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6화
애쓴 만큼 얻는 게 있어야지
전주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정광은 태연했다.
민현유가 가져다준 따뜻한 물수건으로 느긋하게 손을 닦으며 지적했다.
“말씀하신 멸혼생사투 도박 규칙에 어긋나는 점은 없을 텐데요.”
“…….”
전주는 조금 전에 들었던 얘기를 가만히 따져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천하에 이런 악귀를 봤나!
규칙을 위배하는 부분은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세차게 떨렸다.
목소리도 그랬다.
“어, 엄청난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조금 시끄러워지겠죠.”
“조금이라니요? 역시 기준이 다르십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인데 전주님이 왜 걱정하세요.”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하나 불안한 걸 어쩌라고.
“납득하셨죠? 그럼 하시는 것으로 알게요.”
내가 언제!
“대, 대인!”
전주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제게 불똥이 튈까 봐 두렵습니다.”
“난 또 뭐라고. 막아드릴게요.”
“그래도…….”
“믿으세요. 지금껏 제가 입 밖으로 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나요?”
“…….”
직접 겪은 적도, 소문을 들은 적도 없긴 했다.
전주는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게 됐다.
“판을 키워 드리겠다는데 왜 이리 빼세요? 다른 분을 찾아 진행해야 하나?”
“……!”
큰 판이 벌어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전주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겁먹은 개새끼도 아니고 쪽팔리게 무슨!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바엔 이 바닥을 뜨는 게 낫지! 뭘 망설이는 거야!’
이차 예선부터는 참가자들의 수준이 올라가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판이 커진다.
그만큼 전주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자신을 콕 찍어 제안하고 있는 것 아닌가?
호기가 치솟았다.
“대인, 제가 너무 미련해 이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늦지 않아 다행이네요. 저도 연이 있는 분과 계속 일하는 게 편하거든요.”
전주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꿀꺽.
이곳에 온 순간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서로 좋겠죠. 혼자만 아셔야 해요.”
전주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입을 바늘로 꿰매는 시늉을 했다.
“제 수하들조차 모르게 함구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보단…….”
육성이 전음으로 바뀌고 눈은 주변 사람들을 훑었다.
-이곳 점소이들이 걱정입니다. 향리객잔 아닙니까? 얘기가 총단으로 새어나갈 겁니다.
-그땐 이미 모든 게 끝나고 한참 지난 후일 텐데요 뭐. 향리객잔에 대해 많이 아세요?
-제 주제에 얼마나 알겠습니까? 남들이 아는 정도만 알아서 기피할 뿐이지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전주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흠. 흠.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이왕 오신 거, 저녁 드시고 가시죠.”
“감사합니다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마음이 너무 들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조심히 가세요.”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전주가 예를 표하고 떠났다.
정광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민현유를 타박했다.
“여기가 불편해서 가는 거잖아.”
“대인이 불편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요리를 내올까요?”
“술도.”
탁자가 수많은 접시와 술병으로 가득 채워졌다.
정광은 젓가락을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했다.
“드시죠.”
섬랑은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을 주시하다가 목이 타는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대인, 미쳤어요?”
“너는 그게 막잔이야.”
“네? 왜요?”
“그 한 잔도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막지 않은 건데 뭐?”
섬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몸 관리 해야지. 대인이 하도 미친 짓을 꾸미셔서 깜짝 놀라 실수했잖아요.”
“그게 놀랄 일인가?”
정광은 고개를 갸웃하고 섬랑은 흥분했다.
“당연하죠! 사람이 어떻게 그런 흉계를…….”
“묘수를.”
“……묘수를 꾸미시는, 망할. 왜 나만 떠드는 거야? 다들 뭐라고 말씀 좀…….”
섬랑은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다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관엽도 자오도 묵묵히 요리를 먹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양반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냐, 이쯤이면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이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표정도 행동도 너무 태연했다.
큰 위험은 없을 거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 나도 대인의 성품은 몰라도 능력 하나는 믿잖아.’
뿐이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놀랄 이유도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지고한 능력을 지닌 자가 말이 안 되는 미친 짓을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섬랑의 미간에 깊게 파였던 골이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있나, 밥이 잘도 넘어갔다.
