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28화 (427/569)

2부 157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

“제가 나 소저와 혼인하면 가주님이 장인어른이 되시는 거잖아요.”

정광의 어조는 평온했고 나익승의 것은 딱딱했다.

“그렇다.”

“장인어른은 아버지와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가정사를 말씀드리긴 좀 그런데. 제가 아버지 복이 없어서요.”

“무슨 말이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지라. 장인어른은 상냥한 분이시면 좋을 것 같아서…….”

“……!”

정광은 말꼬리를 흐렸고 듣던 사람들은 정신이 흐려졌다.

네 성품이 나빠 엮이기 싫다는 의미 아닌가?

마도칠대가문의 한 축인 오로나가 가주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중인환시 속에 모욕을 받은 나익승이 분노를 토하기 직전!

정광은 망할 놈의 도경(道經)을 떠올렸다.

자연히 표정이 우울해졌고, 그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호소했다.

“아버지는 하늘이 정해주나, 장인어른은 제가 정할 수 있잖아요. 너무 큰 욕심인가요?”

“…….”

“웬만한 분들은 안 좋은 환경에서 자라셨을 것 같은데. 제 말, 공감하시죠?”

“…….”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다마다.

마도무림에 몸담은 사람치고 누가 공감하지 않을까?

잘 사는 집이면 모를까, 대부분 딱하게 자랄 수밖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건 천마신교 경전에서조차 드물게 나오는 일화.

어린 시절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갖은 구타와 무자비한 욕설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군.”

“맞는 소리야. 장인까지 그러면 정말 끔찍하지.”

“저런. 혼인 생활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말이라고. 차라리 절멸대전(絶滅大戰)을 두 번 치르고 말지.”

“오오! 피가 끓는군요!”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걸. 내 손으로 죽여줄까?”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으나 대부분 정광의 말에 동조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광은 그 여세를 몰아 나익승을 공격했다.

“곱게 돌아가고 싶으면 남김없이 토설하라고 하셨죠?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시키셨으니 그대로 했어요. 이제 가도 되나요? 약조하신 대로 무사히 보내주실 거죠?”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옳소!”

“당연히 그래야지!”

“아암. 일구이언은 이부지자인데 오로나가 가주씩이나 되는 양반이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할까?”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갔다.

나익승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위협하려고 했던 말을 약조로 바꿔 압박할 줄이야.

뭐 이런 교활한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당장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는 상황.

이 악랄한 녀석에게 홀라당 넘어간 비루한 것들과 달리 명가 가주는 지켜야 할 게 많았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주자니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수염을 가늘게 떠는데.

정광이 쐐기를 박았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끝낼 것 같으냐?

나익승은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네. 그럼 이만.”

“내 성품이 딱딱하긴 하지. 네가 불편해하는 걸 모르고 과욕을 부렸구나.”

“그러니까요.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나익승은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보내줄 수밖에 없다만,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네놈을 반드시…….

그때, 정광이 의외의 말을 했다.

“맞다. 나 소저요.”

“……?”

“어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얘기해 보니 바깥 구경을 하며 견문을 쌓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가는 김에 같이 가도 되죠?”

나익승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민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왜 데려가려는 것이냐?”

정광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나 소저가 가주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부탁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

아니긴 개뿔.

오히려 사람들이 의심하기 딱 좋은 얘기였다.

“제가 혼인은 좋아하지 않아도 인재는 좋아하거든요. 학식이 넓고 정심하시더라고요.”

나익승이 코웃음을 쳤다.

“글을 모르는가 보군. 이제라도 배우려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무어라?”

“섬랑이 일자무식 그 자체라서요. 자기가 직접 지은 그 짧은 별호도 간신히 알아보는데, 두 글자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낙서인 줄 아는 수준이죠.”

섬랑은 똑똑하고 글도 알았다.

직접 들었으면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겠지만 이미 향리객잔으로 떠난 상태.

나익승은 책잡을 말이 없어 노려보기만 하다가 빈정거렸다.

“그 꼬마를 무척 아끼는구나.”

“제가 묵영권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는 갚아야죠.”

나익승은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감탄하는 소리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허어. 은혜를 갚으려고 그러는 거였어?”

“원수로 갚지만 않아도 훌륭한 건데 참 대단하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반듯한 청년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었구먼.”

상황이 이쯤 되니, 나익승은 정광과 더 말해봐야 득 될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대신 막내딸을 노려보며 무겁게 물었다.

“떠나고 싶다고? 진혼의 말이 사실이더냐?”

나민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비가 너무 무서웠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빤히 알았으나 항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정광이 도왔다.

-저를 믿고 긴장을 푸세요.

-……!

나민의 눈이 커졌다.

-군중 앞에서 소저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기만 하면 돼요. 그다음은 제가 책임질게요.

-…….

마음이 조금 놓였으나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아, 그 책임이라는 게 혼인이나 그런 쪽이 아니라 순수한 책임이라는 거 아시죠?

-……!

이런 긴박한 와중에 우스운 농을 하다니.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자리를 생각해 참았다.

덕분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데다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는 이를 어찌 믿지 않겠는가?

아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히 청했다.

“네, 아버님.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싶습니다. 소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오니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나익승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불가.”

나민이 아니라 정광이 물었다.

“왜요?”

“내 딸이다. 타인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

지금껏 정광을 편들었던 사람들도 이번만큼은 아무 말 못 했다.

남의 집안일, 그것도 부녀간의 사적인 일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광 역시 마찬가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난감하네. 섬랑 그 녀석, 나 소저가 아니면 글 따위는 안 배우겠다고 뻗대는데.”

