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19화 (418/569)

2부 148화

영원한 신화는 없다

이번 생사투에 호명된 아이들은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묵영권가의 유일한 적자 섬랑과 마도칠대가문에 새로 올라선 토로번손가의 방계 손웅이었다.

헌데 진혼이 섬랑에게 판돈을 전부 걸고 바꾸지 않겠다고 천명하며 손가를 도발하는 것 아닌가?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손가 가주 손재등에게 모였다.

느닷없이 일어난 사태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손재등은 거대 가문의 수장다운 풍모를 드러냈다.

그냥 무시한 것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까 잔뜩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김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진혼은 아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대 가주께서 조심스러운 성품으로 유명하셨다고 들었는데 가문 내력이 그런가 보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

손가 전대 가주가 너무 조심스러워 답답할 정도였던 건 맞지만 현 가주는 달라서였다.

“하긴. 거대 가문을 운영하려면 그래야겠지.”

이번엔 모두 동의했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게 많아지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귀한 집 자제가 아니니까 막 질러도 상관없고. 얼마나 다행이야?”

뭐?

진혼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두 팔을 벌렸다.

“다들 뭐 하세요?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생사투 시작하기 전에 어서 거시죠.”

사람들은 진혼을 멍하니 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손가처럼 있는 집 애들이나 몸을 사리지. 우리처럼 없는 놈들이 잃어봐야 얼마나 잃는다고 망설인단 말인가?

“으하하하! 좋아! 탈탈 털어 넣어주마!”

“나도! 건곤일척의 승부다!”

너 나 할 것 없이 돈을 걸었다.

대머리 장한뿐만 아니라 모든 전주들에게!

수수료를 먹고 사는 전주들은 함박웃음을 지어야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섬랑에게 걸겠소!”

“내 것도 섬랑에게!”

“너도? 나도!”

“빨리 받아줘! 어서!”

모두 한쪽으로만 거는데 도박이 성립할 리 있나.

대머리 장한과 전주들은 열심히 돈을 받고 목패를 내주다가 두 손을 들었다.

“섬랑에게만 걸면 어떡하오! 손웅에게도 좀 거시오!”

“일차 예선 때 어땠는지 못 들으셨소? 손웅이 이길 확률이 훨씬 높소이다!”

“꾼이라 자처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꾼답게 행동하시오!”

전주들의 말은 구구절절이 다 옳았으나 사람들은 코웃음 치며 섬랑만 외쳤다.

“누굴 호구로 아나!”

“싸움이 실력만으로 결판나면 누가 미쳤다고 도박을 하오?”

“섬랑은 진혼의 제자나 마찬가지야! 숨겨놓은 한 수는 있다고!”

“그 불패도수(不敗賭手) 진혼이 걸었잖아! 반대로 가면 바보천치지!”

전주들은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도 구구절절이 다 옳지 않은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대머리 장한이 전주들을 대표해 파장을 선언했다.

“내기가 성립되지 않소! 이번 판은 넘어갑시다!”

이미 불이 붙은 도박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딨소? 어서 판을 벌이시오!”

“어떻게 말이오? 방법이 없지 않소!”

“이번엔 딸 수 있어! 딸 수 있으니 어떻게든 해보라고!”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자꾸 이러는 겐가!”

도박꾼들은 억지를 부리고 전주들은 정론으로 맞섰다.

분위기가 흉흉해질 수밖에.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오고 살기가 솟구치는 그때.

맑은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손가에서 식솔을 믿고 돈을 걸면 아무 문제 없는데.”

“……!”

그러게.

사람들은 일제히 손재등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손웅에겐 걸고 싶지 않은 상황, 손가가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인가!

힘의 차이가 있는지라 칼을 목에 들이대고 협박하진 못했지만 투덜거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거참.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저래?”

“손웅이 불쌍해 죽겠네. 이런 취급을 받고도 싸우고 싶을까?”

“시원하게 딱 한 판만 달리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야.”

“배포가 이 정도인 거지. 마도칠대가문의 말석도 과분, 허억!”

작게 비아냥거리던 한 마인이 헛바람을 토했다.

손재등이 쏘아낸 살기에 타격을 받은 것이다.

“으윽. 으…….”

그는 신음을 흘리며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숨었다.

손재등은 그에게서 신경을 끊고 진혼을 노려봤다.

‘사람 마음을 능숙하게 가지고 노는군. 병권이를 잡은 음모도 단영이 아니라 저놈이 꾸민 게 맞을 게야.’

저 나이에 벌써 저런데 더 크면 어떻게 될까?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하는 놈이었다.

‘저것들도 문제인데…….’

도박이나 일삼는 놈들이 감히 가문을 무시하다니.

일거에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자리도 자리인 데다 식솔을 많이 데려오지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소심했던 아비의 그늘을 걷고 일어나 가문을 키워 나가는 판국에 낮은 평가를 받을 순 없었다.

