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2화
일단 구한다 치고
정광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며 눈에서 일렁이던 마기를 씻은 듯이 밀어냈다.
‘귀곡자 녀석. 어쨌든 살아 있다는 거네.’
그거면 됐다.
온갖 고초를 다 겪었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 아닌가?
‘이 정보가 잘못된 것일 확률은 극히 낮아.’
민 씨 일족이 경영하는 향리객잔은 신강 전역에 자리 잡은 조직이었다.
이런 큰 사업체는 소모하는 물품과 인력이 많은 만큼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그들에게서 들어온 수많은 정보를 거르고 걸러 검증한 끝에 나온 결론일 테니 믿을 만했다.
‘내게 굳이 이런 얘기를 한 이유도 뻔하지.’
그래도 확인해 봐야 할 터.
일행에게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자고 한 뒤 민현유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를 구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이니 대인께서도 아실 것 같습니다만.”
“떠보지 말고 네가 말해.”
민현유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저희 일족이 이렇게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귀곡자 그분이 전대 교주께 청해 키워주신 덕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럼 직접 구해야지. 왜 내게 흘려?”
“그럴 능력이 없어서입니다.”
“나는 능력은 있지만 괜히 땀 흘릴 이유가 없는데.”
정광이 빙글빙글 웃자 민현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진 가짜였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껏 대인의 행보를 지켜본 결과 묵영권가의 무공만 수련하신 게 아니라 전대 교주님의 진전을 이으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흥미로운 생각이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대 교주님의 충신이었던 그분을 모르는 척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흐음. 꽤 일리가 있어.”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민현유를 노려봤다.
“헌데 네 말이 거짓이면 어쩌지?”
“제가 함정을 파서 대인을 해치려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시는 겁니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잖아.”
전생이 끝나고 현생이 이어진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쓸모가 있어 이용하고 있지만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시간 동안 민 씨 일족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래서 정광의 진체를 아는 단영 같은 이도 향리객잔 도련님인 민현유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우려하지 않았던가?
“그렇긴 합니다만.”
민현유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모았다.
“제가 대인께 이런 부탁을 드린 건 전대 교주님의 진정한 계승자이신 것 같아서입니다. 귀곡자께서 폐가에 큰 은혜를 베푸셨지만 전대 교주님께서 내리신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헌데 그런 분의 후인을 제가 왜 해치려 들겠습니까?”
“그럴듯하네.”
정광은 수긍하며 민현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거짓이면 죽는다. 너뿐만 아니라 네 일족 전부.”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핏줄은 핏줄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외가 쪽 녀석이어서 어느 정도 사정을 봐줬으나 자신을 속여 위해를 가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민현유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억지로 참으며 장담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정확히 어디에 구금돼 있는지 알아?”
“거기까진 모릅니다.”
“알아내.”
민현유의 눈이 빛났다.
“구해주실 겁니까?”
“봐서. 나는 전대 교주의 후인이라고 말한 적 없어.”
“그 건에 대해선 앞으로 함구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응. 수고.”
정광은 민현유와 함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며 생각했다.
‘이 녀석에게까지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지.’
단영 같은 이들이야 주종관계니 큰 상관은 없으나 민 씨 일족과는 혈연으로 묶여 있었다.
목표했던 일이 끝나면 바로 떠나야 했다. 계속 함께하지 못할 바엔 끊어졌던 연을 다시 이어봐야 좋을 게 없으리라.
일행에게 다가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만 가죠.”
그들은 정광과 민현유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않고 말에 올랐다.
마침 뒤늦게 따라온 전주들과 마인들이 합류했다.
커라마이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극랍염가(克拉閻家) 무인들은 빡빡하게 굴지 않았다.
정광이 신분을 밝히자 묘한 눈빛을 흘리며 쳐다보다가 정해진 절차를 거친 뒤 통과시켰다.
단영이 정광 옆에서 말을 몰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 대한 소문을 들은 표정이더군.”
“네.”
“그런데도 쉽게 들여보내 줬어. 이곳에선 편하게 있다가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정광은 단영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앞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염가(閻家)로 가실 거죠?”
