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4화
거의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
“내가 제대로 쓰게 해줄까?”
“……!”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이야.
마기의 그물에 얽혀 당황하던 와중에 이런 제안까지 들으니 충격이 배가됐다.
하지만 나민은 얼마 안 가 평정을 되찾았다.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니야.’
눈이 깜빡여졌다. 그렇다면 입도 움직일 수 있으리라.
슬쩍 시도해 보니 실제로 그랬으나 말을 뱉기 전에 생각부터 정리해야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신중히 생각했고, 첫 번째 결론은 이거였다.
‘거리부터 다시 벌려야 해.’
육신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
나민은 코앞에 있는 미청년의 눈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말을 놓으시는 겁니까?”
“이런. 조금이나마 친해지려고 했는데 밀어내시네요.”
말투가 바뀐 건 물론이오, 몸까지 멀어졌다.
정광은 씩 웃으며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얘기하죠.”
“속박부터 풀어…… 아!”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그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광이 거둬 갈무리한 것이다.
나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마기의 발출과 회수가 이렇게 능숙하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고수 아닌가!
그걸 드러낸 이유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도 드러내라는 것이겠지.’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의자에 앉아 화제를 돌렸다.
“다른 곳도 아닌 본가에서 저를 이렇게 핍박할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대담하십니다.”
“핍박이라뇨. 소저가 그 능력을 숨기고 숨죽이며 살게 한 가주님과 소가주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또 가정이군요. 오라버니는 속이 좁아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평하셨는데 아버님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주께선 휘두를 수 있는 칼을 원하시지, 휘둘릴 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아버님은 귀하를 거두려고 하십니다.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귀하보다 그 능력이 있는 저를 더 높게 보실 거란 뜻입니까?”
“그 능력을 지니셨던 전전전대 가주님은 나가 역사상 최강자로 평가받으셨잖아요. 그런데 그걸 물려받은 후인이 나타난다? 가솔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꿈에 부풀어 모든 관심과 힘을 그 후인에게 집중하겠죠.”
나민은 고개를 저었다.
“비약이 지나칩니다. 그분이 대단한 고수였던 건 맞지만 천하제일은 아니셨습니다. 헌데 무슨 영광을 꿈꾼단 말입니까?”
“과거 그분을 죽이셨던 전대 교주가 지금은 없잖아요. 욕심을 품을 만하죠.”
“그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강해질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그건 알 바 아니죠. 어쨌든 남보다 특별한 것을 가졌으니 열광할 수밖에.”
정광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나민을 뚫어져라 봤다.
“지금부터 ‘가정’이라는 단어는 빼고 얘기해요. 저는 소저와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능력을 제대로 쓰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죠.”
“왜 그렇습니까?”
정광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섬랑, 넌 뭐가 되려고 하지?”
정광의 손에 이끌려 정자에 온 이래로 호기심을 감추고 듣고만 있던 섬랑이 포부를 밝혔다.
“소교주, 그다음은 교주, 그리고 천하제일인이요.”
“가능성은 둘째치고. 이유는?”
“천하마도의 정점에 우뚝 서서 손바닥만 한 세상을 오연하게 굽어보려고요.”
“그렇게 되려면 바쁘겠네.”
섬랑이 한숨을 쉬었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죽어라 수련해야죠. 어떤 일이 있어도 해낼 거예요.”
정광은 다시 나민을 봤다.
“들으셨죠? 장래의 교주께선 무공을 수련하느라 정신없을 거라 하시네요.”
나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저보고 이 아이를 보필하라는 말씀입니까?”
“네. 교를 다스리는 것에는 관심 없는 교주와 교를 운영하고 싶어 하는 이인자. 최고의 조합이죠.”
“이 아이가 그럴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섬랑이 발끈해서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정광이 장담했다.
완전히는 아니고 반쯤.
“교주까진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의구심을 가지시는 건 이해하는데. 그런 식으로 치면 소저도 마찬가지죠.”
정광은 말로 팼다.
“스스로 지략은 마뇌보다 못하다고 인정하셨잖아요. 행정만큼은 자신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으로 증명하실 거죠? 나가의 일을 해온 것으로? 나가가 아무리 커도 교 전체와 비교할 순 없을 텐데요.”
“…….”
나민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광은 할 말이 더 있었고.
“지략은 타고나는 게 많지만 행정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요. 큰물에서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다 담을 수 있다는 얘기죠. 소교주 옆에서 일을 보며 시작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당장 떠오르는 건 없습니다.”
“거봐요. 여기에서 움츠리고 사느니 모험을 해보는 게 낫죠.”
