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20화 (419/569)

2부 149화

솔직하고 대범한 청년

아들인 손병권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손자인 손강에게 기대를 걸었다.

마침 멸혼생사투라는 기회가 왔고 손강이 우승할 수 있도록 손웅을 자객으로 키웠건만 겨우 이차 예선에서 죽어버리다니.

놈의 승리에 걸었던 보석들을 잃게 됐다.

손재등과 토로번손가의 체면 또한 시궁창에 처박혔다.

여기까지만 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거늘, 손병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작성한 차용증으로 또 장난질을 쳐?

‘진혼…….’

천하에 이런 악귀가 있나.

일부러 패배할 쪽에 차용증을 걸어서 잃고, 승리한 도박꾼들에게 넘겨 빚쟁이로 만드는 악독한 수법에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빚쟁이들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해서였다.

“손가주! 귀가의 소가주가 장인(掌印)을 찍은 차용증이 여기 있소!”

“몸이 안 좋아 안정을 취하고 있다 들었는데 자고로 자식이 진 빚은 부모가 갚는 법 아니오?”

“다음 판에 걸 돈이 필요하니 어서 주시오!”

손재등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이 비루한 것들이 감히 나를 겁박해?

지지도 않은 빚을 내놓으라고?

마도칠대가문의 가주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따를 수 있나.

숙였다간 이놈들은 물론이오, 다른 이들까지 손가를 우습게 볼 게 뻔했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도박꾼들을 노려봤다.

놈들이 깜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꼴을 감상하며 조소했다.

“하하하.”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버러지들이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 너무 재밌어서 화가 날 정도야.”

손재등은 오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본가는 빚 따위 진 적 없다.”

“……!”

“그렇게 알고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 알아들었느냐?”

손재등은 살기를 발산하여 도박꾼들을 압박했다.

그 지독한 살기를 누가 감당할까?

정광이 감당했다.

“노안이 오셨나. 이거 안 보이세요, 이거?”

팔락팔락-

높이 들어 올린 차용증이 바람을 맞아 팔락거렸다.

“이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손재등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네가 병권이에게 누명을 씌워 만든 것 아니냐?”

“누명이라뇨? 진짜 너무하시네.”

정광은 두 팔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차용증 작성할 때 보셨던 분들 계시죠? 손가주께서 저를 핍박하시는데 어떻게 된 건지 증언 좀 해주세요.”

사람들은 손재등의 위세에 눌렸으나 그만큼 반감이 커진 상황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열어 그날의 얘기를 쏟아냈다.

“손가 소가주가 진혼의 전표를 빼앗았소!”

“단가에서 발행한 전표였기에 단가 소가주도 독으로 암습했소이다!”

“돈을 핑계로 묵영권가의 후인을 죽여 교주에게 과잉 충성하려는 것이었소!”

“목격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손가주! 그런데도 계속 부정할 것입니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단영이 내공을 끌어 올려 쐐기를 박았다.

“전부 사실입니다! 소생이 이미 가주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손재등은 증언하는 자마다 쏘아보다가 단영을 힐난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그렇습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네도 의심스러워. 진혼은 단가의 빈객 아닌가?”

“제가 진혼과 음모를 꾸미고 입을 맞추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말하는 걸 보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군.”

단영이 눈을 요사하게 빛내며 일어섰다.

그의 식솔들도 일어섰다.

“귀가의 소가주가 저를 암습했지만 양가의 우의를 생각해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돌려주시는군요.”

손가 무인들도 일어났다.

손재등이 으스스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선의를 악의로 돌려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시험해 보시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봤다.

양측 식솔들도 상대를 향해 기세를 키웠다.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던 정광이 도박꾼들에게 외쳤다.

“단가 소가주께서 나서주셨는데 빚을 받아야 할 당사자들이 가만히 계시면 어떡해요?”

“……!”

“저도 모욕을 받아서 참을 수가 없네요. 가죠!”

“…….”

도박꾼들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단가도 있겠다, 진혼도 함께하겠다, 무엇이 두려우랴?

다들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심후한 내공이 담긴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다음 대전자들을 호명하지 않고 뭐 하는가?”

“……!”

이미 추첨을 해놓고도 장내 상황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가 무인이 급히 외쳤다.

“양소구! 주용진! 두 사람은 비무대 위로 올라와라!”

사람들은 나가 무인도, 호명된 아이들도 보지 않았다.

생사투를 다시 시작하라고 명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노인을 주시했다.

천막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몸을 일으켜 군중을 둘러봤다.

