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29화 (428/569)

2부 158화

새 술은 새 부대에

정광은 장원에 들어와 정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도발했다.

“들어왔으니 빨리 뜨죠.”

나익승이 눈을 치뜨고 냉랭히 대꾸했다.

“어려서 인내심이 없구나.”

“젊어서 패기가 넘치는 거죠.”

“그래서 더 빨리 죽게 되겠지. 연무장으로 갈 테니 따라와.”

정광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여기가 마음에 드네요.”

몇 발자국 뗐던 나익승이 신형을 돌리며 인상을 썼다.

“문 앞이?”

“네.”

“이유는?”

정광은 한쪽 귀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잘 들어보세요.”

“무엇을 말이냐?”

“밖에서 들리는 소리요.”

장원을 둘러싼 담은 외부가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으나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멸혼생사투를 구경하러 왔던 마인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않고 싸우는 중이었다.

나가 무인들이 진정시키며 제지하려 했으나 워낙 흥분해서 말을 듣지 않는 상태.

담 너머에서 마인들이 괴성을 지르고 비명을 토하며 병기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익승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패였다.

“저 소리가 왜?”

“안에서 바깥소리가 들리면 바깥에서도 안 소리가 들리겠죠.”

나익승은 그 의미를 짐작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허튼수작을 부리면 밖에 알릴 수 있도록 이곳에서 싸우겠다, 이것이냐?”

“네? 그럴 속셈이셨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시 그렇죠? 깜짝 놀랐네.”

정광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제가 좀 살다 보니 뭐든 함께하는 게 좋더라고요.”

“적어도 백 년은 산 것처럼 지껄이는구나.”

“최소한 마음은 그렇죠. 안팎에서 각자 분투하는 소리를 들으면 힘도 나고 더 멋진 대결을 펼칠 수 있을 거예요.”

“웃기지도 않는 핑계를 대다니. 싫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객(客)이 믿고 방문했으면 주(主)도 어느 정도의 편의는 봐줘야죠. 안 그래요, 소가주님?”

나가 소가주가 아니라 단가 소가주에게 말한 것이었다.

단영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비무 참관인 관점에서 볼 때 자네의 청은 과한 게 아닐세.”

“그렇죠?”

단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익승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판단하기에 진혼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가주께서 양해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익승은 단영을 노려보며 차갑게 따졌다.

“저놈이 먼저 도발했고 제 발로 기어들어 왔네. 헌데 나보고 사정을 봐주라고?”

“어떤 마인이 스스로 호굴에 뛰어들어 비무를 청하겠습니까? 그것도 오로나가라는 명가에 말입니다.”

오래전에 죽은 진천마나 광인이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단영은 그 사실을 지적하며 결론을 지었다.

“참관인이 있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 점을 참작하면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으면 가르침을 주십시오.”

정광도 나익승을 압박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비무를 포기할 수밖에요. 그런데 이건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제가 밖으로 나가 경과를 설명하면 모두 누구 편을 들까요?”

연무장이나 정문 앞 공터나 무슨 큰 차이가 있다고.

다들 나익승이 속이 좁다고 욕하거나 연무장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 의심하며 정광의 손을 들어줄 게 뻔했다.

나익승은 어이없어하다가 살기를 일으켰다.

“참관인이 있어야 한다더니 장소까지. 그다음은 뭐냐?”

“식솔들과 합공만 안 하시면 돼요. 예를 들어 저분요.”

안쪽에서 땅딸막한 노인이 다른 노인들과 함께 놀라운 속도로 달려와 나익승 옆에 섰다.

“가주, 얘기를 듣고 급히 뛰어왔소. 저자와 정말 싸울 셈이오?”

“그렇소, 대원로.”

대원로는 육성이 아니라 전음으로 물었다.

-진혼을 봤을 때 내가 무어라 했소이까?

-강하다고 했소.

-그게 끝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척을 지지 않는 게 좋을 거라 하셨지.

-헌데 그 반대로 행동하고 계신 것 같소이다.

나익승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다른 길이 없었소.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타박하지 말고 저놈을 칠 준비나 하시오.

대원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합공을 하자는 것이외까?

-만의 하나를 대비하자는 말이오. 저놈도 혼자가 아니잖소?

단영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그림자에 은신해 있는 흑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원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멸문한 북천호가의 무공을 익혔다는 풍문이 들리던데…….’

본가가 아닌 방계 것이란 얘기가 더 많았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흑조는 기감을 최대한 키워 살펴봐야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대단한 고수였다.

‘저게 본 실력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얼마나 숨기고 있는지, 진짜 장기는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원로 몇 명을 데려왔으니 밀릴 일은 없겠지만 방심해선 안 될 상대였다.