정광은 대가도 명시했다.
“섬랑이 교주 자리에 오르려면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할 거예요. 그때까지 소저의 능력을 전부 동원해서 적을 판별해 주세요.”
“……그게 제대로 쓰게 해주겠다는 의미였군요.”
“네. 쓰면 쓸수록 개화될걸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죠?”
“…….”
확실히 그렇긴 한데.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나민은 티가 나지 않게 침을 조용히 삼켰다.
“귀하는 누구고 목적이 뭡니까?”
“진혼. 천하의 평안과 제 행복을 추구하죠.”
“진실을 묻는 겁니다.”
“말했는데도 안 믿으시네. 차라리 직접 보시죠. 그 능력으로요.”
“…….”
나민은 그러지 않았다.
다시 봐봐야 검붉은 피의 바다밖에 안 보일 텐데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반복할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뜻을 펼칠 기회가 올지 몰랐다.
상대의 정체도 목적도 강함도 추측할 수 없었지만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조건을 달아도 되겠습니까?”
“별것 아니면요.”
“섬랑이 소교주가 되어 능력을 증명하면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습니다. 허나 그렇지 않을 시, 저를 무사히 놓아주십시오.”
“그 정도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죠.”
섬랑이 투덜거렸다.
“대인, 제 의사는 안 물어보세요?”
“네가 직접 사람을 구하든가.”
정광은 나민에게 주의를 줬다.
“가주께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헤어졌다고 하세요. 내일 제가 직접 허락을 구할게요.”
나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순순히 응하시지 않을 겁니다.”
“제 특기가 남을 설득하는 거예요. 그럼 내일 보죠.”
정광은 섬랑과 함께 정자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갔다.
자오가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단주,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네.”
“설마 혼인을…….”
“그럴 리가요. 일행이 늘어날 거예요.”
민현유가 한숨을 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젠 납치까지…… 가면 갈수록 첩첩산중이구나.”
“현유. 너처럼 자발적으로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납치가 아니라 협박이었군요.”
정광이 주먹을 쥐자 민현유가 진지한 얼굴로 지적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나 가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건데 어떡하실 계획입니까?”
“설득하려고. 그보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가다 보면 보일걸.”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장원 정문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 식솔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나문욱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식솔을 보내고 냉랭한 눈으로 정광을 응시했다.
“이제 가는가?”
“네, 소가주님.”
“아버님과 얘기는 잘 나눴고?”
“그렇죠, 뭐.”
정광은 전음으로 덧붙였다.
-무척 곤란하게 하시더라고요. 고민이에요.
나문욱의 눈이 빛났다.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는가?
-여기서 말하긴 좀 뭐한데. 시간 있으세요? 몰래 만날 시간요.
-시간이야 만들면 생길 것 같네만. 향리객잔에서 보자는 건 아니겠지?
-제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까 봐요? 소가주께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 주세요.
-내가 함정을 파면 어쩌려고?
-어쩔 수 없죠.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만큼 곤란한 일이거든요. 저에게나, 소가주님에게나.
-…….
나문욱은 잠시 침묵하다가 두 손을 천천히 모았다.
“얘기가 잘됐다니 다행이군. 조심히 가게나.”
그리고 전음을 보냈다.
-사람을 보내 시간과 장소를 알릴 테니 기다리게.
정광은 태연하게 답례했다.
“네. 그럼 이만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졌다.
민현유는 맡겨뒀던 마차를 돌려받고 밖으로 나와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야 할 사람이 나 소가주였나 보군요.”
“응.”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잘 알면서 왜 물어.”
“어떤 내용인지 물으면 안 알려주실 거고 말입니다.”
“역시 잘 아네. 빨리 가서 쉬자.”
그들은 깜깜한 거리를 걸어 향리객잔으로 돌아갔다.
재물을 전부 내려 탁자에 쌓고 비어 있는 탁자에 모였다.
정광이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섬랑은 운기조식하고 푹 자. 관 숙수는 섬랑을 추궁과혈하고 혈조와 함께 지켜주세요.”
민현유가 손을 들었다.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객잔 주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되지. 자객이 올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 내 앞으로 서신이 오면 전해주고.”
정광은 방으로 올라가 운기조식을 마치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두세 시진쯤 잤을까?
벽에서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정광은 침상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자다가 가려니 귀찮네. 가까운 곳이면 좋을 텐데.’
나갈 채비를 마치자 민현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인. 누군가 객잔 문에 서신을 묶은 비수를 던졌습니다.”
“언제 어디로 오래?”
“여깄습니다. 보시지요.”
