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2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승자와 패자가 사람과 시체로 갈라지는 일이 계속되다가 동귀어진(同歸於盡)한 두 소년을 마지막으로 오늘 예정되어 있던 생사투가 모두 끝났다.
정광은 전날처럼 도박꾼들에게 개평을 나눠주고 그 고결한 덕을 칭송받았다.
“역시 진혼이야. 도박의 도를 안다니까.”
“자네가 따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배가 아프진 않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신기한 일일세.”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돈을 잃은 분노와 재물을 향한 탐욕 때문에 눈이 뒤집힌 몇몇 마인들이 정광에게 달려들었다가 관엽과 자오 선에서 정리됐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군거렸다.
“쿠차에 대해 알려면 독비귀도를 보라는 말이 있다더니 과연.”
“강하고 잔인해.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고이륵단가와 싸우고 잘린 제 팔을 씹어먹었겠지.”
“나는 혈조 저자가 더 눈에 들어오네. 중원 사파무림에서 구르다가 쿠차로 흘러들어 왔다던데 대단하지 않나?”
“아! 꽤 오래 두문불출하다가 나왔다는 그자? 손속이 날카롭지만 밋밋한 면이 있더라니. 사파 출신이어서 그랬군.”
“가만. 그러고 보니 흑조가 안 보이네. 어디 간 거지?”
“그건 또 누군가?”
“자객질을 하며 구차하게 살다가 진혼을 만나 개과천선한 영감일세. 잡스러운 마공에 능했는데 운수대통해서 오래전 멸문한 북천호가(北天扈家)의 비급을 주웠다더군.”
“뭐? 마도칠대가문 중 하나였던 북천호가?”
“본인은 그렇게 주장하나 본가가 아닌 방계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야.”
“음. 오의가 빠진 마공이라는 말인가. 아니,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런 비급을 가지고 있으면 당장 멱을 따고 빼앗아야지!”
“다 익히고 태웠다 들었네.”
“머릿속에는 있을 것 아닌가?”
“너무 늙어서 치병 증세가 있다는데 그 영감 말을 어떻게 믿겠나?”
“빌어먹을. 좋다 말았잖아.”
관엽, 자오, 흑서에 대한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관엽에 대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나 다른 두 사람에 관한 정보는 아니었다.
정광이 우루무치로 오면서 적절히 꾸며 흘렸던 얘기들이 순식간에 퍼져 진실로 굳어버린 것이다.
‘중원이나 여기나 떠드는 걸 좋아하는 건 똑같지.’
정광이 뜻대로 이뤄진 광경을 둘러보며 만족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민현유가 새로운 말과 마차를 끌고 왔다.
“대인, 기존 마차에는 판돈을 더 이상 실을 공간이 없어서 가져왔습니다.”
“잘했어. 독두, 부탁해요.”
“부탁이라니요. 소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독두는 정광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고 수하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싣지 않고.”
독두의 수하들뿐 아니라 다른 전주들의 수하들도 달라붙었기에 금방 끝났다.
정광은 기존 마차와 새 마차를 번갈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이면 또 늘어날 텐데 귀찮네. 어느 정도는 넘겨야겠어.’
고개를 돌려 보니 단영이 오로나가 대장원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단 소가주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단영에게 집중됐다.
단영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정광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차를 두 대씩이나 끌고 다니긴 싫어서요. 마차 한 대 분만 전표로 좀 바꿔주세요.”
단영은 정광의 의도를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문의 신용을 올려주려는 것 아닌가?
귀찮은 짐도 대신 옮기게 하고.
재빨리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너무 과합니다.
-과하긴. 이 정도는 해야 다들 머릿속에 박히지. 찔끔찔끔해서 언제 손님을 모으려고?
-…….
확실히 그렇긴 했다.
단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육성으로 말했다.
“본가를 믿고 또 맡겨줘서 고맙네. 고액권과 소액권을 적절히 배분해서 주면 되겠는가?”
“네. 가치 좀 잘 쳐주세요.”
“하하.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다른 이도 아닌 자네를 내가 어찌 냉대할까. 가치를 매겨야 하니 내려주게.”
정광은 자연스레 독두를 바라봤다.
독두는 눈치가 무척 빨랐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내리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짜증이 났으나 어쩔 수 있나.
수하들은 썩은 표정을 숨기려 애쓰며 마차에 실었던 재물들을 다시 내렸다.
단영은 식솔들과 함께 재물의 가치를 매겼다.
