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26화 (425/569)

2부 155화

보안은 확실히

“가주님요. 오랫동안 고생하셨으니 그만 은퇴시켜 드리죠.”

“……!”

뭐가 어째?

거의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고 그러기 위해선 협조가 필요하다기에 들어봤건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할 줄이야!

나문욱은 너무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가 실책을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시도 때도 없이 들어왔던 면박과 힐난이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못난 녀석! 속내를 그렇게 쉽게 드러내지 말라니까!’

‘수양이 이렇게 얕아서야 원. 이런 녀석에게 본가를 어떻게 맡길꼬.’

가슴이 옥죄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했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아비의 것이었다.

‘빌어먹을. 알아서 한다니까!’

진저리가 날 정도로 듣기 싫은 음성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정광을 똑바로 주시하며 서늘하게 따졌다.

“지금 나보고 패륜을 저지르라는 것이냐?”

“그간 고생하셨으니 푹 쉬시라고 은퇴시켜 드리는 게 무슨 패륜이에요, 효도지.”

“말장난하지 말아라. 진지하게 묻는 거다.”

“그럼 저도 더 진지해질게요.”

정광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내리사랑에 비해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치사랑은 약할 수밖에 없다고들 하죠.”

“그래서?”

“헌데 가주님은 소가주님을 도구처럼 여기고 사용 가치를 따져 이용하시려 하잖아요. 그게 더 패륜 아닌가요?”

“…….”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난 심정이 이럴까.

나문욱은 ‘내 말이!’라고 외치며 맞장구치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았다.

부자간에도 신뢰하지 못하는 판에 진혼이라는 이 수상쩍은 놈을 어떻게 믿고 그러겠는가?

살짝 분노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아비를 변호했다.

“감정표현이 서투르셔서 그렇지, 속마음까지 그런 분은 아니야.”

“속마음은 더하실 것 같은데. 서투르지 않고 능숙하셨으면 소가주님은 진작에 말라죽거나 가출하시지 않았을까요?”

“…….”

정말 그럴 뻔했지.

그래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이대로 계속 휘둘릴 순 없어. 끌려가지 말고 주도권을 잡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강하게 나가야 할 터.

계속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축객령을 내렸다.

“더러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 귀를 씻어야겠군. 여기까지다. 너와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어.”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안녕히 가세요.”

“……여긴 내 사업장이야.”

“어차피 제 것이 될 건데요, 뭐.”

“무어라?”

정광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함께 외통수에 걸린 소가주께서 홀로 살길을 찾으시는데 저는 그냥 앉아서 죽어야 하나요? 가주님의 사위 노릇이라도 해야죠.”

“네가 나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냐?”

“못 믿으시겠으면 시험해 보시든가요.”

나문욱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상대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고 토로번손가 소가주 손병권과 식솔들이 외팔이가 되어버린 걸 눈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직접 마주 대해보니 무위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나 싸움이란 것이 꼭 무공만으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만한 놈 같으니. 홀로 이곳에 온 걸 후회하게 해주마.’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탁자 밑에 달린 고리를 잡고 힘껏 당겨 기관 장치를 작동시키려고 하는 순간!

정광이 탄식했다.

“가만. 경쟁에서 이겨도 문제네. 허구한 날 들볶일 것 아냐.”

“……들볶이다니? 누구에게?”

“당연히 가주님이죠. 제가 뭘 하든 간에 못마땅해하거나 폄하하실 것 같아서요. 그리되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텐데. 어떡하지?”

“네가 아버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리 확신하느냐?”

“잠깐 대화했던 것만으로도 알겠던데요, 뭐. 아니에요?”

“…….”

맞았다.

소가주답게 알아서 일을 처리하라 해놓고는 하면 했다고, 안 하면 안 했다고 꾸짖었다.

누가 봐도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땐 왜 그것밖에 못 하느냐고, 더 좋은 방법이 많은데 왜 그랬냐고 무시했다.

‘이번만 해도 그래.’

자신이 왜 섬랑이라는 꼬마를 제거하려고 했던가?

혹시라도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녀석을 알아서 처리하고 좋은 소리 한번 들으려 했던 것 아닌가?

자객을 기껏 고용해 놓고도 실행하지 않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계속 그래왔는데 이번이라고 다를까.

성공해도 실패해도 괜한 짓을 벌였다고 혼날 가능성이 컸다.

그 점을 지적당하자 마음이 움직였다.

‘조금 더 들어본다고 나쁠 건 없겠지.’

고리에서 손을 뗐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 깍지 끼고 매섭게 경고했다.

“나와 아버님 사이를 멀게 만들 생각이면 포기해라.”

“당연하죠. 어떻게 더 벌려요?”

