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4화
여기서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우루무치는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에 걸맞게 풍경이 좋은 곳이었으나 날씨는 안 그랬다.
공기에 수분이 많아 축축했고 그 수분을 통해 냉기가 전해져 전신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그 와중에 칼바람까지 몰아치는데 누가 밖에 서 있고 싶을까.
한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창을 든 흑의인들이 길을 막고 쉽게 들여보내지 않았다.
우루무치를 지배하는 오로나가(烏魯羅家) 무인들이었다.
“멈추시오. 신분과 용무를 상세히 기재해야 통과할 수 있소.”
정광 일행을 따라가다가 너무 추워서 급히 앞질러 간 무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이 겨울에 뭐 하는 짓인지.
이럴 시간이 없었다.
어서 들어가 따뜻한 화로와 화주(火酒)로 몸을 녹여야 했다.
“거참. 적당히 좀 합시다!”
“얼어 죽을 판에 말로 대충 때우지 뭘 쓴단 말이오?”
흑의인은 냉정했다.
“멸혼생사투 때문에 방문자가 많아져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소. 본가 입장에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 협조해 주시오.”
“이거야 원.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쓰시오.”
한 중년인이 흑의인 옆을 지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뾰족한 창날이 중년인의 오른쪽 귀를 뚫고 들어가 왼쪽 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흑의인은 중년인의 옆구리를 걷어차 창을 빼고 차갑게 말했다.
“다음 분 나오시오. 신분과 용무를 상세히 기재해야 통과할 수 있소.”
이 새끼가!
마인들은 왈칵 성을 내며 병기 손잡이에 손을 댔으나 뽑지는 못했다.
흑의인의 솜씨는 대단했고 혼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우루무치, 오로나가의 땅인데 무슨 배짱으로 그러겠는가?
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로 마인들 틈을 뚫고 나온 자가 있었으니.
정광이었다.
손바닥만 한 목패(木牌)를 꺼내 흑의인에게 내밀었다.
“묵영권가의 진전을 이은 진혼요. 묵영권가의 적자 섬랑이 멸혼생사투에 참가하게 돼서 함께 왔어요.”
흑의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멸혼생사투 이차 예선 참가자임을 증명하는 목패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 틈을 자연스레 빠져나온 놀라운 신법과 진혼이라는 별호 때문이었다.
우선 목패부터 받아 확인했다.
“진품이군.”
“이제 가도 되죠?”
“아니. 자네의 진위가 확실치 않아. 난데없이 묵영권가의 후인이 나타나다니. 수상하지 않나?”
“오해를 풀어드리죠. 섬랑, 이리 와 봐.”
뒤쪽에 있던 섬랑이 말에서 내려 급히 달려왔다.
“네 부친이 나를 가르치셨지?”
“네, 대인.”
정광은 흑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네요. 섬랑의 진위도 의심스러우세요? 쿠차에서 오신 분이 있는데 부를까요?”
흑의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자네가 스승 아니었나? 제자가 왜 대인이라고 부르지?”
“사승 관계는 부담스러워서 업무 관계로 가기로 했거든요.”
“그건 또 뭔가?”
“서로 빼먹을 건 빼먹는 사이요.”
“……어이가 없군.”
“이러다 날 새겠네. 소가주님, 좀 도와주시죠.”
마침 흑의인과 안면이 있는 단영이 앞으로 나와 정광의 신분을 보증했다.
“진혼은 묵영권가의 비기를 군중들 앞에서 몇 번이나 썼소. 할아버님께서도 인정하시고 그와 그의 동료들을 빈객(賓客)으로 받아들이셨소이다.”
“……섬광마검 어르신께서 말이오?”
“그렇소. 만약 거짓임이 드러나면 본가가 책임을 지겠소. 이제 됐소이까?”
“…….”
고이륵단가 소가주가 태상가주와 가문까지 입에 올리며 확언하는데 할 말이 있나.
“그렇게 보고하겠소, 소가주.”
“고맙소이다. 이제 명부를 작성하면 되오?”
그럴 리가 있나.
강자에겐 그만한 혜택이 따르기 마련, 흑의인이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마도칠대가문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어왔소. 본가는 단가를 존중하오. 우루무치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귀가의 후의, 가슴에 새기리다.”
흑의인은 정광에게 목패를 돌려주며 경고했다.