힘은 무력과 금력만이 아니라 명성도 포함된 것.

중인 앞에서 한번 눌러 손가를 각인시켜야 했다.

‘섬랑이라…….’

손재등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처음 봤을 때 판단했듯이 근골은 훌륭하나 내공도 성품도 안 좋고 너무 어린 녀석이었다.

‘개싸움을 잘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들었지만 저런 꼬마에게 손웅이 질 리 없어.’

손웅은 다른 칠대가문의 적자와 동귀어진할 수 있도록 방계에서 고르고 골라 대법을 펼치고 비기를 전수한 아이였다.

그 비기를 이깟 예선에서 쓸 순 없으나 그것 없이도 비슷한 연배에선 충분히 강한 것이다.

손재등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 삼아 한번 놀아주지.”

“……!”

그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역시 손가야! 믿고 있었다고!”

“어서 거시오! 어서!”

정광도 만족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다.

싸울 채비를 마치고 비무대로 가려는 섬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돈을 걸 때까지 시간 좀 끌어. 그래야 너도 버는 거 알지?

알다마다.

섬랑은 생사투를 주관하는 나가 무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기를 다시 고르는 척했다.

그사이 손가에서 움직였다.

오만한 손재등이 이런 일에 직접 나설 리 있나.

아우 손재우가 대머리 장한에게 다가가 탁자 위에 전낭을 툭 던졌다.

형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오만한 행동이었다.

목소리도 그랬다.

“손웅에게 전부.”

덕분에 판을 열 수 있게 된 대머리 장한은 공손히 받았으나 야유가 쏟아졌다.

“진혼 따라 하네.”

“마지못해 걸면서 무슨 유세야?”

“자, 잠깐. 봐! 다 보석이라고!”

“헉! 으하하! 역시 손가구나!”

드디어 도박이 성립됐다.

그것도 무척이나 큰 판으로!

정광은 다시 섬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됐어. 돈을 벌 시간이다. 비무대로 가.

‘…….’

섬랑이 발걸음을 옮겼다.

-관 숙수와의 비무를 떠올려. 그러면 이길 수 있어.

‘……!’

섬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흉흉한 도격 아래에서 몸을 떨며 단 한 수를 꽂아 넣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그래 봐야 관엽의 몸을 살짝 찍어 퍼런 멍이 들게 했을 뿐이지만 지난 며칠간 혼신을 다해 이뤄낸 기적이었다.

‘망할. 싸우기 직전에 쓸데없는 얘기를 하네. 괜히 위축되잖아.’

억지로 가슴을 펴고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손웅이 눈에 들어왔다.

열두 해를 꽉 차게 살며 체계적인 수련으로 다져왔을 큰 체격이 인상적…….

‘……웃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비릿한 웃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게 미쳤나.’

선물을 받았으면 최소 두 배로는 돌려줘야지.

한쪽 입꼬리를 최대한 비틀어 올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손웅의 눈에 날카로운 살기가 어렸다.

나가 무인이 두 소년을 번갈아 보며 주의를 줬다.

“상대가 더 이상 못 싸우거나 항복하겠다고 말할 때까지다.”

두 아이는 묵묵히 서로를 노려봤다.

“어떤 수를 써도 상관없다. 시작해라.”

손웅은 만도(彎刀)를 전면에 세워 전신을 가렸다.

가주가 내렸던 명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소문과 달리 포악하고 악에 받쳐 있는 놈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승부를 볼 유형이니 방심하지 말고 면밀히 방어하다가 틈을 노려 끝내.’

가주의 말대로였다.

시험 삼아 도발해 봤는데 더러운 성격을 바로 드러냈다.

이제 생사투가 시작됐으니 어떤 식으로 달려들까?

어떻게 와도 상관없었다.

‘와라! 남김없이 막아주다가 단 한칼에 보내 버…… 음?’

손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섬랑은 쌍단봉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게 아니라 손웅을 중심으로 슬금슬금 원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기회를 노려?’

놀람도 잠시. 섬랑의 움직임에 맞춰 신형을 돌렸다.

섬랑은 밖에서 큰 원을 그리고, 손웅은 제자리에서 도는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가주가 틀리고 소문이 맞는 것 같은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틈을 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간교해 보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공격하여 실수를 유도하거나 약점을 드러내게 해야 하건만.

그럴 수 없었다.

‘가주의 명을 거역할 순 없어.’

어겼다간 적을 꺾어도 엄청난 벌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어떡하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가주가 언제 지시를 바꿀지, 바꾸긴 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

‘이대로 버틴…….’

그때, 으스스한 전음이 들려왔다.

-놈이 전술을 바꿨군. 함정일 수도 있으니 여유를 두고 공격해서 시험해 봐.

