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4화
정광의 의지를 전했다
이른 아침이라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은밀하게 뒤따라오며 감시하던 극랍염가 무인들도 정광 일행이 커라마이에서 나오자마자 돌아가 거칠 것이 없는 상황.
마귀성(魔鬼城)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이백오십리.
빨리 가되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에 말을 타지 않았다. 신법을 펼쳐 잘 닦인 길이 아닌 척박한 평야를 달렸다.
정광은 주위를 경계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으며 전생을 떠올렸다.
‘신강 북동부 지역 놈들을 굴복시키느라 한바탕했었는데 또 그러게 됐네.’
그래도 그때처럼 요란을 떨 필요까지야 있나.
‘쉽고 편하게 가자.’
빠르게 치고 빠지기.
그게 계획이었다.
‘어떤 수준의 놈들이 몇 명이나 있으려나.’
적들의 무력과 머릿수에 따른 대응 방법을 떠올리며 쉼 없이 달렸다.
그것들을 전부 정리하고,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일행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는 것까지 끝낼 때쯤 되자 목적지인 마귀성이 보였다.
정광은 그곳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마귀성은 성벽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성(城)이 아니라 사막이었다.
거대한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그것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귀신이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마귀성이라 불렸다.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심장에는 안 좋을 수밖에.
마귀가 빨리 오라고 흉악하게 웃는듯한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떨리겠는가?
‘일단 회복부터.’
기묘한 모양을 한 큰 바위 뒤에 숨어 체조법으로 몸을 부드럽게 풀었다.
다음은 운기조식.
최고의 몸 상태로 끌어 올릴 여유는 없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바위 옆으로 얼굴을 슬며시 내밀었다.
안력을 돋워 보니 찾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개의 건물과 시설이 띄엄띄엄 세워져 있었는데 이 지역의 명물인 흑유(黑油)를 퍼 올리는 곳이었다.
정광은 그곳을 주시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열심이네.’
번(番)을 서고 있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사방이 트여 있어서 접근하는 적이 있으면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인데도 필사적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이라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감을 키워 살펴보니 건물 안에도 사람이 꽤 있었다.
‘습격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것일지도.
‘뭐 가보면 알겠지.’
이제는 계획을 실행할 차례.
잠행술이나 은신술을 써서 몰래 접근할 때가 아니었다.
염가 무인들은 물론이오, 시간과도 싸워야 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해.’
정광은 목표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제일 바깥쪽에서 번을 서고 있던 자의 얼굴이 급속도로 확대됐다.
그 얼굴에 박힌 눈 두 개가 정광을 발견하고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입이 움직였다.
“스, 습격…….”
서걱-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정광의 도가 귀기(鬼氣)를 흘리며 날아가 목을 갈랐다.
머리 없는 시체가 핏물을 세차게 뿜어내며 비틀거리는 사이, 근처에 있던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이다!”
“어서 포위해!”
사나운 외침이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고 그보다 더 매서운 쇄겸도(鎖鎌刀)들이 정광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사라졌던 정광이 포위망 밖에서 나타났다.
전륜보(轉輪步).
무인들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거칠게 질주했다.
수라도(修羅刀).
소름이 끼칠 만큼 짙은 마기를 품은 도가 바람을 가르며 귀곡성을 토했다.
“끄아아악!”
그것에 휩싸인 무인들은 대응할 새도 없이 갈가리 찢어졌다.
촤아악-
정광은 도를 가볍게 내려쳐 핏물을 털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벌컥!
건물마다 문이 활짝 열렸다.
거대한 강노(强弩)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 팔뚝만큼 굵은 화살들을 세차게 쏘아냈다.
정광은 그것들이 지척에 이르러서야 움직였다.
마환공(魔環功).
적수공권으로도 병기로도 펼칠 수 있는 무공.
정광의 도가 광포하게 원을 그렸다.
그 원에 부딪힌 화살들은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그중 일부는 강노를 쏘아낸 자들을 꿰뚫었다.
빈틈을 노려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무인들이 경악했다.
‘전륜보와 수라도에 마환공까지!’
‘총단 고위직이나 익히는 신공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쓰다니!’
그들은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정광이 들이닥쳐 살육을 벌인 것이다.