“……네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 아버님께서 고생하고 계신 건 사실이지만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 시해할 생각을 하겠느냐?”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시해하다뇨? 저를 뭐로 보시고 그런 말씀을. 은퇴요, 은퇴. 그냥 편히 쉬시게 해드리자고요.”

“…….”

말 그대로 은퇴였다고?

이 녀석이 이렇게 두부처럼 무른 위인일 줄이야.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겨우 그거로 끝내자니 말이 되는가?

깊이 실망했지만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네가 천륜에 어긋나는 짓을 꾸미려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표정이 어두워지셨네요.”

“기분 탓이겠지.”

“설마요. 안 되겠네. 안심시켜 드릴게요.”

나문욱이 다시 부정하려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은퇴로 끝내려는 건 가주님께서 귀천하시면 소가주님이 곤란해지시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이냐?”

“태상가주님께서 귀천하신 지 칠 년밖에 안 됐다고 들었어요.”

“팔 년.”

“와. 많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가주님까지 떠나시면 소가주님만 남으시는데 연배가 좀…… 다른 가문 가주님들이 쉽게 보시지 않을까요?”

“…….”

확실히 그렇긴 했다.

배분이 같다고 나이까지 똑같을 수는 없는 법. 나문욱은 다른 칠대가문 소가주들에 비하면 늙은 편이었으나 가주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만큼 무공도 약하고 연륜도 짧을 수밖에.

오로나가의 힘이 강한 편이니 그들이 대놓고 칼을 빼 들 확률은 낮지만 이런저런 압박을 가하며 간을 볼 게 뻔했다.

‘자칫하면 죽 쑤어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어.’

누구 좋으라고.

깍지 낀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맞는 말이긴 하다만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아버님이 은퇴를 하시고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실 수도 있지 않으냐?”

“은퇴하시고 안 좋아지는 게 아니라 안 좋아져서 하시게 되겠죠.”

나문욱이 눈살을 찌푸리자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가정이었지. 그렇죠, 암요. 은퇴하면 의욕이 떨어지고 건강도 나빠지기 마련이죠.”

“역시 그렇겠지.”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실 수도 있고요.”

“그래,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말이죠.”

“그 지경까지 이르시면 귀천하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럼 결국 다른 가문 가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아뇨. 달라요. 어쨌든 살아 계신 거잖아요. 가주님을 장원 깊숙한 곳에 모시고 가끔 외부 사람에게 멀찍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중요한 사안은 소가주께서 가주님의 지시를 받고 대리하신다고 주장하면 다른 가문 가주님들과 동등한 발언권을 지킬 수 있겠죠.”

“으음. 아버님을 직접 만나겠다고 떼를 쓰면?”

“누군지 참. 예의가 없는 분이시네요.”

“없는 게 한둘이 아니야. 해결책을 말해.”

정광이 씩 웃었다.

“가주님께선 폐관 수련 중이라고 말씀하시면 되죠.”

나문욱은 이마를 좁혔다.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핑계로 언제까지 버틸 순 없어.”

“이거 왜 이러세요. 폐관한다고 전부 고수가 되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으시고 귀천하실지 누가 알아요? 다른 안 좋은 경우도 적지 않고요.”

“…….”

나문욱은 깍지 낀 손을 자연스럽게 풀고 탁자 밑으로 내렸다.

기관 장치를 움직이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몰래 닦기 위해서였다.

‘나쁘지 않아.’

아니, 좋은 편이었다.

남은 몇 가지만 해결되면 말이다.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나 소저를 원해요. 함께 멀리 떠날게요.”

“분명 혼인은 안 할 거라 했으면서 무슨! 나와 아버님을 이간질해서 양패구상시키고 그 틈을 노려 민이의 지아비로서 본가에 권리를 주장하려는 속셈이냐?”

정광이 한숨을 쉬었다.

“속고만 사셨나. 내일 군중들 앞에서 나 소저와 혼인 안 할 거라 천명할게요. 그럼 되죠?”

나문욱의 눈이 빛났다.

‘민이의 미색에 혹한 것이었나.’

그렇게만 한다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날 리 없지 않은가?

“역시 가정이다만, 네가 민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민을 설득할 땐 정광이 ‘가정’해보자고 계속 강조했지만 이번엔 반대였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누이의 안위가 걱정되면 응하지를 말아야지 인마.’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짜증 나는 놈이었다.

정광은 원래의 계획을 살짝 수정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정체는?”

“진혼이라니까요. 다들 왜 이리 의심이 많아?”

“네 진정한 목적은?”

“이거 안 되겠네.”