그리고 정광에게 전표 뭉치를 건네줬다.
“여기 있네.”
“수고하셨어요.”
“자네가 수고했지.”
“그렇긴 하네요.”
“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독두의 수하들은 금은보화를 다시 마차에 실었고, 입을 떡 벌리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정신을 차리고 웅성거렸다.
“저렇게 많은 금은보화를 전표로 바꿔? 단가를 정말 단단히 믿는가 보군.”
“진혼은 단가의 빈객이잖아.”
“돈 앞에서 그딴 관계가 무슨 소용이야? 단가가 믿을 만하니까 저러는 거지.”
“확실히 편해 보이긴 하네. 마차 한 대 분량의 재물이 저렇게 작고 가벼워졌잖아. 만약 칠대가문이 전부 전표를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써볼 만하겠어.”
단영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짓다가 눈을 빛냈다.
‘저자가 왜?’
키가 크고 인상이 차가운 중년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로나가 소가주 나문욱이었다.
단영은 그를 주시하며 담담히 물었다.
“나 형,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단 아우가 아니라 진혼에게 용무가 있네.”
“저요?”
정광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나문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워서 말일세. 누가 이길지 귀신처럼 맞추더군.”
“소가주님도 누가 이길지 거의 예상하셨을 텐데요.”
“자네만큼 많이 맞추지는 못했어. 비결이 뭔가?
“정확한 정보와 제대로 된 안목요.”
“정보의 양과 질은 별 차이가 없었을 테니 내 안목이 자네보다 떨어진다는 말인가?”
“제 운이 소가주님 것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문욱의 눈에 냉기가 맺혔다.
“자네, 생각보다 더 재밌군. 아버님께서 흥미를 느끼실 만해.”
“가주님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잠깐 식사라도 하며 연을 쌓고 싶다 하셨네.”
“어디에서요?”
“당연히 본가지. 설마 싫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있나.
당당히 대장원에 들어가 내부 구조를 파악할 기회 아닌가?
“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 아니에요. 어른이 청하시는데 가야죠.”
“…….”
나문욱은 정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른 이들을 둘러보고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하나 있군.”
“뭔데요?”
“자네 일행도 함께 가는 게 낫겠어. 자네 없이 금은보화가 가득한 마차를 끌고 객잔으로 가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정광은 그제야 확신하게 됐다.
나익승과 나문욱은 서로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나를 청한 건 가주 놈이겠지만 내 일행에게 용무가 있는 건 네놈이라는 얘기네.’
말이 일행이지 섬랑 단 한 명을 원하는 것이리라.
‘보는 눈이 많으니 다짜고짜 뒤통수를 치진 않겠지.’
그래도 확신할 순 없었다.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려고 하는 가풍이 어디 갈까,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 했다.
‘일이 터지면 자오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거고 관엽과 현유는 복수해주면 돼.’
그리고 섬랑은…….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
“……?”
섬랑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정광의 전음이 그만큼 무거워서였다.
그 모습을 본 나문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녀석이 저를 무척 따르거든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니까요.”
“사제지간을 넘어 부자지간 같군.”
“계약 관계인데요.”
“그런데도 그렇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사소한 정도 오래 쌓이니 커지더라고요.”
“……좋은 일이군. 아주 좋은 일이야.”
“밥도 항상 옆에 붙어서 먹으려고 해서 곤욕스럽지만 어쩔 수 있나요. 날이 어두워지니 춥고 배고프네요. 어서 가시죠.”
나문욱은 정광과 섬랑을 번갈아 보고 신형을 돌렸다.
“따라오게.”
정광 일행과 단영 일행은 각자의 마차를 끌고 장원에 들어갔다.
마도칠대가문에 속하는 오로나가답게 장원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정광은 장원 곳곳을 둘러보다가 추억에 잠겼다.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완전히 변했어.’
과거 전전전대 가주 놈을 때려죽일 때 불을 질러 홀랑 태웠거늘, 이렇게 화려하게 다시 꾸며놓다니.
괜찮은 진법도 많고 그럴듯한 기관장치도 많았다.
몰래 숨어들어 왔다가 목표물을 죽이고 빠져나가려면 상당한 고생을 해야 할 터.
‘역시 옛날처럼 깡그리 태워 버리고 시작하는 게 나으려나.’
그때, 안내하던 나문욱이 근처에 있는 큰 전각을 가리켰다.
“저기서 기다리고 계시네. 가세나.”
“네.”
“단 아우는 숙소로 가서 푹 쉬고. 내일 보세.”
