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1화
운치
전생의 정광에게는 두 개의 뇌가 있었다. 세간에서는 쌍뇌(雙腦)라고 칭했는데 일반 교도 출신인 마뇌(魔腦)와 명문가의 자제 귀곡자(鬼谷子)가 그들이었다.
둘은 애초의 신분이 달라서 그런지 성향도 극명히 달랐다.
정광이 먼저 만난 건 마뇌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올라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역용을 하고 암행을 나갔었다.
총단 밖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하려고 했던 것인데 우연히 노상 반점에서 술에 취해 현 정국을 논하는 왜소한 청년을 보았다.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며 현실을 개탄했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뜻밖이었다.
식견이 꽤 있는 것 아닌가?
‘재밌는 녀석이네.’
흥미가 솟아 놈의 뒷덜미를 잡고 신법을 펼쳤다.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바닥에 내려놓으니 녀석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머리를 써서 살아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친절히 대해줬다.
“술은 깼어? 속은 괜찮고?”
“더, 덕분에…….”
“잘됐네. 내가 묻고 너는 답한다. 이걸 어기면 어떻게 될지 알아서 상상해. 이해했지?”
“무, 물론입니다.”
“좋아. 소교주가 반로환동 했으나 아직 위험이 가신 건 아니라고 떠들던데 구체적으로 말해봐.”
“……!”
청년은 술에 취해 입을 잘못 놀린 죄로 끌려왔다는 걸 깨닫고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눈치가 빨랐기에 자신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누가 쥐고 있는지 오롯이 이해하고 숨김없이 대답했다.
“자고로 궁지에 빠진 쥐는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지요.”
“군더더기 없이 가자.”
“죄, 죄송합니다. 소교주께선 원래도 강하셨는데 반로환동의 경지까지 오르셨습니다. 지금도 이러신데 시간이 더 흐르면 얼마나 강해지시겠습니까? 불충한 무리들은 딴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올 것 같은데?”
“내부의 힘만으론 벅차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테니 밖의 힘을 끌어들일 공산이 큽니다.”
“예를 들면?”
“급한 상황인지라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포달랍궁(布達拉宮)에 손을 벌릴 것으로 사료됩니다.”
“걔들이 받아들일까?”
“그렇게 봅니다. 세력을 넓히고 싶은 욕심에 오래전부터 본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놈들 아닙니까? 안팎에서 호응해 일을 벌일 수 있는 기회이니만큼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한다는 명분을 들고 몰려올…….”
“호오. 거기까지 봤어? 머리가 좀 돌아가네.”
“가,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네?”
“마침 내가 그 소교주거든.”
“……!”
정광은 두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는 청년을 내려다보며 역용을 풀었다.
요사스럽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나 차가운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빛났다.
“아까 뜻을 펼칠 기회가 없다고 한탄했지? 길을 열어주마.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말해봐.”
“……!”
길을 열어주마.
이 짧은 말이 청년의 가슴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에 한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귀가 먹먹해졌지만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오지 않는 기회에 좌절하면서도 묵묵히 머릿속에 그려왔던 방도를 온 힘을 기울여 설명했다.
“먼저 내부를 급히 단속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은 모조리 목을 치고 방비를 단단히 굳힌 뒤 포달랍궁의 공세에 맞서다가 기회를 노려 놈들의 수장을 소교주께서 암살…….”
“이런. 제법 쓸 만한가 싶더니 아니잖아.”
“……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모조리 죽이라고? 안 그런 놈이 어딨다고. 신강에 사람 씨가 마르겠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수비를 해? 갇혀서 피해만 쌓이잖아.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놈들을 쳐야지.”
“그, 그건 안 됩니다!”
청년은 목숨을 걸고 부정했다.
이대로 내쳐지면 영원히 밑바닥에서 구르다가 아무런 영화도 못 누리고 죽어버릴 터.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필생의 모험을 한 것이다.
“안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밖으로 나가시다니요. 총단에서 떠나시자마자 안팎에서 협공을 할 겁니다. 자고로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할 수 없다 했습니다. 소교주께서 아무리 강하셔도 너무 무모한 행동이란 말입니다.”
“한가락 하는 가문의 소가주들을 전부 데려가면 돼. 그러면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청년은 입을 떡 벌렸다가 탄성을 질렀다.
“아! 그들을 인질로 삼으면 되는 것이었군요!”
“인질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한 결사대.”
“……아! 스스로 자원한 결사대가 있으면 되는 것이었군요!”
“애쓴다. 그럼 이만.”
청년은 또다시 목숨을 걸었다.
정광의 한쪽 발목을 양팔로 부여잡고 애처롭게 애원했다.