“멸혼생사투 출전 접수는 됐으니 생사투 당일 늦지 말게.”
“네.”
“쿠얼러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지? 이곳에서도 그러면 곤란하니 잘 처신하게나.”
“물론이죠.”
“……자네, 왜 먼 산을 보며 말하는 건가?”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산세가 그럴듯해서요. 자, 다들 들어가시죠.”
단영이 식솔들과 앞장섰고 흑서, 자오, 관엽, 섬랑, 민현유가 뒤를 따랐다.
가만히 지켜보던 흑의인이 이맛살을 모았다.
“진혼 자네는 왜 가만히 있나?”
“뒤쪽에 일행이 더 있는데 그분들도 그냥 들어가도 되죠?”
“단가의 빈객이면 그래야지.”
“그건 아닌데.”
“지금 장난하나? 불가하네.”
“귀가가 믿고 의지하는 칠대가문 중 한 곳인데도요?”
“……무어라?”
정광은 마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토로번손가 소가주님! 뭐 하세요? 빨리 오세요!”
“……!”
“그래야 제가 약조를 지키는 거잖아요! 저를 곤란하게 하실 거예요?”
“대체 무슨 소리를…… 아!”
황당한 얼굴로 마인들 쪽을 바라보던 흑의인이 눈을 크게 떴다.
여러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다가오는데 하나같이 한쪽 소매가 세찬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리는 것 아닌가?
‘허어. 이렇게 많은 외팔이를 보게 될 줄이야. 가만, 분명 토로번손가라고…….’
이때 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건만.
선두에서 오던 사내가 얼굴을 들자 확신하게 됐다.
면식이 있는 자, 손병권이었다.
“……오랜만이오, 소가주.”
“……안녕하셨소.”
목소리도 힘이 무척 빠진 상태였지만 그의 것이 맞았다.
흑의인은 금세 냉정함을 되찾고 담담히 물었다.
“상처가 많으시오. 최근에 격전을 치른 것 같은데 상대가 누구였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
손병권은 저도 모르게 정광을 힐끗 봤다.
흑의인은 그 의미를 알아채고 경악했다.
‘진혼에게 당했다고? 손가 소가주와 이 많은 식솔이?’
강하다고는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직접 확인하려 하는데, 정광은 손병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소가주님, 약조를 지켰으니 먼저 갈게요. 살아남으실 수 있으면 좌수도 열심히 익히시고 이십 년 후에 찾아오세요.”
손병권은 이를 악물고 정광을 노려봤다.
“하하. 의욕이 넘치시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광은 그의 멀쩡한 어깨를 토닥인 뒤 뒤쪽을 바라봤다.
이제껏 뒤따라오던 마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싸우자니 승산이 없고, 숙이려니 울화가 치밀고.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는 모습이라니.
정광은 그들에게 가르침을 줬다.
“다들 뭐 하세요? 날이 추운데 빨리 명부 작성하시고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셔야죠. 그래야 힘이 나고 재미난 일도 많이 보실 수 있을 테니 서두르세요.”
마인들의 눈이 빛났다.
정광을 따라온 목적을 되새긴 것이다.
‘진혼 말이 맞아. 빌어먹을 나가(羅家) 새끼들과 싸우느라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그깟 명부쯤이야. 빨리 끝내고 들어가자.’
뜻이 서니 몸이 움직였다.
“신분과 용무를 말할 테니 빨리 기재하시오.”
“나부터 해주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허! 내가 먼저야!”
흑의인은 일거에 몰려든 마인들 때문에 정광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게 됐다.
정광은 망설임 없이 신형을 돌려 앞서간 일행을 따라갔다.
혹시 몰라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오가 반갑게 맞이했다.
“또 손을 쓰시나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저를 대체 뭐로 보시길래 그러세요?”
“당연히 단주로 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어서 가시지요. 이러다 놓치겠습니다.”
정광은 피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자오가 보기엔 어때요?”
자오가 주위를 슬며시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쿠얼러가 연상될 만큼 번화한데 분위기는 아예 다릅니다. 날씨처럼 얼어붙을 듯 차가워서 적응이 영 안 됩니다.”
“잘 보셨네요.”
거리 곳곳에서 흑의를 입은 나가 무인들이 사람들을 통제했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 따라 움직였다.
정광은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들을 눈 속에 담으며 쿠얼러와 우루무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단가는 대리국(大理國) 왕족 출신이라 왕 놀이를 좋아하죠. 단가는 관(官), 그 외의 무인들은 무림으로 취급해요.”
