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5화
말이 안 되는 일
향리객잔(香梨客棧)은 객(客)이 부유해야 받아들이고, 강해야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최고의 접객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곳에서 종사하는 자가 고객에게 괜한 말을 해서 신뢰를 잃을 리 있나.
민현유가 공언했던 대로 요리와 술이 금방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탁자를 가득 채우자 정광이 후원에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다들 뭐 하세요? 어서 드시지 않고.”
정광은 사람들에게 권하며 젓가락으로 요리를 집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향을 발산했다.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벽면에 뻥 뚫린 구멍으로 매서운 찬바람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여러 요리에서 솟아오르던 김이 급격히 사라져 갔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자 민현유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목장(木匠)들이 오려면 한 식경쯤 걸릴 겁니다.”
“응.”
“임시로 수리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말입니다.”
“그래서?”
민현유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때쯤이면 요리가 전부 꽁꽁 얼어버릴 테니 그냥 빨리 드시지요.”
“그게 최선이야?”
“네, 대인.”
“생각보다 융통성이 없네. 이거 실망인걸.”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정광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후원에 쓰러져 있는 애로 구멍을 막아.”
“딱 들어맞을 리 없지 않습니까?”
“틈은 면포(綿布) 같은 것으로 메우면 되지.”
사람과 면포로 벽에 난 구멍을 막으라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민현유는 반박하려다가 자오가 건네는 금원보들을 자연스럽게 챙겼다.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대인. 뭣들 하느냐? 어서 처리하지 않고.”
“네, 도련님.”
명을 받은 점소이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창고에서 면포를 꺼내 오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후원으로 갔던 점소이가 달려와 현유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잘 접어서 구겨 넣겠습니다.”
“대인께서 살려놓으신 이유가 있을 테니 얼어 죽지 않게 면포로 칭칭 감아.”
“네, 도련님.”
점소이들은 유능했다.
구멍을 막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숯불을 담은 화로를 가져와 곳곳에 놓았다.
열기와 빛이 사방으로 퍼져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광은 만족했다.
“현유도 좀 먹지?”
“괜찮습니다, 대인. 좋은 시간 되십시오.”
“어디 가려고?”
“잠시 할 일이 있습니다.”
“몰래 숨어들어 온 저놈에 대해 보고하려는 거구나.”
벽에 끼어 있는 자를 말하는 것.
민현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전취식, 무전숙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말입니다.”
“토로번손가 애야.”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비공식적인 경로로 항의할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중에 보면 알겠지. 수고해.”
민현유는 정광을 잠시 응시하다가 예를 표했다.
“필요한 게 생기시면 불러주십시오.”
“물론이지.”
정광은 민현유가 사라지자 일행에게 술잔을 돌렸다.
“배는 채웠으니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먼저 섬랑부터.”
술을 홀짝이며 행복해하던 섬랑이 바짝 긴장했다.
“네, 대인.”
“네 방에 가서 자.”
섬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그럴 시간이 어딨다고…….”
“그러다 망가져. 쉴 땐 쉬어야지. 저녁 먹을 때까지 푹 자.”
“아! 밤이 되면 비기를 알려주시려고요?”
“저녁 먹이고 또 재울 건데.”
“말도 안 돼!”
섬랑은 항의하다가 꿀밤을 맞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으으. 알았어요, 자면 되잖아요.”
“초조해하지 마. 내가 아무 계획 없이 이러겠냐?”
아무리 독하고 똑똑해도 애는 애였다.
잔뜩 신이 난 섬랑은 ‘역시 대인’을 연발하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가만히 있던 자오가 정광에게 넌지시 물었다.
“필승 전술이 있으십니까?”
“나중의 제가 생각하겠죠.”
정광은 관엽에게 시선을 옮겼다.
“관 숙수님, 섬랑을 보호해 주세요.”
“알겠네.”
“이번엔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제대로요.”
“……!”
관엽의 무뚝뚝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존이 이렇게까지 당부하는 건 그만한 연유가 있어서일 터, 그가 생각하기에 그럴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멸혼생사투에 참가하는 다른 가문에서 섬랑을 제거하려고 할 거란 얘기인가?”
“혹시 몰라서요.”
자오도 의문을 표했다.
“단주,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섬랑이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아직 약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만 보면 그렇지만 앞을 내다봐야죠.”
정광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섬랑은 모양새는 좀 그렇지만 싸울 때마다 강해졌어요. 이차 예선에서도 그렇게 되겠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본선까지 살아남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 마도칠대가문의 적자들을 위협할 만큼 강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그건 너무 긍정적으로 보신 거고. 작은 변수쯤은 되겠죠.”
