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3화
쯧쯧. 귀곡자도 안됐네.
아침이 되자 정광 일행은 분주히 움직였다.
먼저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객잔 후원으로 나가 섬랑의 수련을 도왔다.
섬랑은 언제나 그랬듯이 관엽과 비무를 하다가 비명을 질렀다.
“악! 너무 심하잖아요!”
“생사투에서도 그렇게 지껄일 것이냐?”
“비무니까 이러죠!”
“그럼 생사투처럼 해야겠군.”
“잠깐! 농은 적당히, 으악!”
관엽은 더 거세게 몰아붙였고 섬랑은 얼마 안 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호시탐탐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자오가 재빨리 일으키며 조언했다.
“마음이 급해지니 손발이 너무 어지러워졌어. 묵영보를 계속 펼치며 병기를 제대로 활용해야지.”
“묵영보야 그렇다 치고 쌍단봉은 어떻게 쓰라는 말씀이에요?”
“네 봉법은 단주께서 창안하시고 네게 전수하신 것이라 내가 그 진체를 알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활용법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단봉이니 접근전을 해야 하고 쌍봉이니 공수를 동시에 행해야지. 왼손과 오른손을 제각각…….”
섬랑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저, 혈조. 말씀 끊어서 죄송한데요. 그냥 시범을 보여주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아! 듣고 보니 그렇군. 직접 펼치면서 말해주마.”
“아니, 그게 아니라…….”
섬랑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관엽과 비무를 한 뒤 자오의 시범을 보고 익히며 끝없는 수다까지 견뎌야 했다.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됐다.
나민은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과한 면은 있지만 두 사람 다 괜찮은 스승이야.’
제자도 뛰어났다.
그 증거로 섬랑은 그 짧은 시간에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조언을 해주기로 했건만. 내가 낄 자리가 없어 보이는구나.’
굴러들어 온 돌인 데다 아직 일행에게 신뢰를 얻지도 못한 상황.
생사투 당일에나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다.
어느 정도 입을 풀어 만족한 자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가만히 계시오?”
“저 말입니까?”
“그렇소. 섬랑에게 조언을 해주기로 하셨었잖소?”
“두 분이 훌륭히 지도하고 계셔서 그럴 생각을 못 했습니다.”
자오가 손사래 쳤다.
“관 숙수야 그렇겠지만 나는 아니오. 나보다 소저의 가르침이 섬랑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십니까?”
자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저가 섬랑을 돕겠다고 했을 때 단주가 그래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 당연한 일인데.”
“…….”
“혹시 우리가 불편해서 나서지 않은 것이면 그럴 필요 없소. 소저도 단주를 따르게 됐으니 우린 한 식구나 마찬가지외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
나민은 자오를 물끄러미 보다가 관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도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오직 섬랑만 도리질을 치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나민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텃세 따위 없이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다니.
자오도 관엽도 진혼을 굳게 믿기에 이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사양할 필요 있나.
거저 얻은 신뢰를 기회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행에 녹아들어야 했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자오와 관엽에게 예를 취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민의 잔소리가 시작되고 시커메졌던 섬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오, 오늘만 버티면 어떻게든…….’
이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음 날도 그랬다.
그리고 그날 저녁.
민현유가 정광의 방에 들어왔다.
이틀 내내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던 정광은 민현유의 굳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직 못 찾았나 보네.”
“죄송합니다.”
“그 말을 하러 온 건 아닐 거고. 멸혼생사투 삼차 예선 참가자들이 전부 도착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아왔습니다.”
민현유가 서류를 건넸다.
정광은 그것을 받아 훑어보며 치하했다.
“내일부터 시작이니 늦진 않았네. 수고했어.”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건도 늦지 않게 해내겠습니다.”
“그러는 건 좋은데.”
정광은 가볍게 주의를 줬다.
“그거 하느라 바빠서 빈틈을 보이면 안 돼.”
“무슨 말씀입니까?”
“너도 멸혼생사투를 보러 가야 한다고. 세작이 발각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와 다르게 행동하면 극랍염가(克拉閻家) 애들이 의심할 게 뻔하잖아.”
