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24화 (423/569)

2부 153화

믿을까 말까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과 가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건강해 보이는, 흰자위가 거의 없는 새카만 눈을 가진 ‘그’ 여인이었다.

정광은 그녀를 응시하며 나익승이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겐 혼기가 찬 어여쁜 딸이 있거든.’

과연.

혼기가 차 보이긴 했다.

예쁘기도 했고.

그런데…….

그게 뭐?

죽일 건데?

어이가 없어 눈을 끔벅거리는데 나민과 함께 죽일 예정인 나익승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구나.”

정광은 가뿐히 떼고 나익승을 바라봤다.

“연을 쌓고 싶으시다더니. 저와 따님이 쌓기를 바라신 거였어요?”

나익승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무랐다.

“어허. 사람이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그야 어렵지 않죠.”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했다.

“안녕하세요, 진혼이에요.”

상대도 예를 취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나민이라고 합니다.”

정광은 고개를 돌려 나익승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하면 돼요? 가도 되나요?”

“…….”

나익승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딸에게 손짓했다.

“후원에서 기다려라.”

“네, 아버님.”

나민은 순순히 나갔다.

다음은 나문욱 차례였다.

“너도 나가서 일보고.”

“저도 말입니까?”

아들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아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할 일이 많을 텐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버님.”

나익승은 아들도 떠나자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듣는 귀가 너무 많아.”

“그렇긴 하죠.”

“옆방이 비어 있으니 그쪽으로 보내라.”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얘기.

일단 들어보긴 해야 했다.

정광은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관 숙수, 혈조, 현유. 옆방에 가 계실래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세 사람은 군말 없이 일어났다.

정광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들에게 덧붙였다.

“혈조,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방에 기관 장치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세요. 관 숙수님은 혈조를 호위해 주시고요.”

유일하게 임무를 받지 못한 민현유가 물었다.

“대인,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내가 해줘야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원한 품을 필요 없어. 꼭 복수해 줄게.”

민현유는 작게 한숨을 쉬고 대꾸했다.

“번거롭게 그러지 마시고 죽기 전에 구해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만일을 위해 한 말이니까 걱정하지 마. 가주께서 설마 그러시겠어?”

“안 그러실 거라 믿고 싶습니다.”

세 사람은 나가고 나익승은 정광을 쏘아봤다.

“적당히 하거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왜 봐주시는지 궁금하네요.”

“그걸 말하려고 듣는 귀를 줄인 거다.”

정광은 아직 남아 있는 땅딸막한 노인을 가리켰다.

“이분은 귀 아니에요?”

“대원로는 사적으로는 내 숙부고 공적으로는 내 칼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와 본가를 위하는 분이지.”

“아아. 자제분들보다 더 믿으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다.”

“소가주께선 상당히 불쾌해하시는 것 같던데.”

“탓할 생각은 없다. 그만한 자존심은 있어야지.”

이번엔 나익승이 섬랑을 가리켰다.

“너도 이 아이를 그렇게 믿기에 안 내보낸 것이냐?”

“설마요.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죠.”

섬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의 자신으로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마도칠대가문의 가주가 살기를 일으켜서였다.

그래도 욱하는 마음에 대항해 보려고 하는 순간.

나익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 깍지꼈다.

“진혼, 무엇이 문제냐?”

“네?”

“뭐가 마음에 안 드느냐는 말이다.”

나익승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내 딸이라 이러는 게 아니야. 민이는 신강에서 손꼽히는 미인이다.”

사실이었다.

“본가는 마도칠대가문 중 하나. 그중에서도 상위에 있다고 자부한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민이와 혼인하면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느냐?”

“그래 봐야 사위잖아요.”

“데릴사위는 다르지.”

나익승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네 능력 여하에 따라 가주가 될 수도 있다.”

“소가주님은요?”

“능력이 모자라면 물러나야지. 내가 원하는 건 자격이 있는 녀석이 내 뒤를 잇는 거다.”

“적자든 데릴사위든 능력 있는 쪽을 밀어주실 거라는 말씀이네요. 겸사겸사 경쟁도 시키고요.”

“바로 보았다.”

“적손이 멸혼생사투 본선에 출전해서 우승하면 소교주까지 배출하게 되고요.”

“노릴 수 있는 건 다 노려야지.”

“섬랑이 우승할 건데요?”

나익승이 날카로운 눈으로 섬랑을 훑어봤다.

“제법 하긴 하더구나. 가까이서 보니 실제로 괜찮기도 하고.”

“그렇죠?”

“그래서 더 너를 잡으려는 거다.”

나익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너는 묵영권가의 후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아이는 유일한 적자고. 나는 묵영권가의 힘도 손에 넣고 싶다.”

“다 망한 가문에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세요.”

“이름값이 남아 있지. 묵영권가는 전대 교주의 심복 가문이었다. 그분이 남기신 성취를 지키려다가 장렬하게 옥쇄했어.”

“…….”

장렬은 개뿔.

정광이 보기엔 개죽음이었다.

안 되겠다 싶으면 튀어야지, 왜 미련하게 요란을 떨다가 멸문당한단 말인가?

융통성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

그 빚은 현 교주 놈에게 톡톡히 받아내야 했다.

이런 정광의 생각을 모르는 나익승은 계속 말을 이었다.

“본교에는 아직도 전대 교주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은 그분의 은혜를 입은 약소 가문 사람들이지. 자연히 권가를 특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호감을 품고 있다고 할까? 이 표현이 제일 적당하겠군.”

“저와 섬랑을 거둬 그들도 끌어들이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다. 더구나 너는…… 내 기억 속 그분과 닮은 점이 있다. 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

“어떤 부분이 닮았죠?”

“그만. 듣지 않아도 될 욕을 왜 굳이 사서 들으려고 하느냐?”