“그래야지.”
“저희는 향리객잔으로 갈게요. 흑조, 소가주님을 잘 부탁해요.”
흑서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애송이를 또 지키라고?
절대 싫었지만 감히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존.
-너, 방금 눈썹 꿈틀거리더라.
-헉! 기, 기분 탓이시겠지요. 최선을 다해 호위하겠습니다.
정광 일행은 단영 무리와 헤어져 향리객잔으로 갔다.
민현유가 앞장서 들어가니 점소이들이 담담히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본 객잔에 처음 오신 것 같은데…….”
“하던 대로 해.”
“네, 도련님.”
“번거로우니까 다른 지점에도 그렇게 대하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정광 일행은 계단을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점소이들이 넣어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씻은 뒤 일 층에서 모였다.
정광은 의자에 앉자마자 점소이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응. 현유는?”
“급히 알아볼 일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귀곡자가 어디에 구금되어 있는지 정보를 얻으러 나간 것이 분명했다.
“열심이네. 저녁 식사 준비해 줘.”
“알아서 올릴까요?”
“응. 잘 부탁해.”
자오가 알아서 은자를 건넸고 점소이는 예를 표한 뒤 주방으로 사라졌다.
정광은 일행을 둘러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섬랑은 열심히 수련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물론이죠, 대인.”
“관 숙수와 혈조는 섬랑을 도와주세요. 현유가 멸혼생사투 참가자들에 대해 알아오면 제가 대응법을 짜서 알려 드릴게요.”
“알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주.”
정광은 손뼉을 치고 두 손을 비볐다.
“자. 요리와 술이 곧 나올 테니 실컷 즐기죠.”
나민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정광이 아무런 언급도 안 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진혼.”
“네, 소저.”
“제게는 임무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 여기까지 오는 여정을 관리 감독하느라 힘드셨잖아요. 며칠 푹 쉬시며 힘을 비축하세요.”
“저는 괜찮…….”
“그냥 쉬세요. 생사투 당일 소저의 힘이 필요해요. 이번엔 제가 섬랑을 신경 써서 봐주지 못할 것 같거든요.”
나민은 정광의 말을 이해했다.
너는 섬랑이 상대할 아이들을 그 능력으로 판별해야 하니 그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하라는 의미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삼차 예선에선 섬랑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다른 할 일이 있다는 얘기인데…….’
대체 무엇일까?
아까 민현유와 단둘이 나눴던 대화와 관계된 일인 듯했는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차. 쓸데없는 의문을 또 품다니.’
이럴 때가 아니었다.
능력을 갈고닦고 최선을 다해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진혼. 허나 그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으니 섬랑이 수련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며 조언을 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좋죠. 수련 당사자도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네요.”
섬랑은 앞으로 쏟아질 나민의 잔소리를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 대인. 그게 아니라…….”
“너무너무 좋다고? 일단 먹자.”
점소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요리와 술을 날랐다.
정광은 적당히 배를 채운 뒤 방으로 올라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따뜻해서 좋네.’
향리객잔 커라마이 지점의 난방은 훌륭했다.
‘흑유(黑油) 덕분이겠지.’
커라마이는 신강 대부분이 그렇듯 유오이족(維吾爾族)과 여러 민족이 뒤섞여 있었는데 유오이족 말로 검은 기름이라는 뜻이었다.
그 기름을 이용해 불을 때니 방이 뜨끈뜨끈할 수밖에.
정광은 스르륵 밀려오는 잠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민현유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광은 눈을 뜨고 일어나 그를 타박했다.
“문을 최소한 한두 번은 두들기고 들어와야지.”
“어차피 제가 온 걸 아실 텐데 뭐 하러 그럽니까?”
“어차피 내가 너를 때릴 테니, 너는 지금 당장 자해를 해야 하고 말이지.”
“농을 할 때가 아닙니다, 대인.”
“무슨 일이길래 그래?”
“커라마이 지점에서는 오래전부터 귀곡자 어르신이 구금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자신했겠지. 일이 꼬였나 보네.”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민현유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염가에서 일하는 일꾼을 구워삶아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는데 그 일꾼이 며칠 전에 사라졌답니다.”
