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5화
비슷한 경험
물과 불처럼 성질이 서로 상극인 경우, 상대를 꺾기 위해선 큰 힘이 필요하다.
물로 불을 끄려면 많은 양의 물을 쉼 없이 길어와 쏟아부어야 하고, 불이 물을 이기고 계속 타기 위해선 화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같은 성질의 것과 다툴 땐 훨씬 쉬워진다.
적은 물은 많은 물에 합쳐지고 약한 불은 강한 불에 먹히기 마련. 이것이 세상 이치인데 역시 상극 중의 상극인 정공(正攻)과 마공(魔功)이라고 다를까.
정광은 마(魔)를 더 큰 마(魔)로 굴복시킨 뒤 마적(魔笛)을 입술에서 떼어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오랜만에 힘껏 불었더니 어질어질하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으나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얼마 안 가 괜찮아진 정광과 달리 대부분의 극랍염가 무인들은 전신 경맥(經脈)이 터져 죽어 있었다.
무공이 강해 살아남은 몇몇 마인들도 비틀거리며 피를 토하거나 땅바닥에 쓰러져 숨만 간신히 몰아쉬는 상황.
정광은 도를 뽑아 들고 한 노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유일하게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는 염소광이었다.
염소광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을 부릅뜨고 정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머금고 있던 검게 죽은 핏물이 내장 조각과 잔뜩 쉰 목소리를 싣고 흘러내렸다.
“중단전의 혼을 뒤흔들어 진기와 마기를 역류시킨 것이냐?”
“알면서 왜 물어?”
“네, 네가 마라팔곡(魔羅八曲)을 어떻게…….”
정광은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아니까 불었지.”
염소광이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묵영권가의 후인이 아니라 그분의 진전을 이은 것이었군. 그래도 그렇지, 그 나이에 무슨 수로…….”
“곧 죽을 놈이 호기심이 왜 이리 많을까.”
정광은 염소광에게 쇄도하며 도를 일직선으로 내려쳤다.
넋이 나가 있던 염소광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했다.
쩌엉!
쇄겸도(鎖鎌刀)를 들어 도를 막았다. 허나 몸이 양단되는 걸 막았을 뿐, 입에서 핏물을 뿜어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격돌로 인해 내상을 입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정광이 어느새 왼손으로 뽑아 그어 올린 운룡이 그의 사타구니부터 가르며 올라가 턱밑에 멈춰 있었다.
웬만한 무인이라면 즉사했을 중상이었으나 염소광은 훌륭한 마인.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기침과 감탄을 토했다.
“쿨럭. 싸우는 법까지 제대로 배웠구나.”
“너야말로 철마수(鐵魔手)가 꽤 늘었는걸. 그새 내 검을 잡아서 멈추고 말이야.”
정광은 눈짓으로 검신을 간신히 막고 있는 염소광의 왼손을 가리켰다.
염소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느, 늘었다고?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화아아악-
정광은 운룡에 내공을 불어넣어 올려쳤다. 금빛 광채가 비상하며 염소광의 손이, 턱이, 머리통 전체가 깔끔하게 갈라졌다.
결국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세로로 양단된 시체가 좌우로 쓰러지며 핏물과 내장을 쏟아냈다.
정광은 뒤로 훌쩍 뛰어 그것들을 피한 뒤 아직 살아 있는 마인들을 둘러보며 이를 드러냈다.
“너희도 빨리 따라가야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두 보내줄 수 있었다.
정광은 도검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다가 품속에 있는 역천경을 타박했다.
-깜빡했네. 황궁무고에서 경험해 봤으면서 그렇게 갑자기 진동하면 어떡해? 깜짝 놀랐잖아.
-…….
역천경은 하도 어이가 없어 대꾸할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극심한 고통을 줘놓고 뭐가 어째?
이쪽은 놀라는 걸 훌쩍 넘어 너무 아파 눈물이 날 뻔했단 말이다!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얌전히 진동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주의해. 한 번만 더 그러면 반으로 접어버린다.
-……웅.
-하여간 대답은 잘해요.
정광은 비밀 방으로 돌아가 귀곡자를 내려다보며 소운룡을 꺼냈다.
그것으로 치렁치렁한 백발을 대머리로 밀어버리고 배꼽까지 내려오는 수염도 자르니 꽤 만족스러운 몰골이 되었다.
‘언뜻 봐선 못 알아보겠지. 그래, 이왕 하는 김에…….’
역용까지 해줬다.
귀곡자는 흉악한 인상의 파계승으로 변해 정광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이제 뒤처리를 해야지.’
귀곡자를 커다란 포대 속에 대충 구겨 넣고 끈을 연결해 양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흑유(黑油)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사방에 뿌리자 준비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화섭자에 불을 붙여 대충 던지자…….
화르르륵-
불길이 순식간에 퍼져 흑유에 젖은 시체들을 집어삼켰다.
흑유를 퍼 올리는 곳에서 솟구치는 불기둥과 그 주변 곳곳에서 타오르는 시체.