정광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특히 오로나가(烏魯羅家) 무공엔 섬랑이 상극이거든요.”
“네? 상극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죠. 어쨌든 섬랑이 잘못되면 그림을 아예 새로 그려야 해요. 생각만 해도 귀찮아지네.”
정광은 관엽과 자오를 번갈아 보며 당부했다.
“관 숙수님은 밝은 곳에서, 자오는 어두운 곳에서 섬랑을 지켜주세요. 지금부터 바로요.”
누구의 명인데 지체할까.
관엽이 충심을 담아 다짐했다.
“목숨을 바쳐 지키겠네.”
자오도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단주.”
두 사람은 즉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은 정광이 유유히 술을 따라 마시는데, 한 점소이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대인, 곧 목장들이 도착할 겁니다. 벽에서 뺀 뒤 보이지 않게 치워둘까요?”
정광은 벽에 박혀 있는 사내를 힐끗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겠지만 워낙 괴이한 모양새라 소문이 새나갈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그걸 원하는 거니까.”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목장들에게 보이고 묻으면 되겠습니까?”
“꼭 흑점(黑店) 같잖아. 평소 영업을 어떤 식으로 하길래 산 사람을 묻으려고 해?”
“오해입니다, 대인. 또 다른 용도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방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응. 현유가 돌아오면 내 방으로 보내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인.”
점소이는 정광이 내민 은자를 두 손으로 받고 조용히 물러났다.
얼마 안 가 목장들이 왔는데 벽에 박혀 있는 사내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애써 모르는 척하며 딴청을 부렸다.
정광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이 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갔다.
잠시 뒤, 점소이가 면포로 둘둘 감은 사내를 들쳐 메고 와 바닥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슬슬 시작해 볼까.’
정광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손짓 한 번으로 면포를 풀고 짚어놓았던 마혈과 아혈을 해혈했다.
“으으…… 쿨럭쿨럭.”
사내가 기침을 토하며 눈을 떴다.
그 눈에 미청년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일어났어?”
“헉!”
“얘기를 마저 끝내볼까?”
“내, 내 입은 절대 열 수…….”
정광 앞에서 끝까지 진실을 숨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사내는 듣는 사람이 피곤해질 만큼 쓸데없는 것까지 토설하고 나서야 기절할 수 있었다.
정광이 머릿속에 담긴 정보를 정리하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부르셨습니까?”
“들어와.”
현유가 건장한 점소이와 함께 들어와 의식을 잃은 사내를 슬쩍 봤다.
“저자와의 용무가 끝나신 것 같군요.”
“응.”
“이제 저희가 데려가서 친분을 다져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건장한 점소이가 사내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다.
정광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현유에게 물었다.
“보고는 끝났어?”
“그렇습니다.”
“수고했어. 그리고?”
“대인께서 궁금해하실 만한 것들을 알아왔습니다.”
“역시. 말해봐.”
민현유는 멸혼생사투 이차 예선에 대한 정보와 참가자들의 신상, 특징 등에 대해 늘어놨다.
정광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전부 외우며 섬랑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궁리했다.
민현유는 멸혼생사투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정광의 눈치를 봤다.
“대인, 잠시 쉬었다가 마저 말씀드릴까요?”
“아니. 계속해.”
“알겠습니다.”
정광을 따라온 마인들의 동향이 이어졌다.
“그들은 별다른 마찰 없이 명부를 작성하고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착해라.”
“대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어 거처를 수소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본 객잔에 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부 쫓아내려고? 바쁘겠네.”
“여기는 향리객잔입니다. 대부분 올 마음이 사라졌을 테니 담이 큰 소수만 솎아내면 될 겁니다.”
“다른 객들은?”
“돌려보낼 수밖에요.”
“고객을 너무 가려서 받는 것 같은데 괜찮겠어?”
민현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모두 대인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민현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격려했다.
“수고가 많아. 안면이 있는 애들은 내가 밖으로 나가거나 멸혼생사투가 열리는 날에나 만나겠네.”
“사고만 안 치시면 그럴 겁니다.”
“또?”
“손병권은 무리를 이끌고 그의 아비가 지내는 오로나가 대장원에 들어갔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더군요.”
“그 결과 아까 그놈을 보냈겠지. 염탐하러.”
“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겠지요. 허나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아니,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들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 걸 알게 될 테니 아주 나쁜 수는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정광도 인정했다.