그의 입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멸혼생사투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할 말이 있으니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시게.”

단영이 노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가주.”

오로나가 가주 나익승은 무표정으로 답했다.

“자네와는 나중에 얘기하지.”

나익승의 시선이 손재등에게 향했다.

“손 형. 내 부탁 하나 하리다.”

손재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하시오.”

“교주께서 본가에 멸혼생사투 이차 예선을 맡기셨소. 본가로선 아무 문제 없이 공정히 치러야 하오. 이해하셨소?”

손재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렇소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렇게 되게 도와주시오.”

나익승은 정광의 손에 들린 차용증과 증언했던 자들을 가리켰다.

“손 형의 상대 쪽은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소. 손 형에겐 무엇이 있소이까?”

“누명을 쓴 것이라 말했잖소.”

“심증이 아닌 물증이 필요하오.”

“나 형, 정말 이렇게 나올 것이오?”

“어쩔 도리가 없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아실 것이오.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 명분이 어느 쪽에 있는지.”

“…….”

손재등은 할 말이 없었다.

누구라도 뚜렷한 물증이 있는 쪽을 편들지, 아무것도 없는 쪽을 비호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렇지, 본가를 이렇게 내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삭였다.

언젠가 이 빚은 갚아주고야 말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똑바로 보며 기억했다.

도박에 미쳐 감히 손가를 능멸한 놈들.

간교한 계략에 속아 거짓 증언을 한 놈들.

모두의 앞에서 잘잘못을 판정한 나익승.

일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요설을 늘어놓은 단영.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진혼이라는 악귀까지.

손재등은 악귀를 노려보며 아우 손재우에게 명했다.

“돈을 내줘라.”

“…….”

“무엇 하느냐? 어서 꺼내지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모르던 손재우가 전음을 보냈다.

-가, 가주. 아까 손웅에게 걸었다가 다 잃었습니다.

-무어라?

-저, 전부 걸라고 하셔서…….

-……!

다 걸라 했다고 전부 걸어?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융통성이 이렇게 없어서야 뭐에 써먹는다는 말인가!

손재등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럼 빨리 가져와야지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장원에 있는 식솔들에게 받아와! 어서!

-다, 다 모아도 그만한 금액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되는대로 모아와! 모자라는 것은 어떻게든 만들고!

그럴 필요 없었다.

악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까 다 쓰신 것 같네요.”

“……!”

“빌려 드릴까요?”

“필요 없다. 곧 가져올 것이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곧!”

“어쨌든 지금 바로는 아니네요. 거참. 이거 어쩌지? 다들 빨리 받아서 생사투가 시작되기 전에 걸어야 하는데…….”

정광의 말에 도박꾼들의 몸이 달아올랐다.

한 중년인이 나직이 투덜댔다.

“뭐야 이거? 안 내놓으려는 거 아니야?”

중년인에게 손재등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꽂혔다.

“입조심해라!”

“윽! 그러면 빨리 주시오. 괜히 얼굴 붉힐 필요 없지 않소?”

여기저기서 중년인의 말에 찬동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뜻밖에도 악귀가 그들을 말렸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설마 명망 높으신 손가주께서 빚을 떼먹으시겠어요? 잠시 자금 융통에 애로가 있으셔서 그런 거니 시원하게 도와드리고 끝내죠.”

정광은 단영에게 눈짓했다.

단영은 그 뜻을 알아듣고 즉시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손재등에게 내밀었다.

“가주, 제가 빌려 드리겠습니다.”

“…….”

손재등은 단영을 뚫어져라 노려봤고 단영은 한 번 더 정중히 권했다.

“칠대가문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 아닙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빌려 드릴 테니 우선 급한 불을 끄시지요.”

“…….”

“받기 부담스러우십니까? 정 그러시면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본가에서 전장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편견을 버리고 지켜봐 주십시오. 그리고 쓸 만하다 싶으면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탄했다.

“쾌섬혈화(快閃血花)가 그 배분에선 인재 중의 인재라더니 과연.”

“마음 한번 넓네. 정파의 위선자들도 저렇게는 못 할 텐데.”

“저런 위인이 전장 사업을 하겠다고? 흐음. 무작정 비웃을 일이 아니잖아.”

“가주, 뭐 하시오? 어서 받지 않으시고. 이러다 날 새겠소.”

손재등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번엔 다른 길이 없으니 넘어가 주마. 하지만 다음엔 반드시…….’

정광이 재촉했다.

“손가주님, 빨리요. 생사투 출전자들이 채비를 거의 끝냈어요.”