구경꾼들은 그 이유가 궁금했고 나익승 또한 그랬다.

“이유가 무엇이냐?”

“뻔하죠. 예쁘시니까.”

“…….”

모두 단박에 이해했다.

“어린 녀석이 발라당 까지기는. 참 마인답군.”

“하긴. 나라도 그러겠어.”

한 중년 사내가 무심코 동의하자 옆에 있던 중년 여인이 눈을 치켜떴다.

“당신, 그게 무슨 뜻이죠?”

“히끅. 부, 부인도 진혼이 글공부를 가르치면 좋다고 배울 거잖소?”

“그야 당연히…… 지금 그게 문제에욧?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악!”

부인이 남편을 잡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웃었으나 나민의 표정은 어두웠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뭘 기대했던 걸까?’

후회하긴 일렀다.

-소저. 이거면 된 거예요.

-……?

-소저는 역할을 다했으니 기다리시기만 하면 된다고요.

-……!

정광은 나민에게 전음을 보낸 뒤 나익승에게 정중히 청했다.

“가주님. 비무로 정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지면 사위가 되어 나가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대신 이기면 나 소저를 데려가고요.”

“……!”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진혼이 비무를 요청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사자인 나익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네가 나를 가볍게 보는구나.”

“아뇨. 무겁게 봐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건데요.”

“이제 너 따위 사위는 필요 없다.”

“그럼 종복은 어떠세요? 밥만 먹이고 잠만 재워주면 죽어라 일하는 종이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대단한 패기군!”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가?”

정광이 정정했다.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섬랑 그 녀석을 사람답게 만들려면 나 소저가 단단히 혼을 내며 가르쳐 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게 웬 고생인지 원.”

정광의 너스레에 구경꾼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나 소저는 원하던 대로 큰 세상으로 나가고 섬랑은 사람이 되겠어!”

“자네도 명성을 더 쌓고! 사실 정말 원하는 건 이것이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보게, 진혼! 어서 말해보게!”

정광은 인정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에 더 불을 질렀다.

“으하하하! 오늘 정말 좋은 구경을 하겠구나!”

“나 가주! 어서 받아들이시오! 나가의 체면이 걸렸소이다!”

“당연히 받아들이시겠지! 이걸 어떻게 피해?”

구경꾼들의 말대로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도발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소문이 어떻게 나겠는가?

그야말로 외통수!

허나 나익승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지만 냉정히 계산했다.

‘이놈은 약하지 않아.’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안 했으나 경지가 확연히 느껴지진 않을 만큼 강한 상대였다.

이겨도 본전인 판에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은가?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는데 정광이 놀라운 제안을 했다.

“가주님. 사람이 너무 많아 불편하시면 장원에 들어가서 하시죠.”

“……!”

나익승의 눈이 빛났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스스로 호굴에 들어오겠다고?

지금이야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만, 안에 들어가면 뭘 못할까?

뒤처리가 문제이긴 한데 체면이 조금 상하는 대신 많은 이들에게 나가를 우습게 보면 어찌 되는지 경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심도 들었다.

이 교활한 놈이 이런 모험을 할 리 없는데.

설마 예상 못 한 흉계가 있는 걸까?

흉계까진 아니었다.

정광이 그런 제안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저도 조용한 곳에서 해야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참관인만 한 분 정도 모시고 시작하죠.”

“……참관인?”

“네. 마침 신분과 명성을 전부 갖춘 적당한 분이 계시잖아요.”

정광은 단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가주님! 봐주실 수 있죠?”

사람들의 시선이 단영에게 집중됐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건 없지.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뭔데요?”

“진혼 자네는 본가의 빈객 아닌가? 내가 사적인 정에 쏠려 공정한 판정을 안 했다고 뒷말이 나올 수도 있어.”

정광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따지고 보면 적지에 들어가 싸우는 건데 누가 그러겠어요?”

좋은 볼거리를 놓치게 된 것 같아 실망하고 있던 구경꾼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지적했군.”

“맞아. 어느 쪽이 불리한지는 명약관화하잖아.”

“오히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는데?”

“그런데 정말 안에서 하려고? 웬만하면 여기서 좀 하지.”

정광은 어깨를 으쓱하고 나익승에게 물었다.

“그렇다고들 하시네요.”

“…….”

“가주님도 괜찮으시죠?”

나익승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폭발하려는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악귀 같은 놈. 여기서 단영을 들이밀다니…….’

고이륵단가 소가주를 함부로 해치고 묻을 순 없었다.

‘이젠 다른 길이 없어.’

이렇게까지 비무를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이로다.’

나익승은 정광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만의 하나, 밀린다 해도 가문의 힘을 동원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단영의 입이야 전장 사업을 지지해 주는 대가로 봉해달라고 하면 돼. 그것마저 안 되면 전면전을 벌이면 되고.’

가문의 명예?

내가 있기에 가문이 있는 것이다.

정광이 도발해서 싸우는 것이니 교주에게 과잉 충성하려고 죽였다는 오해는 피할 수 있었다.

‘교주만 책잡지 않으면 돼.’

물증만 안 남기면 다른 놈들의 입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해질 게 분명했다.

나익승은 마음을 굳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정광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좋다. 그렇게 하자.”

“시원시원하시네요.”

정광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손으로 장원을 가리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

더 이상 화날 것도 없었다.

나익승은 정광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걸었다.

군중 모두가 정광을 응원하다가 흥분해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정광은 여유 있게 손을 흔들며 그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장원 안에 들어가 정문이 닫히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나익승을 주시했다.

“들어왔으니 빨리 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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