그런 수법을 써야 치료가 될까 말까 한데, 너무 늙어 생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귀곡자를 무슨 수로 고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하네. 대체 어떡해야…… 아!’
순간, 정광의 눈이 빛났다.
‘꼭 치료할 필요는 없지. 원래 게으른 녀석이니까 이대로 지내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잖아.’
본인의 의사를 물어봐야 했다.
정광은 귀곡자의 정면으로 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행복하지?”
마혈은 짚었지만 아혈은 손대지 않은 상태.
귀곡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답했다.
“무, 무섭소.”
“그거 말고. 예전보다 행복하냐고.”
“……예전보다?”
귀곡자의 흉악하게 변한 얼굴이 더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계속 고문을 당한 기억밖에 없는데…….”
“지금은 안 당하고 있잖아.”
귀곡자는 치병만 생긴 게 아니었다.
눈치도 없어졌다.
“당신이 너무 두렵소.”
“망할.”
정광은 마혈을 풀어주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 같이 다니는 것으로 하자.”
“그, 그냥 놓아주면 안 되오?”
“다시 잡혀가서 고통을 겪고 싶으면 그러든가.”
귀곡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오. 그대를 따르겠소.”
“완전히 바보가 된 건 아니네. 외모를 바꿨으니까 다른 것도 그래야겠지. 지금부터 네 이름은…….”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뼉을 쳤다.
“그래, 현로(賢老)다. 사람들 앞에서는 존댓말을 쓸 테니 그렇게 알아.”
* * *
다음 날 아침.
정광 일행은 객잔 일 층에 모여 탁자 앞에 둘러앉았다.
“밥부터 먹고 얘기하죠.”
정광의 말에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허나 그들의 이목은 귀곡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눈치 없이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식사는 무척 빠르고 조용하게 끝났다.
정광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제가 구해온 이분이 누구신지 궁금하시죠?”
민현유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라고.
이 험악하게 생긴 노인이 대체 누구길래 극랍염가와 일전을 벌이면서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그동안 애써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정광이 정식으로 소개했다.
“현로라고 해요. 앞으로 함께하게 됐으니 잘 부탁드려요.”
“…….”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현로? 그게 누구야?’
‘단주가 정체를 감추려고 새로 지은 이름인가 보군.’
‘저렇게 무서워 보이게 역용해 놓고 어질 현자를 넣다니.’
‘후우. 지존의 작명 실력은 여전하구나.’
귀곡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감히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제대로 알려 드릴 테니 이해해 주세요.”
이해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난데없이 일행이 늘어나서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확실히 그렇겠군.”
단영이 동의했다.
“마차 속에 계속 숨길 수도 없고.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하겠어. 생각해 둔 게 있는가?”
“마차밖에 두려고요.”
“밖? 아! 마부를 말하는 것이군.”
“네. 황금 마차가 네 대로 늘었으니 현로를 제외하고 세 분 더 고용하면 돼요.”
“그렇지. 적당한 사유인 데다 새로운 일행이 넷이나 생기면 시선이 분산되기 마련이지. 여기에서 구하면 되겠어.”
유구진(柳溝鎭)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 정도 사람도 없을까.
정광도 그럴 계획이었다.
“바로 보셨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엇인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광은 나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저, 입이 무거운 분들로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나민이 객잔 밖으로 나가자 민현유도 돕기 위해 따라갔다.
그사이 일행은 짐을 정리해 네 대의 마차에 나눠 실었다.
“여차.”
정광은 마차들 중 하나를 골라 마부석에 오른 뒤 귀곡자에게 손짓했다.
“뭐 해요? 오시지 않고.”
귀곡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말이오?”
“당연하죠. 누가 또 있다고.”
“아, 알겠소.”
정광은 귀곡자가 옆에 앉자 마차를 몰아 마을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황량한 들판이 나타났다.
“여기면 적당하겠네.”
정광은 말을 멈추고 귀곡자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잘 몰아.”
귀곡자는 얼결에 고삐를 받고 당황하다가 두 눈을 끔벅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마차를 몰아본 적이 있었나?”
정광이 친절히 알려줬다.
“응. 꽤 잘 모니까 걱정하지 말고 맘껏 해봐.”
“그걸 그대가 어찌 아오?”
“아니까 알지. 일단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보자.”
귀곡자는 손에 쥔 말고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이러는 건가?”
찰싹!
히히힝!
말고삐를 치켜들었다가 내려치자 마차에 메인 말들이 크게 울며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마차 바퀴가 미친 듯이 돌며 비명을 질렀다.
그 충격이 귀곡자의 엉덩이와 허리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억! 크윽!”
정광이 담담히 충고했다.
“아픈 게 싫으면 잘 몰아.”
“어, 어떻게 말이오? 악!”
“호들갑 그만 떨어. 하다 보면 기억날 거야.”
정말이었다.
머리는 기억 못 해도 몸은 기억했다.