정광은 나문욱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묵영권가에 빚진 게 있어서 섬랑을 소교주로 만들 거예요. 잘되든 안 되든 끝나면 신강에서 떠날 거고요.”

나문욱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거짓으로 드러나면 어쩔 것이냐?”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력을 동원해서 저를 척살하시든가요. 그런데 참이면 어쩌실 건데요? 재산의 반만 내놓으실래요?”

“…….”

“눈싸움 그만하고 마지막으로 넘어가죠. 가주님을 은퇴시켜 드릴 방법과 그 후에 시작될 다른 가문들의 압박을 완화시킬 수단요.”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문욱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 설명까지 끝나자 나문욱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다른 건 다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건 진짜 아니었다.

“……그게 신호라고?”

“네. 잘 생각해 보시고. 승낙하실 거면 그렇게 해주세요.”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니까 했죠. 그럼 내일 봬요.”

* * *

“아. 피곤하네.”

정광이 향리객잔으로 돌아오자마자 내뱉는 말에 기다리고 있던 민현유가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자야 할 시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번(番)을 서다 보니 은근히 그렇습니다.”

“내 침상에 드러누워 있던 녀석이 무슨 엄살이야. 별일 없었지?”

“네, 대인.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그럭저럭. 내일까지 가부를 정해서 신호를 주라고 말했는데 아마 승낙할 거야.”

“나가 소가주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요?”

“내가 더 피곤해지겠지. 최대한 적게 드러내고 싶었는데 조금 더 꺼낼 수밖에.”

“제가 따로 준비할 건 없습니까?”

“아침 맛있게 해줘. 든든히 먹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수고했어. 잘 자.”

정광은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내일 판돈에서 조금 더 떼어줄게. 됐지?”

“감사합니다, 대인. 좋은 꿈 꾸십시오.”

민현유는 그제야 물러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동이 트자.

탁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민현유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차린 건 많지만 적당히 드십시오.”

섬랑은 신이 나서 열심히 퍼먹었고 관엽과 자오도 만족했다.

정광 역시 마찬가지.

요리로 배를 가득 채우고 차로 입술을 축인 뒤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제 일은 나쁘지 않게 정리됐어요.”

“다행입니다, 단주.”

“혈조가 짧게 말해주니 더 다행이네요.”

자오가 당황하고 섬랑이 크게 웃었다. 민현유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으며 관엽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동의를 표했다.

정광은 자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오늘 할 일을 설명했다.

“섬랑, 이겨.”

“네, 대인!”

“멸혼생사투가 끝나면 모두 마차를 끌고 객잔으로 돌아오세요.”

풀이 죽어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자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단주께선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어제처럼 나가 장원에 들어갈 거예요.”

“그들과 싸우시려고 저희를 보내시는 겁니까?”

“그렇긴 한데 싸움의 경중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정광은 단단히 주의를 줬다.

“마차 잘 지키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또 궁금한 거 있으신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정광이 위험에 처할 거라 걱정하지 않아서였다.

“좋아요, 그럼 가죠.”

그들은 금은보화가 가득 실린 마차를 끌고 오로나가 대장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군중이 환호하고 전주들이 달려와 극진히 맞았으나 정광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했다.

나가 사람들이 있는 천막이었다.

익숙한 뒤통수들이 보였다.

‘흠. 나민도 나왔네.’

그리고 그 뒤통수들 중 하나가 반대로 돌았다.

역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소가주 나문욱이었다.

그의 전음이 귀에 꽂혔다.

-진혼. 네 제안, 대의를 위해 받아들이마. 잘 부탁한다.

누구 마음대로.

-네? 무슨 말씀이죠?

-……어제 얘기했던 것을 말하는 거다.

-승낙 신호를 따로 정해드렸는데.

-네가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바로 떠났잖아! 지금 전음으로 수락하겠다고 확실히 말했는데 뭐가 문제냐?

정광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얼굴과 목소리만 소가주님이실지도 모르잖아요. 약조했던 신호를 보내세요.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같이 일 못 해요. 보안은 확실히 해야죠. 정말 소가주님이 맞으시면 신호를 보내세요.

-이익!

-거사를 일으킬 각오가 되어 있으신지도 판별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보여주셔야죠.

나문욱은 이를 악물고 정광을 노려보다가…….

찡긋.

한쪽 눈을 재빨리 감았다가 떴다.

-크윽. 이제 되었느냐?

정광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양팔을 긁었다.

-되긴 됐는데. 기분이 영…….

-네 이놈! 네가 하라 해놓고 왜 그런 행동을…… 헉!

나문욱의 눈이 커졌다.

마침 그를 보다가 눈 깜빡임을 추파로 오해한 몇몇 사람들이 정광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몸을 벅벅 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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