“네 말대로 사석(捨石)으로는 나쁘지 않은 패였어.”
“그가 무엇을 토설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뻔한 얘기들뿐이라. 별것 없더라.”
“큰 기대는 안 했거늘 역시 그렇군요. 그래도 대인께서 미끼를 풀고 낚싯대를 드리우셨으니 입질이 오겠습니다.”
민현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사안인 오로나가의 동향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는데…….”
“내게 원한을 품은 손가가 더 중요하잖아.”
“같은 칠대가문이라 하나 그 무게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놈이 그놈 아닌가?”
“…….”
“하긴, 나가 애들이 조금 낫겠네. 그래서?”
“아직 눈여겨볼 만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전혀?”
“객잔을 지켜보는 눈이 몇 개 생겼는데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요.”
“그야 그렇지.”
민현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대인, 경비에 만전을 기하겠지만 능력 밖의 상대는 어쩔 수 없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도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 폈다.
“지금은 딱 하나만 더 있으면 되거든.”
“안 여쭤봐도 됩니까?”
“알면서 왜 그래.”
민현유가 한숨을 쉬며 공손히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받들겠습니다.”
* * *
“일어나라. 저녁 식사 시간이다.”
단잠에 빠졌던 섬랑은 바로 눈을 떴다.
즉시 일어나지 않으면 머리통에 혹이 생길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네, 관 숙수!”
“잠만 완전히 떨쳐내고 상체는 일으키지 마.”
“물론이죠.”
관엽은 항상 그랬듯이 섬랑의 전신을 추궁과혈했다.
그의 주름 잡힌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섬랑은 그것들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아무런 불평도 안 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것인데 뭐라 하겠는가?
그래도 호기심은 참을 수 없었다.
“관 숙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안 된다.”
“하나만요.”
“또 맞고 싶으냐?”
섬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재빨리 입을 놀렸다.
“맞고 물을, 아야! 으으.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세요? 지금처럼 때리는 것 말고요.”
“네게 잘해주는 게 아니라 진혼과의 약조를 지키는 것이다.”
“대인에 대해 묻지는 않을게요. 왜 그와 그런 약조를 하신 거죠?”
“해야만 했으니까.”
“대인이 관 숙수를 겁박했나요?”
섬랑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취소, 취소요. 말이 헛나왔어요. 관 숙수는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굴복할 분이 아니죠.”
관엽이 보통 독종인가?
과거 그 어린 나이에도 고이륵단가와 용맹하게 싸우다가 팔이 잘리자 그 자리에서 씹어 먹은 사람 백정 아닌가?
“믿어주세요. 관 숙수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어요. 젠장. 그래서 더 궁금하다고요. 왜 대인에게 숙이는 거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관엽은 묵묵히 추궁과혈을 하다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일어섰다.
섬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진짜 안 알려주실 거예요?”
관엽은 방을 나가며 중얼거렸다.
“살다 보면 말이 안 되는 일도 생길 수 있지. 내 경우엔 평생 단 두 번이었지만.”
섬랑이 벌떡 일어나 따라붙었다.
“하나는 대인에게 숙이는 이유일 거고. 다른 하나는 뭐죠?”
“내 비루한 능력을 가치 있게 쓸 기회가 온 것.”
“네?”
“여기까지. 내려가자.”
섬랑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걸음을 옮겼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일 층에 내려가 보니 정광이 앉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대인. 혈조는요?”
“거기 있잖아.”
정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섬랑의 그림자에서 자오가 솟아났다.
“깜짝이야!”
“호들갑 떨지 마. 앞으로 종종 이럴 거야.”
“으으. 네.”
섬랑은 자오에게 인사한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구멍은 벌써 메웠고. 한 명이 안 보이네. 주방에 있나?’
마침 그 한 명, 민현유가 객잔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데리고.
섬랑은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왜…….’
더 놀란 건 당사자였다.
민현유를 따라온 대머리 장한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정광에게 물었다.
“대, 대인. 소인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무, 무슨 일로…….”
정광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제가 전주(錢主)님을 왜 찾겠어요. 당연히 사업 얘기 때문이지요.”
“……!”
멸혼생사투 쿠얼러 예선에서 정광 덕분에 막대한 수수료를 벌었던 대머리 장한이 목놓아 외쳤다.
“말씀만 하십시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 멸혼생사투 도박 규칙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요!”
정광이 질문하고 전주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광이 입을 열었고.
전주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