황량한 사막이 한동안은 외로워하지 않을 만큼 따스한 풍경이었다.
‘좋아, 가자.’
꼬리를 밟힐 수도 있기에 일행이 가고 있는 남서쪽으로 곧바로 달리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잠행술을 펼쳐 달렸다.
황량한 사막이 계속 펼쳐지다가 푸른 초지가 나왔는데 붉은 깃발을 세워놓은 채 쉬고 있는 상인들이 보였다.
그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암구호를 뱉었다.
“운수대통.”
“……!”
상인들 중 눈빛이 제일 날카로운 장년인이 놀란 표정을 숨기며 화답했다.
“일확천금.”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민현유가 준비해 놓은 자들이었다.
장년인이 동료들을 재촉했다.
“뭐 하는가? 어서 손을 쓰지 않고.”
“네.”
상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우선 준마를 몇 필 끌고 왔다.
귀곡자를 넣은 포대를 천막 천으로 둘둘 둘러 말 등 위에 올려놓고 묶으니 천막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밖의 물품들을 다른 말에 실은 뒤 정광의 옷까지 두꺼운 솜옷으로 바꿔줬다.
정광도 말 위에 올라 다른 말들의 고삐를 쥐었다.
누가 봐도 추운 겨울에 홀로 여행하는 행색이었다.
상인들이 두 손을 모았다.
“무운을 빕니다.”
정광도 예를 표했다.
“수고했어요. 어서 가세요.”
상인들은 북쪽으로 떠나고 정광은 방향을 틀어 남서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잘 닦인 길이 나오기 전, 하늘에서 날고 있는 매가 보였다.
‘다 왔네.’
근방을 살펴보니 매사냥을 하러 나온 무리가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똑같은 암구호를 말했다.
그들 역시 화답하며 말과 마차를 내줬다.
정광은 귀곡자를 마차에 넣고 말을 몰았다.
이런 과정이 다양한 방법으로 몇 차례나 반복됐다.
정광은 은밀하면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쉼 없이 달릴 수 있었다.
‘예정보다 빨라. 해가 지기 전에 먼저 도착할 수 있겠어.’
예상대로였다.
정광은 유구진(柳溝鎭)이라는 작은 마을 인근에 이르자 근처에 있는 숲에 들어가 말을 숨겼다.
그리고 귀곡자를 넣은 포대를 다시 양어깨에 메고 기다리는데…….
큰길 쪽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안력을 돋워서 확인해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말달려 오고 있었다.
정광은 그 선두에 선 인물을 확인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미쳤나. 뭐 하는 거야?’
진혼의 얼굴로 역용을 한 흑서가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일행에게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정광의 목소리로.
“다들 왜 이렇게 느려요? 이게 최선이에요?”
“…….”
“이러다 해를 넘기겠네. 굼벵이도 아니고 이래서야 쓰나.”
“…….”
“배고프단 말이에요. 말이 지쳤으면 말과 마차를 어깨에 짊어지고 뛰세요. 이해하셨죠?”
이해할 리 있나.
정광은 전혀 이해 못 했지만 흑서와 함께 달리는 일행은 사정이 다른 것 같았다.
정광은 그들의 표정을 머릿속에 똑똑히 담은 뒤 큰길로 나가 몸을 드러냈다.
신나게 떠들며 말달려 오던 흑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정광이 어떤 얼굴로 역용하고 떠나는지 봤기에 바로 알아본 것이다.
‘헉! 이, 이렇게 빨리!’
놀랄 때가 아니었다.
말을 급히 세우며 억지로 웃었다.
“하. 하하. 진혼, 벌써 왔는가? 수고했네.”
그리고 전음으로 간청했다.
-지, 지존! 오해입니다! 지존께서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를 내라고 하셔서 그만…….
정광이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 흑서가 짓고 있던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런 얼굴을 하고 그런 식으로 말했어?
-그, 그야…….
당연하지.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허나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아니지요. 무슨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소인의 재주가 부족해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갈고닦아서 반드시…….
-혀가 기네. 좀 잘라줘야겠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지, 지존! 제발 용서를!
-시끄러워. 역용 풀고 목소리도 바꿔야 하니까 가만히 있어.
정광은 손가락을 뻗어 흑서의 얼굴과 목 곳곳을 짚었다.
흑서는 쿠차에 도착했을 때 바꿨던 얼굴과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갔고 정광은 진혼의 얼굴로 변했다.
“혈조. 빈 마차 좀 열어줘요.”
“네, 네. 대주.”
흑서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자오가 잽싸게 마차 문을 열었다.
정광은 그 속에 귀곡자를 던져 넣고 일행을 한 명씩 둘러봤다.
“오시면서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웃음꽃이 만발하시던데.”
관엽을 제외한 모두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하지만 계속 노려보니 관엽도 고개를 떨궜다.
정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하하. 하늘도 어둑어둑해지고 있겠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죠.”