“……!”
단영이 나문욱을 쏘아봤다.
나문욱은 마주 노려보며 찬찬히 설명했다.
“아버님께서 진혼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하셔서 어쩔 수 없다네.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나.”
단영은 차갑게 경고했다.
“진혼은 본가의 빈객이자 할아버님께서 아끼시는 소중한 고객이외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오.”
나문욱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협박하는 것인가?”
“충고하는 것이오만.”
정광이 끼어들어 냉랭한 분위기를 깼다.
“자. 자. 나 소가주님, 흥분하지 마세요. 단 소가주님도요. 칠대가문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잖아요.”
“…….”
“나 소가주님은 진정하신 것 같고. 단 소가주님, 설마 나가에서 다른 가문의 빈객이자 귀중한 고객인 사람을 암습하거나 그 일행을 해치겠어요? 그런 개도 부끄러워할 만한 후안무치한 집안이 칠대가문에 속해 있을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
누가 들어도 나가를 돌려 까는 말 아닌가?
냉정을 유지하던 나문욱이 화를 내려는 그때!
큰 전각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말이 맞다. 본가는 그런 가문이 아니야.”
“보세요. 가주님도 그렇다고 하시잖아요.”
“그래, 내가 보장할 테니 그만 들어와라. 요리가 식고 있어.”
가주가 이렇게 공언하는데 어쩔 수 있나.
단영은 힘겨루기를 끝내고 숙소로 향했고 정광 일행은 전각에 들어갔다.
안에는 노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호리호리한 나익승과 땅딸막한 노인이었다.
정광은 한눈에 그들을 담고 판별했다.
‘나익승이야 그렇다 치고. 저놈도 제법이네.’
땅딸막한 노인은 고수였다.
흑서의 은신을 알아챘다던 대원로인 게 분명했다.
먼저 들어간 나문욱이 아비에게 설명했다.
“아버님, 진혼의 사정을 고려해 일행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잘했다.”
나익승과 정광의 시선이 부딪혔다.
정광은 나름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자리에 앉아라. 먹으며 얘기하자.”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잘 먹을게요.”
정광은 의자에 앉아 자오에게 손짓했다.
“혈조, 은자 몇 개 만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단주.”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광은 은자를 손으로 주무르다가 손가락 두 개로 쭉 훑는 행동을 반복했다.
오래지 않아 은젓가락들이 완성됐고 그것들을 일행에게 나눠줬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익승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독을 풀었을까 봐 두려운 것이냐?”
“설마요. 은젓가락을 써야 요리도 더 맛있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항상 이러는데요.”
“때와 장소를 가려라. 자신감과 만용은 종이 한 장 차이야.”
“네, 앞으로 주의할게요. 드시죠.”
양측은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정광은 배를 어느 정도 채우자 나익승을 응시했다.
“식사를 함께해서 연을 쌓았네요. 이제 가도 되죠?”
“조금 더 쌓아야지. 왜 역용을 하고 있느냐?”
“대부분 몰라보는데 역시 가주님이시네요.”
“참 대단한 역용술이야. 그런 것을 펼치고 있으니 네 정체가 더 궁금해지는구나.”
“낯을 많이 가려서요. 역용을 하면 용기도 더 나고 뻔뻔해져서 이러고 다녀요.”
“묵영권가의 무공에는 그런 역용술이 없을 텐데.”
정광이 싱긋 웃었다.
“그곳 무공만 배울 의무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나익승은 정광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마.”
“감사합니다.”
“묵영권가의 후인이 등장하고 북천호가의 비급을 익혔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네 경우는 단가의 태상가주와 소가주가 사실이라고 공언했고 흑조라는 자는 내가 직접 봤지. 문헌으로 전해지는 북천호가의 것과 흡사한 느낌의 은신술을 쓰더구나. 무척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긴 하네요.”
“더구나 그 둘이 함께 행동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공교로운 걸 넘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그래서요?”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네?”
나익승의 전신에서 위엄 있는 기세가 일어났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효웅의 기세였다.
“단가가 그랬듯이 상관없어. 살다 보면 더한 우연도 많이 일어난다. 우연이 아니라 해도 내가 통제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괜찮아.”
“시원시원하신 걸 넘어 화끈하시네요.”
“너와 네 일행을 내 손에 넣고 싶다.”
“저는 단가의 빈객인데도요? 단가와 싸우시려는 건 아니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나익승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겐 혼기가 찬 어여쁜 딸이 있거든. 민아! 들어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