“걸려서 죽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꼬리는 밟히지 않았고?”
“혹시 몰라 몇 다리 건너서 접촉했었고 그 덕에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꼬리는 즉시 피신시켰으니 발각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인데. 그래서? 그게 끝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 세작이 사라진 날, 염가 장원에서 마차 한 대가 나왔다고 합니다. 한밤중인데도 두꺼운 천으로 창문을 가려 누가 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귀곡자가 실려 있었을 거다, 이거네.”
“혹시 혼란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기에 며칠 동안 은밀히 감시했는데 다른 수상한 행동은 없었다 하니 그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장원에 그대로 두고 빼낸 척했을 가능성은?”
민현유가 단언했다.
“다른 세작이 또 있는데 귀곡자 어르신이 확실히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세작을 둘씩이나. 돈 좀 썼구나. 그 마차의 종적은 찾았고?”
민현유의 미간에 생긴 골이 더 깊어졌다.
“상당한 고수들이 호위하고 있어서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북서쪽으로 갔다는 것밖에는…….”
“여기보다 더 황량한 쪽이잖아. 거기에 뭐가 있다고.”
“일단 그쪽을 살피는 한편 다른 쪽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중간에 방향을 바꿨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정광은 벽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자. 교주가 왜 귀곡자를 죽이지 않고 염가에 보냈을까?”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어서겠지요. 염가가 교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고 고문 기술도 대단하니 그랬을 겁니다.”
“교주가 아니라 마뇌가 보냈을 수도 있지. 귀곡자와 함께해 온 세월이 있으니 가까운 곳에 두고 고문하기엔 마음이 켕겼을 거야. 자, 여기서 문제.”
정광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귀곡자가 숙청된 지 이십 년이 넘었어. 근데 아직도 입을 안 열었다고? 그게 뭘 의미할까?”
“그만큼 의지가 굳건하시거나 고문이 약한 편인 것 같습니다.”
“뒤엣것은 정말 말도 안 되지. 고문을 하면 제대로 하지, 살살 할 리가 없잖아. 뭐, 나이가 있으니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가며 그 짓을 하고 있겠지만.”
“그럼 앞엣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정광에게 오랫동안 단련되어 웬만한 고통은 하품을 할 정도로 면역이 된 귀곡자였지만 이십 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비밀이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건가?’
정광의 눈이 빛났다.
‘그럼 앞으로도 버틸 수 있겠네? 천천히 해도 되겠어.’
섬랑이 삼차 예선을 통과하면 바로 떠나야 했다.
그때까지 귀곡자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와서 처리할 수밖에.
“현유.”
“네, 대인.”
“일단 찾아봐.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을 거야.”
민현유는 바로 이해했다.
“너무 멀면 일이 생겼을 때 달려가기 힘들고 가까우면 불안하니 그럴 거란 말씀이군요.”
“그래.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이 많은 곳에 뒀다가 발각됐으니 이번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보냈을 수도 있어.”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경계를 강화했을 거야. 최근 며칠 사이에 갑자기 사라진 고수가 있는지, 그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아봐. 곡식이나 면포 같은 생필품이 평소보다 많이 움직인 곳이 있으면 거기도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대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주셔서 예를 표한 것입니다.”
“적극적이라니. 아주 잘못 알고 있어.”
정광은 냉정하게 선언했다.
“삼차 예선이 끝나면 바로 떠날 거야. 그 전에 찾아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다가 발각되진 말고. 정 안 되면 내가 나중에라도 손을 쓸게.”
“…….”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안 되면 내가 나중에 처리하마.
정광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민현유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의문을 표했다.
“대인께선 전대 교주님의 후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 건에 대해선 앞으로 함구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민현유는 실수를 깨닫고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두 번은 없어.”
정광은 차갑게 경고하고 설명했다.
“귀곡자가 지키려고 하는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런다. 아, 이거부터 확실히 하자.”
“말씀하십시오.”
정광은 싱긋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일단 구한다 치고. 귀곡자는 내 거야. 불만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