‘일단’이라는 말에 모두 몸서리를 치며 말을 몰았다.
워낙 작은 마을인지라 향리객잔은 없었으나 다행히 묵을 만한 낡은 객잔이 있어 그곳에 짐을 풀었다.
정광은 모두 일 층에 모이게 한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물었다.
오랜만에 함께 묵게 된 단영이 설명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고 자네 충고대로 빨리 달렸기에 전주들과 도박꾼들은 딱 한 번 따라붙었다가 지쳐서 떨어져 나갔네.”
단영은 흑서를 슬쩍 보고 말을 이었다.
“그들 모두 자네 얼굴로 역용을 한 흑조 어르신을 똑똑히 봤으니 증인이 되어줄 걸세.”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일부턴 조금 천천히 가서 그들이 합류하게 하면 되겠네요. 수고하셨어요.”
“아닐세. 자네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잘됐죠.”
정광은 마귀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다른 이들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한 얼굴로 묵묵히 들었으나 나민은 아니었다.
눈이 커지고 손에 땀이 고였다.
‘극랍염가 태상가주의 친아우인 염소광을 일도양단했다고? 다른 무인들과 함께?’
아비인 나익승을 꺾었을 때도 놀랐거늘, 그보다 한 배분 위의 고수까지 죽이다니!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하지 않는가!
나민은 정광에 대한 기준을 새로 잡았다.
‘능력을 써도 괜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게 아니야. 진혼에겐 한계를 그어선 안 돼.’
정광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나 소저. 여정 관리 안 하세요? 객잔 비용부터 지급하셔야죠. 요리와 술도 시켜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자그마한 마을에 있는 객잔답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배를 채우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섬랑은 예외였다.
“수련 안 하고 어딜 가?”
“대, 대인. 객잔이 너무 작아 후원이 없어서…….”
“제일 크게 웃었던 놈이 배부른 소리 하네. 천천히 때릴 테니 잘 막아봐.”
“아니, 제가 어떻게…… 아악!”
정광은 실전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수법들을 아낌없이 가르치고 피식 웃었다.
“현유, 네가 보기엔 어때?”
방으로 가지 않고 남아 있던 민현유가 답했다.
“일취월장(日就月將)이 따로 없습니다. 섬랑은 대단한 인재입니다.”
“벌써 기절한 녀석이 뭐 대단하다고. 그거 말고.”
“극랍염가가 어떻게 나올지 물으신 겁니까?”
“그런 뻔한 얘기를?”
정광은 기절한 섬랑의 몸을 주물러 추궁과혈 해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귀곡자를 구했잖아. 네 조직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겠냐고.”
“은인으로 모실 겁니다.”
“귀곡자는 이제 내 것인데?”
“그분께 자유를 돌려 드린 것으로 저희 역할은 끝난 겁니다.”
“은혜를 갚은 셈이니 앞으로의 일은 상관치 않겠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정광은 민현유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 이번 건은 나도 필요해서 한 거야.”
“네, 대인.”
“나를 떠보거나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고.”
“이미 각골명심(刻骨銘心)하고 있습니다.”
“좋아. 가는 길에 섬랑도 데려가.”
민현유는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정중히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말로만?”
“그 역시 명심하고 있습니다.”
민현유가 섬랑을 안고 올라갔다.
정광은 홀로 술을 몇 잔 더 마시다가 술 항아리를 들고 귀곡자가 있는 방으로 갔다.
‘잘도 자네.’
섬랑에게 했던 것처럼 귀곡자 역시 추궁과혈을 해줬다.
창백했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아왔다.
정광은 뺨을 때려서 깨우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귀곡자가 눈을 뜬 것이다.
“운 좋은 놈.”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술을 한 잔 따라 탁자에 놓아주고 담담히 명했다.
“마셔.”
귀곡자는 코를 벌름거리다가 진물로 덮인 눈을 손으로 비비고 정광을 바라봤다.
“너, 너는 누구냐?”
“네 주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광은 마혼을 열었다.
칠흑보다 어둡게 물든 눈으로 귀곡자를 주시했다.
음성에도 마(魔)가 실렸다.
“직접 별호까지 지어서 내려주며 사람답게 살게 만들어줬더니 뭐가 어째?”
“크흑…….”
귀곡자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벌벌 떨었다.
정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기억이 나냐?”
아니었다.
“누, 누구시오? 내게 왜 이러시는 게요?”
“……뭐?”
귀곡자는 흉악하게 변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만 좀 핍박하시오. 제발 내 말을 믿고…… 헉!”
정광은 귀곡자의 마혈을 짚고 뒤로 돌아가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댔다.
‘설마…….’
소림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지.’
현오도 그런 척만 했을 뿐 멀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얼마 안 가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통천혈(通天穴)도 후정혈(後頂穴)도 뇌호혈(腦戶穴)도. 심지어 풍부혈(風府穴)까지 멀쩡한 혈도가 하나도 없잖아!’
귀곡자는 치병(癡病)에 걸린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