“소교주님! 제발 저를 거둬주십시오! 이 머리로 소교주님을 보필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습니다!”
“솔직한 건 좋은데. 이거 안 놔?”
“차라리 저를 죽이십…… 억!”
“요놈 봐라? 밟아도 안 놓네. 이래도? 이래도 그럴 거야?”
“크악! 컥! 제, 제발 저를 거둬주십…… 아악!”
청년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끝끝내 양팔을 풀지 않았다.
정광은 한동안 청년을 밟고 걷어차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녀석이 제법이야.’
그걸 감안해서 패긴 했으나 그럴듯한 독종 아닌가?
‘경험을 쌓으면 나아지려나.’
한 번쯤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을지도.
기절해서 축 늘어진 청년을 내려다보며 별호를 지어줬다.
“너는 지금부터 마뇌다. 분에 넘치는 별호지만 기대해서 내려주는 것이니 그렇게 알아.”
마뇌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확실히 살렸다.
포달랍궁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정광을 훌륭히 보필했다.
‘그런데 한계가 있단 말이야.’
워낙 교활해서 잔머리는 잘 썼지만 넓고 길게 볼 줄 몰랐다.
더 많은 부귀영화를 갈구하는 탐욕스러운 성품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장기적으로 보고 내줄 땐 내주고 거둘 땐 거두는 걸 못해.’
날이 갈수록 싸우는 것도 머리를 쓰는 것도 귀찮아져서 거뒀거늘 반쪽짜리라니.
나머지 반을 채워야 했다.
‘어디 그럴듯한 놈 없나?’
면식이 있는 이들 중엔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원석을 찾을 수밖에.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머리 좋은 인재가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한 박락하가(博樂賀家)였다.
정문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깜깜한 밤에 몰래 숨어들어야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가주 녀석은 그냥 그랬고. 아우가 여섯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만 걸려라.’
그때, 한 중늙은이가 큰 전각에서 나왔다.
익히 아는 얼굴, 박락하가 가주였다.
‘집무실에서 나와 침소로 가는 건가?’
아니었다.
가주는 불이 꺼진 한 전각을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 등잔불을 밝히고 고성을 질렀다.
“네 이놈! 설마설마했거늘. 오늘도 벌써 자는 게냐?”
학창의를 입은 채로 침상에 누워 있던 훤칠한 청년이 눈을 떴다.
청년은 전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품을 했다.
“하아암. 아버님, 이 야밤에 무슨 일이신지요?”
“못다 한 일을 처리하다가 네 녀석이 또 퍼질러 자는 것 같아 열불이 터져 왔다!”
“밤이 깊었으니 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안 자도 괜찮고?”
“아버님은 가주 아니십니까? 저는 아무런 지위도 없으니 이 시간엔 자는 게 맞습니다.”
가주는 수염을 부르르 떨며 한탄했다.
“늦둥이를 낳았다고 좋아했던 게 후회스럽구나. 왜 그리 만사에 의욕이 없을꼬.”
“제 그릇을 알기 때문입니다.”
“네 그릇이 어때서? 본가에 너보다 똑똑한 이가 어디 있다고?”
“아. 얘가 박락하가에서 제일 뛰어난 인재야?”
“당연한 소리를 왜…… 헉!”
가주가 깜짝 놀라 신형을 돌렸다가 은신을 푼 정광을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소, 소교주께서 어찌 폐가에…….”
“인재를 찾으러 왔지. 둘 다 이리 와서 앉아. 편하게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하 씨 부자는 둘 다 정광의 명에 따랐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비는 아직도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나 아들은 평정을 회복했다는 것이었다.
정광은 흥미를 느꼈다.
“네가 막내구나. 이름이 뭐야?”
“하원의입니다.”
“못 들어봤어. 가주 얘기를 들어보니 제법 똑똑한 것 같은데 자신을 숨기고 있었나?”
“아닙니다. 하는 일이 별로 없어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까 네 그릇을 알아서 그렇다고 했지? 어떻길래 그래?”
하원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설명했다.
“머리가 좋은 편인 건 맞습니다.”
“부자가 그렇다고 말하니 믿음이 가네.”
“허나 무공에는 큰 자질이 없습니다.”
“딱 봐도 그래 보이긴 해.”
“야망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또 왜?”
“신강은 결국 힘이 지배하는 곳. 모사의 자리는 잘해봐야 두 번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를 대를 이어 체험해 온 가문에서 나고 자란 소인이 어찌 헛된 꿈을 꾸겠습니까?”
정광은 턱을 쓰다듬으며 하원의를 응시했다.