섬랑은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배불러. 대인, 저 먼저 올라가서 잘게요.”
“응. 해가 뜨면 조금 힘들어질 테니 푹 자.”
“하하. 어떤 수련일지 기대되네요. 내일 봬요.”
섬랑이 쾌활하게 웃으며 이 층으로 올라가자 자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단주를 그렇게 겪고도 아직 모르다니. 단주, 섬랑이 내일 살 수 있는 겁니까?”
“온종일 잘 먹고 푹 자게 했으니 어떻게든 되겠죠. 잘 풀리면 혈조도 도우셔야 해요.”
“뭘 하면 됩니까?”
“섬랑의 주병기를 쌍단봉(雙短棒)으로 정했거든요. 혈조가 그걸 잘 다루니 실전에 도움이 될 만한 수법을 가르쳐 주세요.”
“둔기를 택하시다니 의외입니다. 섬랑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입니까?”
“설마요.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실력이 아니잖아요.”
“그럼 날카로운 날이 있는 병기를 주병기로 삼아 적의 육신에 자상을 내고 출혈을 일으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뜻으로 그러시는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상식적으로 따지면 혈조의 말대로 하는 게 맞지만 내공 운용이 영 어설퍼서 어쩔 수 없네요.”
“아! 얇은 날붙이로 적과 붙었다간 손해를 많이 보긴 하겠습니다. 굵은 둔기로 부딪혀야 그나마 안 잘리겠지요.”
자오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질긴 소가죽에 철편을 덧댄 권갑(拳甲)도 끼게 하실 겁니까?”
“개싸움에도 꽤 도움이 되고. 운이 좋으면 위급한 순간에 적의 병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야죠.”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수빈수갑(秀彬手甲)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섬랑 복이 그거밖에 안 되는 것을.”
자오가 정색했다.
“단주께 가르침을 받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섬랑은 천하에 손꼽을 만한 행운을 거머쥔…….”
정광은 자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관엽에게 전음을 보냈다.
-백정 꼬마, 너도 할 일이 있어.
관엽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말씀하십시오, 지존.
-섬랑과 대련을 해. 토로번손가 애들이 만도(彎刀)를 쓸 때처럼 베기 위주로.
관엽의 눈이 빛났다.
-오로나가에서 섬랑이 손가 방계 아이와 싸우도록 손을 쓸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흉내를 내보겠습니다.
-의욕이 너무 넘쳐서 죽이거나 중상을 입히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응, 수고.
정광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술을 마셨다.
자오는 한바탕 수다를 늘어놓으며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다가 동의를 구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만. 단주께선 어떠십니까?”
어떻긴. 뭘 들었어야 알지.
그래도 정광은 불세출의 천재.
현명한 답을 내놨다.
“역시 혈조네요.”
“하하. 단주의 뜻도 그렇습니까?”
“엇비슷해요. 자, 그럼 관 숙수님도 섬랑의 수련을 도와주시는 거로 하고…….”
정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단가 소가주님은 흑조가 지키고 있고 이곳은 현유가 책임지기로 했지만 혹시 모르니 섬랑을 잘 지켜주세요.”
“알겠네.”
“네, 단주.”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현유와 잠시 얘기 좀 하고 갈게요.”
두 사람이 떠나고 민현유가 다가왔다.
“대인, 제가 언제 책임지겠다고 했습니까? 경비에 만전을 기하겠지만 능력 밖의 상대는 어쩔 수 없으니 이해 부탁드린다고…….”
“그게 그거지. 부탁 하나만 할게.”
“또 말입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며.”
“딱 하나만 더 있으면 된다고 하셨고 그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이라고 앞에 붙였었지. 입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얘기할까?”
“기쁜 마음으로 받들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십시오.”
정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군자금이 필요해.”
“도박 밑천이겠지요.”
“어쨌든. 빌려줘.”
“담보는 무엇입니까?”
민현유는 정광이 꺼낸 전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냥 빌려 드리겠습니다.”
“단가 못 믿어?”
“무엇을 꾸미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인의 계획이 제대로 되어야 단가도 살고 전장 사업도 이뤄지는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르기는.”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정광은 필요한 금액을 말했고 민현유는 담담히 답했다.