‘흑조는 그렇다 치고.’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할 만큼 강한 무인, 진혼 이놈이 문제였다.

나익승이 가주 자리에 걸맞는 고수라곤 하나 한 배분 윗사람들 중에서도 최고수인 대원로만 할까.

대원로는 정광을 이길 확신이 없었는데 나익승은 가볍게 보고 있었다.

자연히 짜증이 치솟을 수밖에.

그래도 가주에 대한 예우로 억지로 삼키며 전음을 보냈다.

-알겠소, 가주. 흑조가 움직이면 우리가 막겠소이다.

-그것으론 부족하오.

-무슨 의미오?

-혹시라도 내가 밀리면 진혼 저놈을 치시오.

대원로의 눈꺼풀이 떨렸다.

-단영이 지켜보고 있소. 진심이오?

-소문이 퍼져 본가의 명예가 실추될까 봐 그러오? 단영이 입을 꾹 다물도록 협상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협상이 불발되면?

-살인멸구하면 되지.

나익승은 희미하게 웃고 대원로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가주. 단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전면전을 치러야 할 것이오.

-단가는 요즘 사정이 좋지 않소. 토로번손가가 최근에 원한을 품었으니 그들과 손을 잡고 치면 되는데 뭐가 문제요?

-…….

대원로는 남몰래 탄식했다.

‘전대 교주에 의해 깡그리 불탄 뒤 오랜 세월을 거쳐 간신히 복구한 힘이거늘. 이렇게 헛되이 소모하려고 하다니…….’

가주는 빼어난 능력을 갖췄으나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앞이 막막해졌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가 없구나. 진혼을 죽여야 해.’

대원로는 알겠다 대답하고 원로들을 제외한 식솔들은 다른 곳으로 보냈다.

부끄러운 꼴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나익승의 미소는 짙어졌고 대원로의 주름살은 더 깊게 파였다.

정광은 두 사람의 기색을 은근히 살피다가 내심 웃었다.

‘이것 봐라? 의견 충돌인가?’

전음으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전에 나익승이 말하길, 대원로는 사적으론 숙부고 공적으론 칼이라 했다.

자식들보다 더 믿는다고 했던 건 실력은 물론이오, 그 누구보다 나익승과 나가를 위하는 마음을 높이 사서 그랬을 터.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나익승보다 나가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재밌게 됐네.’

변수가 생겼는데 나쁜 쪽은 아니었다.

‘그럼 거기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하면 되지.’

수정은 순식간에 끝났고 실행만 남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이죽거렸다.

“가주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긴한 얘기는 끝나신 것 같은데 빨리하죠.”

나익승이 창을 들고 자루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땅이 울리고 그의 전신에서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솟구쳤다.

“와라!”

정광이 사양할 리 있나.

오히려 더 바랐다.

“삼초(三招)를 양보하시는 거죠?”

“내가 언제…….”

정광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 묵영도(黙影刀)를 펼쳤다.

귀기(鬼氣)가 풍기는 날카로운 도신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나익승을 핥으려 했다.

허나 당사자가 허락지 않았다.

두 손으로 창대를 잡고 회전시켰다. 창대와 칼날이 부딪혀 소름 끼치는 소음을 냈다.

정광은 뒤로 주르륵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너도 제법이다.”

“창이 좋다고요.”

“무어라?”

정광은 대답 없이 도를 내려치고 그었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나익승의 대응을 주시했다.

나익승은 뛰어난 고수답게 적절히 맞섰다.

웅혼한 찌르기로 거리를 벌리고 날카로운 베기로 접근을 불허했다.

오로나가 가주에 걸맞는 놀라운 무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광의 끝없는 공세에 질린 것이다.

‘제법 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도법과 보법을 비롯한 무공이야 그렇다 쳐도 어린놈이 내공까지 이렇게 뛰어날 수 있나.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고 만났으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늦기 전에 만나 다행이군.’

오늘 놓치면 평생 두 발을 뻗고 자지 못할 터.

반드시 죽여야 했다.

‘내공에 이점이 없으니 오래 끌어봐야 손해야.’

상대는 젊고 자신은 늙었지 않은가?

‘비기로 쓰러뜨려 주마.’

평생 자랑으로 여기는 연환기를 쏟아부으려고 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려 정해진 기맥으로 인도하는 그때!

나익승의 기운을 살피고 있던 정광도 비기를 펼쳤다.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

그의 의지가 나익승의 눈을 타고 들어가 뇌리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꼬마, 눈깔아.

‘……!’