손재등은 이를 부서져라 악물었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네놈부터 능지처참 해주마.’

* * *

손재등은 가솔들을 이끌고 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도박꾼들이 돈을 걸고 생사투가 시작됐다.

만일을 대비해 멀리 피해 있던 자오와 섬랑이 천막으로 돌아왔다.

정광은 섬랑의 작은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손가 놈의 머리통을 박살 내버릴 기회였는데 아쉽네.’

그래도 아무 소득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단가가 전장 사업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오로나가 가주 나익승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싸움을 막은 건 본인 입장이 있으니 그래야 했을 테지만 손가 놈을 미적거리지 않고 깨끗이 털어냈어.’

토로번손가는 현 교주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세력.

그들을 이렇게 내친 건 오로나가가 교주 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긴. 꼴에 욕심은 많아서 누가 머리 위에 있는 걸 싫어하는 꼬마였지.’

오래전 나익승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팼던 기억이 났다.

그 후 놈은 정광과 만나게 될 때마다 눈을 깔아 시선을 안 마주치려고 했지만,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기에 몇 번 더 팼었다.

‘무공이 꽤 늘었는데 다른 놈들은 어떨까?’

내친김에 단영의 그림자에 은신해있는 흑서에게 물었다.

-흑서.

-만세만세만만…….

-시끄러워. 나가에서 네 은신을 알아챈 놈이 몇이나 있지?

-가주와 대원로, 둘뿐입니다.

-흠. 역시 그 밑의 놈들은 힘들겠지. 수고해.

-존명! 그, 그런데 지존. 언제까지 이 애송이를 호위해야 합니까?

-해야 할 때까지. 싫어?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응.

정광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 나익승을 주시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나익승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나익승이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것이다.

‘태연한 척하기는. 역시 써먹기 좋은 놈은 아니야. 어떻게 처리할까?’

손재등에게 뿌렸던 미끼를 녀석이 이어 먹었으니 어떻게 나오나 보고 정해야겠다 생각하는데…….

‘음?’

나익승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이 정광을 힐끔 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과 가무잡잡한 피부보다 다른 부분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저 눈은…….’

그때, 섬랑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인. 언제까지 쓰다듬으실 거예요?”

“응?”

“머리가 엉망이 됐네. 그만 좀 치워주시죠.”

“응.”

정광은 아무 생각 없이 섬랑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뗐다.

자오가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다가 섬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말이 맞지? 단주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하시는지 이제 느껴지느냐?

섬랑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딴청을 부리다가 눈을 빛냈다.

“아! 끝났네.”

한 소년이 죽고 한 소년이 살았다.

당연히 정광은 돈을 땄고 똑같은 과정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해가 지기 시작해 차가운 하늘이 진홍색 노을로 물들 때, 나가 무인이 오늘의 생사투가 끝났음을 알렸다.

“모두 수고하셨소! 내일 같은 시간에 시작할 테니 그때 봅시다!”

사람들은 환호하거나 탄식했다.

정광은 대머리 장한에게 다가가 고생했다고 위로하고 말을 이었다.

“전주님. 제가 살짝 많이 딴 것 같은데 잃은 분들에게 개평을 좀 나눠주세요.”

“대인의 몫에서 말입니까? 얼마나 그러면 되겠습니까?”

정광은 금액을 말하고.

전주와 도박꾼들은 입을 살짝 벌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전주였다.

“대, 대인.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뇨. 그 정도는 돼야죠.”

물주가 그렇다는데 할 말이 있나.

전주는 개평을 나눠줬고 뜻밖의 횡재를 한 사람들은 정광을 칭송했다.

“진혼! 자네 정말 시원시원하군!”

“고맙소! 잘 쓰리다!”

정광이 받아쳤다.

“그래야 내일도 즐기실 거 아니에요. 많이 따시되, 잃으실 거면 저한테 잃어주세요.”

도박꾼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 대범한 청년인가?

정광이 판돈으로 차용증을 걸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도 전부 용서하게 됐다.

“하하! 내일은 쉽지 않을 걸세!”

“각오 단단히 하고 오게나!”

“네, 기대할게요. 내일 봬요.”

이제는 가야 할 시간.

정광은 일행과 함께 황금마차를 끌고 떠나려다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신형을 돌렸다.

아까의 여인이 특이한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정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네.’

아주 오래전에 봤던 흰자위가 거의 없는 새카만 눈.

가만 놔둘 수 없어 직접 죽였던 눈이 정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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