예리하게 잘린 사지가 허공을 날고 박살 난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바닥을 적셨다.
정광은 건물에 있던 모든 자들을 숨 몇 번 들이쉴 사이에 해치우고 다른 건물로 향했다.
이런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됐고 마지막 건물에 이르렀을 땐 그곳에 있던 자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아, 악마다!”
“악마가 쫓아오, 커억!”
정광은 바닥에 쌓여 있는 화살을 집어 던져 한 놈, 한 놈 착실하게 죽였다.
결국 홀로 우뚝 서게 된 정광은 그제야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려니 피곤하네.”
아직 끝난 상황이 아니었다.
건물마다 들어가 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한 곳에서 비밀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고리를 잡아당기자 바닥이 열렸다.
작은 방이 드러나며 침상에 누워 있는 훤칠한 노인이 보였다.
기억 속에 있는 얼굴.
귀곡자였다.
정광은 훌쩍 뛰어내려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네.’
고문을 당한 흔적이 몸 곳곳에 있었지만 생명까지는 위험하지 않게 제대로 치료돼 있었다.
‘빨리 뜨자.’
의식을 잃어 늘어진 자보다 깨어 있는 사람이 가볍기 마련.
귀곡자가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다.
짝!
“일어나.”
짜작!
“이놈이 다시 게을러졌나. 왜 이렇게 처자?”
짜자자작!
“이게 진짜. 옛날처럼 다뤄줄까?”
뺨을 때린 덕인지 협박을 한 덕인지.
“으으…….”
귀곡자가 천천히 눈을 뜨고 정광을 올려다봤다.
그는 초점이 잘 안 잡히는지 진물 맺힌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다가 힘없이 물었다.
“누, 누구…….”
“네 주인.”
“……무어라? 크윽.”
귀곡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일으키다가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가지가지 하네.”
정광은 귀곡자를 잡아 침상에 부드럽게 내려놓고 수혈을 짚었다.
그리고 빤히 내려다봤다.
‘나 외의 다른 놈한테 맞아서 이런 꼴이 되다니.’
보면 볼수록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일단 푹 자라.’
깨어 있으면 뭐 하나, 몸이 이렇게 약해진 상태라 중심을 잡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귀곡자가 맞는지 목소리까지 확인했으니 됐다.
이대로 떠나 치료한 뒤 밥을 잘 먹이고 요양시키면 나아지리라.
‘슬슬 가볼…… 응?’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위로 뛰어올라 비밀 문을 닫았다.
‘뭐 이렇게 빨리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조여오는 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 둘러보니 모두 극랍염가 무인들이었다.
그들 중 한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정광에게 얌전히 있다가 떠나라고 경고했던 염소광이었다.
그의 입에서 쇠가 부딪히는 듯한 거슬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멸혼생사투가 끝나 인원을 증원하고 살펴보려고 왔거늘. 마침 딱 맞춰 왔구나.”
“그러게.”
“처음 보는 얼굴이군. 네놈은 누구냐?”
정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히 외쳤다.
“알아서 뭐 하게?”
“이런 고얀 놈이 있나. 당장 살점을 발라 소금에 절여 육젓을…… 음?”
염소광의 한쪽 입꼬리가 불쑥 올라갔다.
“크흐흐흐. 네놈이었군. 원래도 역용하고 있더니 또 얼굴을 바꾼 건가?”
“넘겨짚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진혼! 네놈은 진혼 아니더냐!”
염소광은 정광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도, 검, 그리고 새카만 죽적(竹笛). 한번 봤는데도 못 알아보면 바보천치지.”
“저런. 바보천치가 맞는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든다고 했던 건 취소하마.”
염소광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네놈의 정체는 뭐냐? 배후에는 누가 있고?”
“나는 나고 혼자야.”
“아직도 말장난을! 왜 귀곡자를 데려가려는 것이지?”
“주위를 둘러봐. 노인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잖아. 네가 그런 취급을 당하면 좋겠어?”
“…….”
염소광은 정광을 쏘아보다가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거봐. 너도 잠깐 있었을 뿐인데 벌써 정신이 이상해지지? 어서 돌아가. 배웅은 안 할게.”
염소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마.”
“나는 죽일 건데.”
정광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염가 무인들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너희 전부 말이야.”
“쳐라!”