너무나 시기적절하게 펼쳐진 지고한 마공에 나익승은 이지가 흐트러져 저도 모르게 눈을 깔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 이건!’

-예전엔 알아서 하더니 나이 좀 먹었다고 시위하네?

‘……!’

나익승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 공포에 질렸다.

‘지, 진천…….’

더 생각할 순 없었다.

비기를 펼치려고 끌어 올린 내공이 중완혈(中脘穴)에 이르는 순간, 날카로운 도신이 그곳을 꿰뚫고 들어와 진기를 흐트러뜨렸다.

한순간이나마 이지가 흔들리고 당황한 대가가 더 이어졌다.

도신이 배를 가르고 내려와 단전까지 부숴 버렸다. 도신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 오장육부를 울려 뒤집고 머리까지 치고 올라가 뇌를 뒤흔들었다.

쿠웅-

“쿨럭.”

칠공(七孔)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익승은 죽지는 않았으나 육신도 정신도 폐인이 되어버렸다.

고수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저, 저럴 수가!’

‘가주가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말릴 새도 없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켜보던 나가 원로들은 눈만 부릅떴는데.

대원로는 달랐다.

어느새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고 있었다.

정광은 나익승의 몸에서 도를 뽑아 살짝 기울였다.

붉은 핏물이 튀고 도면과 창끝이 충돌했다.

쩌엉!

대원로의 창에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지면을 단단하게 딛고 있던 정광의 두 발이 허공에 떴다.

정광은 받은 충격을 거스르지 않고 신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대원로가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그때!

정광이 의외의 대응을 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사자후를 토하듯이 외친 것이다.

“으악! 죽을 뻔했잖아! 역시 오로나가 가주님이시네!”

“……!”

뭐가 어째?

병신을 만들어놓고 조롱하다니!

대원로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전력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정광은 보법을 어지러이 밟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소리쳤다.

“가주님! 손속에 사정을 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

내용은 둘째치고 정광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장원 밖에서 날뛰던 마인들이 싸움을 멈추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야? 결국 그렇게 된 거야?”

“허어. 역시 아무리 진혼이라 해도 나가 가주에겐 안 되는군.”

“그런데 가주가 손속에 사정을 뒀다고? 그건 아니겠지.”

“내 생각도 그렇네. 동수를 이룬 것 같구먼.”

대원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광이 나가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왜?’

곧 알 수 있었다.

“저기요, 대원로님.”

“말하거라.”

“여기까지만 하죠. 굳이 피를 더 볼 이유는 없잖아요.”

“…….”

대원로는 창을 눕혀 정광에게 겨눴다.

원로들이 흉흉히 달려와 정광을 에워쌌다.

“가주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싸울 이유가 없다고?”

“아, 이런. 하나 빼먹었구나. 잠시만요.”

정광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외쳤다.

그의 입에서 나익승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혼! 너도 훌륭했다! 본가는 너를 벗으로 대할 것이다!”

“……!”

대원로를 비롯한 원로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장원 밖에 있는 무인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나가 가주께서 꽤 호탕하신데.”

“그러게 말일세. 음침한 줄 알았거늘, 다시 보게 됐어.”

“듣다 보니 흥이 깨졌네. 더 싸울 사람 있어? 있으면 이리 와! 내가 놀아주마!”

“건방진 새끼! 죽어!”

다시 싸움이 시작됐으나 아까처럼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어울리진 않았다.

대부분 상처를 치료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정광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진혼! 뭐 하는가? 빨리 좀 나오게나!”

“궁금한 게 무척 많다고! 내 말 들었지?”

장원 안쪽에 있는 정광은 담벼락을 가리키며 대원로에게 전했다.

“그렇다네요.”

“…….”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여러분이 잘못 안 거라고 번복하긴 그렇잖아요.”

대원로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속으로 탄식했다.

‘가주가 순간 움찔해서 칼에 꿰였는데 그것 역시 이놈 짓이겠지.’

무슨 수법인지는 몰랐으나 대단한 절기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어도 정말 대단한 무위다. 가주를 이렇게 쉽게 잡고 내 공격도 가볍게 흘렸어.’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은근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예 마음먹고 도주하면 가문의 전력을 동원해도 잡지 못할지도 몰라. 일단 얘기라도 해봐야겠구나.’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딱딱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정광이 전음을 보냈다.

-우선 나가 후계부터 확실히 하셔야 하지 않나요?

-그건 소가주가 있으니 문제없다.

정광이 나문욱을 슬쩍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분이 가주가 되면 그게 문제일 건데.

-무슨 의미지?

정광이 씩 웃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대원로께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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