조금씩 나아지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익숙해졌다.
정광은 귀곡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거봐. 되잖아.”
“어, 어떻게…….”
귀곡자는 자신이 해낸 일에 놀라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이런 재주도 있구나!”
정광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금방 잊을 텐데 뭐가 그리 좋다고.”
귀곡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애초에 워낙 똑똑해서 그런 걸까?
그는 치병에 걸렸는데도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정광은 충신을 위로하며 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까먹으면 또 하면 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람 구실 하게 해줄게.”
그들은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만나 길을 떠났다.
이번 목적지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에 최대한 빨리 달렸다.
그사이 귀곡자가 마차 모는 법을 까먹어 전복될 뻔한 일이 있었지만 정광이 즉시 대응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귀곡자는 겁을 먹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흐윽. 무, 무서워…….”
“네가 우는 게 더 무섭다.”
“아, 안 몰면 안 되겠소?”
“그걸 말이라고. 자꾸 칭얼거리면 나 내린다? 그럼 너 홀로 해야 하는 거 알지?”
“……!”
생명이란 소중한 것.
귀곡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마차를 몰았다.
그리고 휴식을 취할 때마다 땅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려 그러는 것이었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지가지 한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 보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정광은 일행을 멈추고 노숙 준비를 하게 했다.
천막이 여러 개 세워지고 고기가 지글지글 익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던 귀곡자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간신히 일어났다.
정광은 귀곡자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내공심법 기억 안 나지?”
“내가 그런 것도 할 줄 아오?”
“당연하지. 넌 꽤 쓸모 있는 놈이었어.”
“……지금은 아니라는 말 아니오?”
“솔직히 그렇지. 이거야 원. 또 우냐?”
“흐윽. 내, 내가 언제…….”
“울 힘 있으면 고기나 씹어. 가자.”
귀곡자는 언제 울었냐는 듯 신이 난 얼굴로 고기를 뜯었다.
하루 동안 귀곡자의 언행을 보며 치병을 앓고 있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섬랑만 빼고.
“빌어먹을. 이 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자오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전에는 누가 그랬길래…….”
“아실 것 없어요.”
섬랑은 쌀쌀맞게 말을 자르고 일어나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으. 추워.”
잽싸게 나뭇가지와 덤불을 그러모아 불을 붙였다.
그 앞에 주저앉아 무릎을 양팔로 감쌌다.
일렁이는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 옛 생각이 났다.
‘빌어먹을 주정뱅이 같으니.’
술만 퍼마시다가 술에 잡아먹힌 아비도 정신이 오락가락하곤 했었다.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 응?’
섬랑은 인기척이 느껴져서 돌아봤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미친 영감이 어느새 다가와 머뭇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왜요?”
노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여기에 있어도 될까?”
“…….”
“제발 허락해 줘. 진혼은 무서워. 여기가 더 편하단 말이야.”
“…….”
섬랑은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다가 툭 내뱉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고, 고마워!”
노인은 모닥불에 바짝 붙어 앉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섬랑은 그 모습을 힐끔힐끔 보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예요?”
“나, 나? 현로.”
“대인이 지은 가명 말고 진짜 이름요.”
노인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으으…… 아파…….”
“하아.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 그게 나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모닥불만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인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섬랑은 잠시 혀를 차다가 일어나 묵영보를 수련했다.
작은 두 발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펼치면 펼칠수록 속도가 빨라졌고 은밀함도 더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섬랑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확연히 더 나아진 것 같잖아.’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섬랑의 묵영보는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쿠얼러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수련하다가 느꼈던 몽롱한 쾌감이 다시 찾아왔다.
‘더!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보일 것 같…….’
그때는 갑자기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었건만.
이번엔 꾸벅꾸벅 졸고 있던 노인이 앞으로 엎어져 모닥불에 얼굴을 묻었다.
‘미친!’
섬랑이 급히 달려갔으나 소용없었다.
보법을 수련하다 보니 너무 멀리 온 것이다.
곧 터져 나올 처절한 비명과 끔찍한 화상을 상상하며 자책했다.
‘썅! 졸기 시작했을 때 미리 떨어뜨려 놨어야 했는데!’
섬랑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으아악!”
귀곡자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정광이 눈 깜빡할 사이에 달려와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칠칠맞지 못하게.”
“크으…….”
“이것 봐라? 눈썹이 타니까 더 흉악하게 보이잖…… 어?”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귀곡자의 눈빛이 달라져 있는 것 아닌가?
기억 속에 있는 그것으로!
목소리도 그랬다.
“으음. 여긴 어디냐?”
“…….”
하지만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넌 누구지? 숨김없이 토설해라.”
“…….”
이젠 아주 협박까지?
“대답 안 해? 허어, 눈빛하고는. 속이 시커먼 놈이로다.”
“…….”
정신이 돌아 온 건 좋은데.
안 좋은 것도 많았다.
우드득-
정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