극랍염가는 자신들의 일꾼을 구워삶아 귀곡자에 대한 정보를 빼낸 주체가 누구인지 찾고 있을 터.
향리객잔 역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조심하란 얘기였다.
“이해했지?”
“네, 대인.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좋아. 내일 보자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민현유가 모아온 정보를 정리해서 대응법을 짜고 섬랑에게 알려줬다.
섬랑은 벽안을 반짝이며 듣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차 예선보다 수준이 높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하네요.”
“너도 더 강해졌으니까 엄살 부리지 마.”
섬랑이 어깨를 펴고 기합을 질렀다.
“합! 당연한 말씀!”
정광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뒤 나민을 향해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소저. 얘 좀 살려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섬랑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으나 정광의 표정은 밝아졌다.
“믿을게요. 슬슬 출발하죠.”
정광 일행은 재물이 가득 실린 마차들을 끌고 객잔을 나섰다.
은밀히 지켜보고 있던 눈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멸혼생사투가 열리는 극랍염가 대장원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그곳 사람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염가 특유의 짙은 청의를 걸치고 허리에 쇄겸도(鎖鎌刀)를 찬 노인.
정광이 아는 자였다.
‘현 태상가주 놈의 동생이잖아. 아직 살아 있었네. 이 녀석이 왜?’
성품이 꽤 괴팍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했다.
“네가 진혼이냐?”
“그런데요.”
“듣던 대로 버릇이 없구나. 마음에 들어.”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요즘 것들은 하나같이 여리기 짝이 없어서 네가 더 돋보이는 게야. 나는 염소광이라고 한다.”
“네. 무슨 일이시죠?”
“이곳에선 소란을 피우지 말아라.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가. 그게 너희들에게도 좋을 게다.”
“저런. 헛소문을 들으시고 지레짐작하신 것 같네요.”
정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을 변호했다.
“제가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어요. 전부 정당방위였다고요.”
“도박판을 휩쓸며 수많은 사고를 쳤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 헛소문이란 말이냐?”
“진실도 눈곱만큼은 섞여 있겠죠.”
“막무가내로 부정하지는 않는 걸 보면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 아는 것 같구나. 하긴. 그러니 아직 살아 있겠지.”
염소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표현을 조금 바꿔 말해주마. 적당히 놀다가 가. 단, 본가에 적대적인 행위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도박은 해도 된다는 말씀이죠?”
“멸혼생사투는 교의 후계를 정하는 중요한 행사지. 더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기도록 큰 도박을 허용하는 것인데 무슨 명분으로 말리겠느냐?”
“막무가내는 아니셔서 다행이네요. 그럴게요.”
“무어라? 크하하하!”
염소광은 대소를 터뜨리다가 정광을 노려봤다.
“한 치도 밀리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어르신도요.”
“너를 죽이면 무척 즐거울 것 같지만 아깝기도 하겠지. 할 말은 다 했으니 알아서 해라.”
“네. 조심히 가세요.”
염소광은 신법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광도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조용히 따라오던 민현유가 나직이 물었다.
“대인. 우리를 의심해서 경고한 것일까요?”
“글쎄. 가문에 세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를 다른 곳에 보내 지키고 있는 와중에 쓸데없는 소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응. 그러는 게 나을 거야.”
정광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고 섬랑의 승리에 집중해 주세요.”
모두 호기심이 솟았지만 어쩔 수 있나.
알겠다 답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극랍염가 대장원 앞에 있는 공터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집중됐다.
“아! 저자가 진혼인가?”
“황금 마차들을 끌고 다닌다더니 과연!”
“잠깐만 길을 틔워주시오! 도신(賭神)이 오셨소이다!”
“대인! 어서 오십시오! 모든 준비를 끝내놨습니다!”
정광을 모르는 이는 감탄했고 아는 자는 환호했다.
얼마 안 가 염가 무인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생사투가 시작됐고 정광은 연전연승했다.
“역시 진혼이구나!”
“정말 대단하이!”
정광에 대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그런지, 도박에서 졌다고 판돈을 강탈해 도망치려는 미친놈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섬랑이 싸울 차례가 됐다.