마뇌와 확연히 다른 성향의 녀석이었다.
좀 더 확인을 해봐야 뚜렷해지겠지만 아예 헛걸음을 한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봐.”
“무엇을 말씀입니까?”
“제일 큰 이유는 귀찮아서지?”
“…….”
정광은 하원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맞네. 능력 있는 아들이 이러니 가주도 힘들겠어.”
가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이해한다는 말이지. 만사가 귀찮아지고 있거든.”
“소, 소교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놀란 아비와 달리 하원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 대신 네가 귀찮아져라.”
“……네?”
“가주, 늦둥이는 내가 사람답게 만들어서 요긴하게 쓸 테니 안심하고 있어.”
“……네?”
정광은 하원의의 뒷덜미를 잡고 신법을 펼쳤다.
눈 깜짝할 새에 장원을 벗어났다.
짙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는 유성처럼 놀라운 속도로 황량한 들판을 질주했다.
이제껏 크게 당황하지 않던 하원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소, 소교주!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총단.”
“대, 대체 왜…….”
“별호를 짓는 중이니까 조용히 해.”
하원의는 입을 떡 벌렸다.
난데없이 납치해놓고 별호라니?
“좋아. 과한 감이 있지만 귀곡자(鬼谷子)로 하자. 마음에 들지?”
안 들면 어떡하려고?
상상하기도 싫었기에 얌전히 동의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
“그래. 그 별호에 걸맞게 일해야 해. 기대할게.”
그날부터 하원의는 타고난 게으름을 벗어던지고 새사람이 됐다.
다른 이도 아닌 소교주가 기대하겠다는데 어쩔 것인가?
‘살려면 어쩔 수 없어. 최선을 다해야 해.’
보통은 홀로, 때론 마뇌와 함께 일했다.
마뇌의 견제와 다른 성향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으나 정광의 폭력을 동반한 중재로 큰 마찰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허나 그러면 뭐 하나?
일 자체를 하기 싫은데.
‘쉴 틈이 없구나. 내 팔자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심경에 변화가 왔다.
정광을 가까이서 보필하다 보니 그 압도적인 무력과 지능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됐는데, 그런 대단한 초인이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인정하고 가끔은 칭찬을 던지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흐음. 사치품들을 풀어 골치 아픈 이민족들이 재물을 소모하게 하는 한편 분란까지 일으키도록 부추기자? 우리 귀곡자, 제법이네.”
“감사합니다, 소교주.”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이게 최선이야? 진짜 실망인데.”
“죄, 죄송합니다!”
“내가 직접 천리를 뛰어가 피땀을 흘리게 만들어놓고 죄송하다면 다야? 응?”
“바, 바로 수습을…… 억!”
그래도 고마웠다.
이 정도 주먹질쯤이야 예전에 비하면 훈훈한 봄바람 같지 않은가?
신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정광의 손속은 부드러워졌고 귀곡자의 충성심은 단단해졌다.
자연히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이 잦아지고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될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하원의는 정광을 위해 한 가지 안건을 올렸다.
정광은 가만히 듣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곡자, 요즘 심심한가 봐. 객잔 사업을 하자니, 제정신이야?”
“그렇습니다.”
“그냥 돈을 벌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정보를 긁어모으는 용도로 쓰려고?”
“바로 보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잖아. 신강은 내 것이 된 지 꽤 됐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교주님의 사후를 대비하는 것이옵니다.”
“아직 꽤 남았는데. 객잔들을 만들어서 누구한테 주려고?”
귀곡자는 한 조직을 언급했고 정광은 침묵했다.
정광의 눈치를 보던 귀곡자가 조심스레 설명했다.
“소교주님, 명예는 있으나 실권은 크게 없는 조직입니다. 이렇게라도 힘을 실어줘서 다른 이들이 꺼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소교주님을 위했던 분이 계셨던 곳 아닙니까?”
정광은 뒷머리를 긁다가 마지못해 그러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객잔들을 직접 운영할 순 없을 테고. 누구에게 맡길 건데?”
“소교주님의 외가인 민 씨 일족입니다.”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 함부로 구는 이들이 없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 우리 귀곡자, 많이 컸네.”
정광은 지나가듯 명했다.
“실행해.”
“객잔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요?”
정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향리객잔(香梨客棧).”
“……!”
“왜 눈을 동그랗게 떠?”
귀곡자가 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솔직히 말했다.
“소교주님답지 않게 운치 있는 이름을 지으셔서…… 억!”
정광은 귀곡자의 뒤통수를 때리고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운치는 무슨. 어머니가 아삭하고 단맛이 나는 향리를 좋아하셨어서 그런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