“…….”

“쿠얼러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고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명성을 얻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지? 그래서 단가에 의탁한 것일 테고.”

나익승의 음성에 열기가 실렸다.

“그럴 필요 없다. 단가에 있어 봐야 빈객 아니냐? 섬랑 이 아이도 예선이면 모를까, 본선에 오르면 죽을 확률이 높다. 훗날을 도모하는 게 좋아. 허나 진혼 네가 민이와 혼인하고 섬랑도 본가에 의탁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너희 둘 다 택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질 게다.”

“그만 가도 되죠?”

“하나만 더.”

나익승이 눈을 빛냈다.

“후원으로 가서 민이와 얘기해 보고 가라. 답은 내일 들으마.”

“그 정도야 뭐.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정광은 섬랑과 함께 밖으로 나가 옆방에 있던 일행을 불렀다.

그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나민은 화려한 정자에 앉아 꽁꽁 언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광은 일행에게 기다리라 하고 섬랑만 대동한 채 나민에게 다가갔다.

“소저. 가주께서 얘기를 해보라 하시네요.”

나민이 일어나 신형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먼저 입을 연 건 나민이었다.

“거짓이 통할 분이 아닌 것 같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아버님께서 귀하를 미색으로 홀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런. 나쁜 아버님이네. 최소한 서로 알아갈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럴 시간이 없잖습니까. 저도 귀하가 싫은 건 아닌지라 이렇게 솔직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싫진 않아요? 왜죠?”

“힘이 필요해서입니다.”

“아아. 잘 드는 칼이 필요하신 거구나.”

“저를 너무 가볍게 보시는군요. 천하에서 제일 강한 칼을 원합니다.”

“뭐 하려고요?”

“그런 칼이 있어야 본교를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힘을 제가 운영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칼은 천하를 군림하게 되겠지요.”

“이인자가 되고 싶으시다?”

“그렇습니다.”

정광은 혀를 찼다.

“난 또 뭐라고. 기대했던 것보다 배포가 작으시네.”

“전혀 아닙니다. 현실을 봐야지요.”

나민이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진중하게 설명했다.

“진정한 일인자는 홀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허나 본교 역사상 그런 분은 전대 교주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음. 그렇긴 하죠.”

“현 교주께서도 뛰어난 분이지만 마뇌(魔腦)와 공생함으로써 교주 자리에 오르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본교를 완전히 손에 넣지는 못하셨지요. 저는 마뇌보다 조금 더 큰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럴 능력은 되세요?”

“지략은 모자라지만 행정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얼마나요?”

“지금도 크게 부족하진 않으나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럼 저만 능력이 있으면 되는 거네요.”

정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이게 아니지. 제가 싫지는 않다고 하셨으니 이미 능력을 증명한 건가.”

나민이 인정했다.

“그 연배에 그 정도 무력과 배포를 지닌 이는 못 봤습니다.”

“겨우 그거에요?”

“무슨 말씀입니까?”

정광은 나민의 특이한 눈을 빤히 바라봤다.

“아까와 지금은 자제하시는데. 그 눈으로 어제 내게서 뭘 봤죠? 뭘 들여다봤냐고 물으면 빠르려나.”

“……!”

나민의 크고 새카만 동공이 확대됐다.

“놀라시는 걸 보니 의외인가 보네. 그 능력, 아무에게도 안 들키게 숨겨오신 거예요?”

“…….”

나민이 눈을 깜빡이자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능력이라니요?”

“능청 잘 떠시네.”

정광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오로나가에선 기감이 기이할 정도로 발달해 사람의 심성이나 기운을 그럴듯하게 맞추는 분들이 가끔 태어나죠. 제일 최근을 꼽자면 전전전대 가주님이 그러셨고. 당대엔 소저시네요.”

나민이 화사하게 웃었다.

눈은 웃지 않는 묘한 웃음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저는 아닙니다.”

정광도 웃었다.

“말이 길어지니 이렇게 하죠. 그런 걸로 가정하는 거예요.”

“……무슨?”

“제게서 뭘 봤죠?”

“집요하시군요.”

“가정해 보자니까요, 가정.”

정광은 정말 궁금했다.

‘사마련주 사지환이 비슷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네 눈 속에 가라앉아 있는 기운을 보니 확신이 드는구나.”

“뭐가 가라앉아 있길래요?”

“피.”

나민의 대답도 비슷했다.

“귀하를 본 느낌을 재미 삼아 말해보겠습니다. 피를 봤습니다.”

“흐음. 그리고요?”

사지환은 ‘놀랍군. 정기(正氣)와 마기(魔氣)가 공존하다니’라고 중얼거렸었다.

나민도 그렇게 말하면 죽여서 입을 봉해야 했는데…….

그녀의 말은 달랐다.

“준수하게 생기셨지요.”

“음, 부정하지 못하겠네.”

나민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이제 제가 물을 차례군요. 왜 제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실제로 그러니까.”

“…….”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껏 능력을 숨긴 건 살아남기 위해서죠?”

“……!”

“아까 보니까 소가주께서 속이 좀 좁으신 것 같던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실까요?”

“이것도 가정입니까?”

“현실인데.”

나민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가정이라 치고 말씀드리지요. 그 전에 제가 아버님께 먼저 말씀드리면…….”

정광이 웃었다.

“하하. 가주께선 본인을 속여왔다고 더 화내실 것 같은데.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죽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헉!”

정광은 마기를 끌어 올리며 나민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쓰는 쪽보다는 무공에 더 도움이 되는 능력인데 억지로 숨기며 살다 보니 사람을 제대로 못 보게 됐네.”

나민은 마기의 그물에 얽혀 미동조차 못 했다.

정광은 그녀의 눈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제안했다.

“내가 제대로 쓰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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