“대인, 여기는 객잔입니다. 그런 큰 자금을 융통할 재주는 없습니다.”
“이거 왜 이래. 뻔히 아는 사이에.”
“본 객잔에 대해 뭘 얼마나 아신다고 자꾸 이러십니까?”
“성화(聖火)가 뒷배인 것 정도는 알지.”
“…….”
민현유는 잠시 침묵하다가 세 걸음 물러나 양손을 소매 속에 넣었다.
“마도칠대가문의 소가주쯤은 되어야 듣게 된다는 이상한 헛소문을 입에 담으시는군요.”
“살기 봐라. 견문이 넓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대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으나 알아야 할 수밖에 없게 핍박하고 계십니다.”
정광은 술을 한잔 입에 털어 넣고 빙긋 웃었다.
“손 꺼내면 죽는다.”
“평생 이러고 있으란 말씀입니까?”
“그건 너무 가혹하고. 장난감 꺼내지 말란 얘기야.”
“제가 뭘 갖고 노는지도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정광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너 은근히 말 많다. 혈조와 붙여 줄까?”
“…….”
“혈조는 호기심 많고 말 많은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평생 끌려다니며 혈조 수다에 시달려 볼래? 응?”
민현유는 정광의 엄청난 살기에 대항하느라 앙다물고 있던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전부 금원보로 준비할까요?”
“금액만 맞으면 은자든 보석이든 상관없어.”
“생사투 당일 아침까지 준비하겠습니다.”
“그때면 문제없지. 수익의 일할은 네 것이야.”
민현유가 소매 속에 넣었던 양손을 천천히 꺼냈다.
아무것도 안 들린 맨손이 드러났다.
그는 그것들을 가슴 앞에 정중히 모았다.
“감사합니다, 대인.”
“애쓴 만큼 얻는 게 있어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정광이 경고했다.
“위에 보고하는 건 상관없지만 어설픈 추측은 더해 넣지 말라는 값도 포함된 거야.”
“애초에 그러고 있습니다.”
“그럼 오푼으로 줄일까?”
“앞으로도 그래야 하니 그냥 묻어두시지요.”
정광은 피식 웃으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장사할 줄 안다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제를 소개해 줘야겠어.’
* * *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섬랑은 지옥을 맛보게 됐다.
‘으아악! 사람 살려!’
입 밖으로 비명이라도 지르면 조금이나마 나으련만.
정광이 아혈을 짚었기에 속으로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정광이 아닌 자신에게!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분명 조금 힘들어질 거라고 했었는데 그걸 그냥 웃어넘겨?’
전신에 퍼져 있는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의 약효를 일부분 녹여 단전으로 밀어 넣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오에게 쌍단봉을 쓰는 법을 배우는 건 좋은데 그것으로 관엽을 상대하라니.
사람 백정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서 생사를 쉼 없이 넘나들다 보니 악에 받쳤다.
‘소교주가 되고 실력을 쌓으면 누구도 나를 이렇게 대하지 못하겠지. 봐서 이 인간들한테 복수도 좀 해주고.’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다.
심지어 옥당(玉堂)에 잠들어 있던 마(魔)가 불쑥 솟구치려고 할 정도였는데…….
자오가 위로했다.
“힘들지?”
그걸 말이라고!
“단주가 비록 성품은 그러나 내 사람이다 싶으면 끔찍이 아껴주는 분이다. 너를 그만큼 아끼시기에 이런 온갖 수고를 다 하시는 것이야.”
나를 아낀다고? 말도 안 돼!
“내가 보기에 그랬고 단주께서도 엇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인정하셨다. 고생하는 네게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구나.”
…….
머리 바로 밑까지 올라왔던 마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렇다고 자오의 말을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다.
‘물어보면 알겠지. 어쨌든 이긴다!’
사흘이 지나고.
섬랑은 위대한 대장정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다들 준비됐죠?”
정광의 말에 섬랑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대인.”
“왜?”
섬랑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으으. 물어서 될 게 아닌데 무슨.’
속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수익의 일할은 제 것이죠?”
“당연하지.”
“어서 가죠!”
정광은 웃으며 섬랑의 작은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하하. 패기 좋네. 많이 벌고 많이 죽여보자고.”
멸혼생사투 이차 예선이 열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