“먼저 봤을 거 아냐. 장소를 봐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네가 알려줘.”
“남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나오는 아편굴입니다.”
민현유는 자세한 위치를 설명하고 서신에 적혀 있는 암어까지 말했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듣다가 피식 웃었다.
“객수주편(客隨主便), 취할투정(取轄投井)?”
손님은 주인 하는 대로만 따르고 주인은 손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만류한다는 의미.
“그래도 놀라지 말라고 배려는 해주네.”
피식거리는 정광과 달리 민현유는 얼굴을 굳혔다.
“대놓고 함정을 파겠다는 건데 정말 가실 겁니까?”
“나를 시험하려는 거야. 응해주면 그만이지.”
정광은 창문을 열며 당부했다.
“별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잘 지켜. 다녀올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인의 무운을 빕니다.”
정광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어둠과 동화되어 있었다.
남쪽으로 십리쯤 달리니 민현유가 묘사했던 작은 가옥이 나왔다.
정광은 잠행술을 풀고 주저 없이 다가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사내가 귀찮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여긴 댁 같은 도련님이 오실 곳이 아니오. 돌아가서 차나 마시시오.”
정광의 생각도 그랬지만 할 일을 해야 했다.
“객수주편(客隨主便).”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취할투정(取轄投井). 귀빈이셨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깔린 남루한 양탄자를 들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고리 중 하나를 잡아당겼다.
나무 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새카만 어둠 속에서 매캐한 향이 흘러나왔다.
“들어가서 쭉 가시면 됩니다.”
“몇 명이나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가주님이 서신에 다 적어놨어. 나를 시험할 애들 있잖아. 얼마나 있냐고.”
“글쎄요. 조금 전에 막 교대했는지라 그것까진…….”
사내는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고 정광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뛰어내렸다.
“뭐 상관없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천장이 닫혔다.
“다 죽이면 되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암흑 속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정광은 도를 뽑아 작은 원을 그려 받아낸 뒤 그대로 돌려줬다.
암기에 꿰뚫린 자들이 쓰러지고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정광은 일정한 속도로 전진하며 적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으깼다.
적들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갖가지 악랄한 수로 맞섰으나 상대가 안 좋았다.
어둠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정광은 최후의 일인까지 죽이고 단단한 철문 앞에 이르렀다.
“들어가도 돼요?”
철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묻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그럴 것 아닌가?”
“예의상 해본 말이죠.”
정광은 문을 열고 들어가 나문욱 맞은 편에 느긋하게 앉았다.
“감상이 어떠세요?”
“준비가 과하진 않나 걱정했는데 아니어서 다행일세. 옷에 피 한 방울 안 튀었군.”
“당장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무리 좀 했죠. 섬랑을 죽이려고 고용한 자객들이죠? 괜히 취소해서 위약금 물지 않고 잘 쓰셨네요.”
나문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부정했다.
“지나친 억측이군. 내가 뭐 하러 그러겠는가?”
“뭐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넘어가고. 가주께서 아주 곤란한 말씀을 하셨어요.”
“자네를 사위로 삼고 싶다 하셨나?”
“네.”
“민이를 불러 자네와 인사시키셨을 때 눈치채긴 했지.”
“반대 안 하세요?”
“원래는 그랬지만 자네 실력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움직이는군. 아버님께서 탐낼 만한 인재야.”
“이거 왜 이러세요. 우리 솔직해지죠.”
“무슨 말인가?”
정광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또박또박 말했다.
“가주께선 나 소저와 혼인하면 소가주님과 저를 경쟁시킬 거라 하셨어요. 어렴풋이나마 예상하셨죠?”
나문욱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훗날 언제가 됐든 우열이 가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승자가 패자를 숙청할 수밖에 없겠지.”
“제가 혼인을 거부하면요?”
“아버님께선 자네를 고이 보내시진 않을 걸세.”
정광은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소가주님도 꼼짝없이 외통수에 걸렸어요. 이런 곤란한 일이 또 있을까요?”
“자네는 그렇다 치고. 나는 왜?”
“가주님은 더 좋은 대체자가 나타나면 소가주님을 언제라도 버리실 거예요.”
나문욱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부정했다.
“그렇게까지 하시진 않을 거다.”
“정말 확신하세요?”
나문욱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거의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거든요. 그런데 소가주님의 협조가 필요해서요.”
“…….”
나문욱은 살기를 흩어버리고 팔짱을 꼈다.
“일단 들어는 보마.”
정광이 입을 열고.
나문욱은 눈을 부릅떴다.
“가주님요. 오랫동안 고생하셨으니 그만 은퇴시켜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