하늘같은 가주의 명에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손웅은 반사적으로 두 걸음 내디디며 만도를 내려쳤다.

도신이 급격히 휘어진 도가 허공을 세차게 가르며 떨어졌다.

섬랑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묵영보(黙影步)를 펼쳐 원래 돌던 방향과 반대로 움직였다.

허탕을 친 손웅은 어렵지 않게 섬랑을 따라갔다.

원래 실력도 있거니와 가주의 명대로 여유를 두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짧은 보폭으로 추격하며 만도를 횡으로 그어 목을 노리려 했다.

그 순간, 섬랑의 눈이 빛났다.

지난 며칠간 대인이 했던 말이 다시 귀를 울리는 듯했다.

‘이차 예선부터는 상대의 질이 달라질 거야. 오래 끌수록 네가 불리해질 거란 얘기지.’

그나마 초반엔 탐색하느라 전력을 다하지 않을 테니 기회는 그때뿐이라 했었다.

‘손가 애가 더 신중하게 나오도록 수를 써보겠지만 안 되면 할 수 없어. 그래도 초반에 승부를 보는 게 나을 테니 삼초 안에 모든 걸 쏟아부어.’

관엽의 무시무시한 베기 공격을 피하며 그나마 수직으로 떨어질 때보다는 수평이나 대각으로 베어올 때 일격을 꽂기 쉽다고 느꼈다.

뜻이 세워지자 몸이 움직였다.

혈조에게 배웠던 대로 손웅의 만도가 날아오는 궤적을 향해 왼손에 쥐고 있던 단봉을 던졌다.

쩌엉!

불꽃이 튀었으나 만도는 단봉을 절단하지 못하고 멀리 날리는 것으로 그쳤다.

대인이 고이륵단가 병기고에서 가져온 것이니만큼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한 것이다.

덕분에 만도의 궤적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이미 하체를 낮추고 허리까지 숙인 섬랑은 간발의 차이로 만도를 피할 수 있었다.

머리털이 몇 올 잘리며 온몸이 오싹해졌지만 관엽의 무시무시한 도격에 비할까.

움츠리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다른 단봉을 던져 만도의 칼등을 강하게 때렸다.

따앙-

만도를 회수해 섬랑을 베려던 손웅이 눈을 크게 떴다.

섬랑은 이를 악물었다.

‘혈조와 관 숙수는 할 만큼 했어!’

이제 대인 차례였다.

대인은 섬랑의 전신에 퍼져 있던 수은망극단의 약효를 일부분 녹여 단전으로 밀어 넣기만 한 게 아니었다.

머리로 기억 못 하면 몸이 기억하면 된다고 했던가.

고통을 줘서 내공이 움직여야 하는 경로를 아예 무의식적으로 익히게 하는 악랄함이라니.

단전에 쌓여 있는 미약한 내공이 그 경로를 따라 세차게 흘렀다.

동시에 정면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진각을 밟은 게 아니라 바닥과 스치듯 내디딘 걸음이었다.

그다음은 권갑(拳甲)을 낀 주먹.

굳이 맞추기 힘든 혈도를 노리지는 않았다.

훤히 드러난 손웅의 오른쪽 옆구리, 간이 있는 곳에 질긴 소가죽에 덧댄 철편과 내공이 박혔다.

쿵!

“크헉!”

손웅이 검붉은 핏물을 토하며 휘청였다.

섬랑은 방심하지 않았다.

정을 베풀지도 않았다.

대인이 손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상 손웅은 거둘 수 없는 놈이었다.

‘잘 가라.’

소매 속에서 비수가 튀어나와 왼손에 잡혔다.

그것을 그대로 손웅의 목에 꽂아 넣고 크게 돌렸다.

서걱-

“끄륵…….”

손웅은 반쯤 잘린 목에서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섬랑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다가 승패를 판정하는 나가 무인을 쳐다봤다.

나가 무인은 살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죽였군.”

“네.”

“소문이 잘못된 것이냐, 네가 변한 것이냐?”

섬랑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씩 웃었다.

“둘 다요. 제가 이겼죠?”

나가 무인은 대답하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섬랑 승! 손웅 패! 비무대를 정리하고 다음 대결을 위한 추첨을 하겠소!”

“이야아아아아!”

섬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우와아아아아!”

도박꾼들은 두 손이 부서져라 손뼉을 치며 열광했다.

거의 항상 야유만 받던 섬랑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비틀거렸다.

내공을 한 번에 전부 발출해 버리자 현기증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쓰러지기 전에 혈조가 올라와 부축했다.

“수고했다. 아주 잘했어.”

“히히. 그렇죠?”

“그래. 단주께서도 기뻐하셨다.”

섬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머리를 긁었다.

“뭘요. 대인, 혈조 아저씨, 관 숙수 덕분이죠.”