염소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인들이 암기를 던졌다.
정광은 아까 화살을 상대했던 수법으로 수많은 암기들을 남김없이 쳐냈다.
상당수의 무인이 고꾸라지자 염소광은 이를 갈았다.
‘어떻게 마환공을! 반드시 잡아서 정체를 밝혀주마!’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치자 무인들이 쇄겸도를 뽑아 정광을 향해 겨눴다.
그리고 천천히 전진했다.
포위망이 점점 작아지며 정광을 압박했다.
정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암왕산보(暗王散步).
여유롭게 공간을 헤집으며 도격을 날렸다. 그때마다 병기가 잘리고 시체가 늘어났다.
하지만 염가가 자랑하는 진법으로 만든 포위망은 단단했다.
사람이 쓰러져도 와해되지 않았다.
빈자리는 뒤에 있던 또 다른 자가 바로 채우며 계속해서 조여왔다.
정광은 도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왼손으로 참살마수(斬殺魔手)까지 펼쳐 적들을 찢어발기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은근히 눈에 밟히네.’
곤륜을 공격하느라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다 해도 칠대가문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극랍염가의 저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원군이 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빨리 해치우고 떠나야 했는데…….
귀곡자의 몸에 새겨진 고문 흔적들이 계속 떠올랐다.
‘계획 수정이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조금 요란하게 놀아보기로 했다.
‘오고 있으면 어차피 오는 중이니 ‘그걸’ 보든 안 보든 똑같을 거고. 아직 출발 안 했으면 거리가 있어 꽤 걸릴 테니 시간은 충분해.’
뜻이 세워지자 몸이 움직였다.
마기로 온몸을 두르고 한쪽으로 쇄도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조리 베거나 으깨며 끊임없이 나아갔다.
포위망이 넓어지며 자연스레 그쪽으로 이동했다.
염소광도 그쪽으로 움직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다고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
정광은 내심 웃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 없었는데.
너희 전부 죽일 거라 했잖아.
그리고 선물로 줄 게 있거든.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뺀 뒤 힘껏 휘둘렀다.
화섭자가 유성처럼 날아가 흑유(黑油)를 퍼 올리는 시설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길이 솟구쳤다.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일어나 회색빛 하늘을 까맣게 물들였다.
염소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미, 미친! 흑유에 불을!’
내 대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오래전 전대 진천마가 불을 싸지른 이후로 처음 당하는 치욕 아닌가!
불길을 잡으려고 그렇게 애썼으나 도저히 감당이 안 돼 포기했고, 한 달이 지나서야 저절로 꺼졌다고 들었거늘 또다시 이렇게 되다니!
‘어떻게든 해봐야 해!’
식솔들에게 즉시 명을 내렸다.
일부는 불을 끄러 달려갔고 나머지는 정광을 포위했다.
염소광도 직접 진 안에 들어가 정광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저렇게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니 본가에서도 볼 수 있을 거다.”
“그렇겠지.”
“우리는 네가 빠져나가지만 못하게 하면 돼.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지금 오고 있는 애들은 없다는 얘기네.”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간이 충분한걸. 일이 더 편해졌어.”
“무슨 말이냐?”
“근방에 아무도 없을 테니 편하게 가려고.”
지금껏 했던 것처럼 드잡이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황궁무고에서 가지고 나와 계속 허리춤에 찔러 넣고 있던 이척(二尺)도 안 되는 길이의 새카만 죽적(竹笛).
마적(魔笛)을 뽑아 들고 마혼(魔魂)을 개방했다.
마혼을 밀어 넣자 마적의 시커먼 표면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번들거렸다.
그 끝부분에 입술을 대고 힘주어 불었다.
전생에 작곡한 마라팔곡(魔羅八曲) 중 제삼곡(第三曲).
중단전에 마(魔)를 품은 자라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강요하는 만마굴복(萬魔屈服)이었다.
끼이이이아악-
마혼을 들이마신 마적이 그것을 증폭시켜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토해냈다.
마귀성에서 간간이 들을 수 있는 기괴한 바람 소리가 아니라 진짜 마(魔)가 담긴 소리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주위를 휩쓸며 정광의 의지를 전했다.
그러자 정광의 품속에 있던 역천경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우웅! 우웅!
정광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망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