상대는 상당한 강자였는데 섬랑은 그에 맞는 대응법을 숙지한 상태였는데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망할! 뭐가 이렇게 빨라?’
손발이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자오가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섬랑이 형편없이 밀리는 걸 보다 못한 나민이 전음을 보냈다.
-상대를 잘 관찰하라고 했잖아! 그 아이는 무리해서 너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야! 허장성세에 속지 말고 시간을 끌어야지! 보법을 펼쳐 피해! 비무대를 넓게 쓰라고!
‘……!’
섬랑은 본능적으로 나민의 지시를 따랐고 그 덕에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빌어먹을. 수련하는 동안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손으로 귀를 막기까지 했었는데…….’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신 차리자! 오늘은 이렇게 됐지만 내일도 이럴 순 없어!’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 있나.
삼차 예선은 수준이 달랐다.
섬랑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궁지에 몰려 허우적대다가 나민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승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를 관찰하고 싸웠으나 여전히 조금 모자라 나민의 전음을 듣고서야 이기게 됐다.
섬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망할! 이래서야 계속 잔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잖아!’
나민은 내심 감탄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구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
섬랑은 더 죽어라 수련하리라 맹세했고 나민은 더 많은 걸 가르쳐 주겠다고 다짐했다.
자오와 관엽은 나민의 능력에 크게 놀랐다.
단영은 전장 사업에 대한 논의가 잘 안 되는지 골치가 아파 보였으나 섬랑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리고 정광은 많은 돈을 벌고 계획을 수정했다.
‘역시 무리였나. 귀곡자는 나중에 구해야겠네.’
민현유는 며칠 전부터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고 오늘 역시 그랬다.
귀곡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못 찾아서 그러는 것이었다.
“현유.”
“네, 대인.”
“염가에서 좋아하겠어. 정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으니까.”
정광은 힘주어 명했다.
“내일 아침 떠난다. 다음 장소로 가야 해.”
민현유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모든 것이 바뀌었다.
“대인.”
“문 좀 두들기고 들어오라니까.”
“죄송합니다.”
“표정이 좋아졌네. 찾았어?”
민현유는 자신 있게 답했다.
“네.”
“어딘데?”
민현유는 한 장소를 말했고 정광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라고? 하여간 취향하고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전생에 그랬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야 있나.
“몇 번 들어봤어. 쯧쯧. 귀곡자도 안됐네. 나이 많은 노인이 있기에 좋은 곳은 아닌데.”
“대인, 이제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정광은 씩 웃었다.
“예정대로 내일 아침에 떠나야지.”
“…….”
“표정하고는. 네가 준비할 게 있으니까 잘 들어.”
정광의 말이 이어지고.
민현유는 눈을 빛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힘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으니까 내일 아침은 더 맛있는 것들로 내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정광은 일 층으로 내려가 민현유를 불렀다.
“준비됐지?”
“요리도, 그 준비도 끝났습니다.”
“좋아. 일단 먹자.”
정광은 열심히 배를 채우며 일행에게 오늘 할 일을 설명했다.
“드시면서 들으세요.”
자오와 관엽은 눈을 빛내며 들었으나 섬랑과 나민은 입을 떡 벌리고 기침을 토했다.
‘아무리 대인이라 해도 그렇지. 그게 가능해?’
‘이런 자신감이라니. 혈조와 독비귀도의 표정을 보면 당연히 해낼 거라고 믿는 것 같은데 그게 정말 될까?’
잠시 뒤, 염가 장원에서 묵었던 단영 무리가 짐을 챙겨왔다.
“혈조.”
“네, 단주.”
“다시 말하기 피곤하니까 대신 좀 해주세요.”
“맡겨주십시오.”
자오는 정광이 했던 말을 늘어놨고 단영과 흑서는 살짝 놀랐다가 금방 수긍했다.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자. 그만 가죠.”
그들은 커라마이에서 나와 남서쪽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기에 정광을 따라다니던 전주들도 마인들도 없는 상황.
정광은 흑서를 역용시켜 자신처럼 보이게 만든 뒤 자신의 얼굴도 다른 것으로 바꿨다.
그리고 홀로 북동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귀곡자가 구금되어 있다는 곳.
마귀성(魔鬼城)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