“이젠 고마움도 표현할 줄 아는구나. 그만 내려가자.”

“어? 쪽팔리게 왜 업으려고 하세요? 그냥 부축만 해주세요.”

혈조는 육성이 아니라 전음으로 설명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어야 해.

뭐?

-단주께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셨다.

뭐를?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으니 낚아야지.

낚는다고? 돈을 딴 게 끝이 아니었어?

섬랑은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혈조가 수혈을 짚은 것이다.

정광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대머리 장한에게 다가갔다.

판돈을 정신없이 배분하고 숨을 몰아쉬던 대머리 장한이 반갑게 맞이했다.

“대인, 불패의 신화를 이번에도 쓰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뭘요. 운이 좋았을 뿐인데.”

“네? 하하! 겸손하시기까지. 저는 대인께서 앞으로도 계속 이기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때, 나가 무인이 다음 생사투 참가자로 ‘유대일’과 ‘서동균’ 호명했다.

정광은 품속에서 고급스러운 목갑을 꺼내 대머리 장한에게 건넸다.

“지금까지 번 것들은 전부 빼주세요. 이걸로 이번 판에 임할게요.”

대머리 장한은 긴장한 얼굴로 목갑을 살짝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크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큰 금액이군요, 대인! 어느 쪽에 거실 겁니까?”

“유대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바꿀 거예요. 만약 바꾸면 전주님이 가지시는 거로 해요.”

오늘 처음으로 돈을 따 희희낙락하고 있던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유대일한테 건다고?’

‘그건 아니지. 서동균이 확실히 강하잖아.’

‘가만. 진혼이 이렇게 나왔는데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정광이 그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 판은 헷갈려서 지금까지보다 적게 걸었어요.”

“……!”

“은근히 긴장되네요. 이런 판일수록 이기면 더 짜릿한데.”

“……!”

도박을 왜 할까?

단지 돈만 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겼을 때의 짜릿한 쾌감, 그것에 중독되어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승부욕이 폭발했다.

“좋아! 진혼 덕분에 땄는데 진혼 돈도 한번 먹어봐야지!”

“너 혼자 멋있는 척하냐? 나도 간다!”

“전주! 서동균에게 전부!”

모두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동균에게 걸었다.

흥분으로 들끓는 몸과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서동균 승! 유대일 패!”

“……!”

사람들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서동균이 이겼다! 진혼이 패했어!”

“불패 신화가 무너졌다!”

“우리가 깬 거야! 으하하하!”

엄청난 고양감이 전신을 치달렸다.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대머리 장한에게 돈을 요구했다.

“목패를 줄 테니 내 몫을 주시오!”

“얼마요? 진혼이 얼마나 걸었소?”

대머리 장한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광이 준 목함을 열었다.

끼이이-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달랑 종이 한 장만 들어있는 것 아닌가!

“헉!”

“뭐, 뭐야 이게!”

“말로만 듣던 전표인가? 지금 장난하는 거야?”

대머리 장한이 급히 설명했다.

“전표가 아니오! 차용증이오! 규칙상 차용증은 허용되오!”

다른 전주들도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분노할 수밖에.

“귀찮게 뭐 하는 짓이야!”

“어서 금원보로 바꿔서 나눠줘!”

대머리 장한이 딱딱한 어조로 외쳤다.

“보석을 금원보로 바꾸고 금원보를 은자로 바꾸는 건 전주의 의무이나 차용증은 아니오! 채무를 진 자에게 받아내는 수고를 대신 치를 수는 없지 않소?”

“그럼 차용증을 왜 받는데!”

“도박꾼이 돈을 다 잃으면 빚이라도 내서 또 끼는 게 당연하지 않소? 차용증은 당연히 통용되는 것이니 따져도 소용없소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이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에게 향하려 했으나 그 장본인이 먼저 나섰다.

“저는 잘못한 거 없어요.”

“……!”

“도박판의 규칙을 어기실 거예요? 별로 좋을 게 없으실 텐데.”

이렇게 큰 판에서 규칙을 어겼다간 팔다리가 날아가는 건 기본이오, 평생 그 어떤 판에도 끼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진혼은 대단한 고수 아닌가?

어차피 방법은 하나였다.

도박꾼들 중 한 명이 살기를 흘리며 물었다.

“진혼! 그 차용증을 들고 누구에게 가서 받아내면 되는가?”

“토로번손가 소가주요.”

“……!”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손병권이 진혼에게 큰 빚을 졌다더니!’

‘저 차용증이 그거구나!’

상대가 하필 손가라 켕기기는 하나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명분은 도박꾼들에게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토로번손가 가주 손재등이 있었다.

평소의 오만한 얼굴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입도 살짝 벌린 채.

정광이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채권자가 바뀌었으니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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