“아! 그래서 단가 식솔이나 무공을 모르는 사람, 서역과 중원을 오가는 상인을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었군요. 왕족과 백성을 해치고 나라의 재정을 탐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네. 하지만 그 외에는 느슨하게 풀어주는 편이라 숨 쉴 만한 여유가 있죠.”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와 달리 나가는 빡빡해요. 왕이자 무림의 패자이길 원하죠. 신권(神權)이야 총단에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걸 제외한 모든 힘을 행사해야 직성이 풀리는 가문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 말씀은…….”
“여기에선 나가가 법이에요. 막무가내로 구는 일은 별로 없으나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려 하죠.”
자오가 황당한 얼굴로 의문을 표했다.
“결국 막무가내로 구는 무도한 자들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중요한 사안 앞에서는 그렇게 나올 테니까요.”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게요. 짧게 말할걸. 근묵자흑이라더니 자오한테 물들었나.”
“다, 단주. 무슨 그런 말씀을…….”
“다들 저 앞에 있네요. 합류하죠.”
정광은 단영과 만나자마자 물었다.
“나가에서 묵으실 거죠?”
“칠대가문은 다른 가문의 영역에 가면 그 가문에서 지내는 게 관례니 그래야겠지.”
주(主)는 객(客)이 자신의 땅에서 허튼짓을 못 하게 감시하고, 객은 주의 집에 머물며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어차피 전장 사업 얘기를 해야 하니 잘된 일일세.”
“설득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진혼 자네는 어디에 여장을 풀 건가?”
“뻔하죠.”
“그렇군. 조심하게.”
“소가주님이야말로요.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서 알려주세요.”
단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할 소리야. 네가 그런 상황까지 몰리면 내가 빨리 가봐야 죽어 있을 게 뻔하잖아.
-설마 그런 일까지 벌어지겠습니까. 그랬다간 나가는 다른 가문들에게 공적으로 몰릴 겁니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법 똑똑한 녀석이 가끔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 이해가 안 가서였다.
-다른 누군가가 너를 죽이고 나가의 소행으로 몰면 어쩌려고?
-아!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도 아니고 원. 흑조를 은신시켜서 붙여줄 테니 데려가.
-그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작정하고 은신하면 거의 눈치채지 못할걸. 태상가주나 가주를 만날 땐 비밀수신호위라고 미리 당당히 말해. 크게 따지지는 못할 거야.
-감사합니다, 지존.
-성격 더러우니까 존댓말 쓰고.
-지존만 하겠…… 명심하겠습니다.
-응. 나중에 때려주마.
정광은 흑서에게 전음을 보내 단영을 돕게 했다.
흑서는 까마득한 애송이를 지켜야 하는 기구한 신세를 한탄하며 명을 받들었다.
“그럼 다음에 봬요.”
정광은 단영 일행을 보내고 민현유를 응시했다.
“뭐 해? 어서 안내하지 않고.”
“어디를 말입니까?”
“어디긴 어디야. 너희 사업장이지. 다른 곳에 가도 그럴 것이니 두말하게 하지 마.”
민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항상 저희 객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향리객잔(香梨客棧)은 신강 곳곳에 뿌리를 내린 큰 사업체였다.
우루무치에도 당연히 있었는데 쿠얼러에 있는 것과 형태도 규모도 대동소이했다.
민현유가 먼저 들어가자 청소하고 있던 점소이들이 담담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본 객잔에 처음 오신 것 같은데 식사만 하실 것인지 숙박도 하실 것인지…….”
정광이 끼어들었다.
“애써 모르는 척하니까 더 어색해 보이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빨리 진행해.”
민현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점소이에게 당부했다.
“하던 대로 해.”
“네, 도련님.”
섬랑이 입을 떡 벌렸다.
“현유 아저씨, 부친께서 이 객잔도 소유하고 계신 거예요?”
“몇 개 더 있다.”
“우와. 진짜 도련님이셨네. 근데 왜 점소이를 해요?”
“그러게 말이다.”
“밑바닥부터 경험하며 올라가 경영하기 위해선가? 그거 뻔한 요식행위 아니에요?”
“맞긴 한데 안 하는 것보단 나을 때도 있지.”
민현유는 점소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 다 해놨지?”
“물론이지요. 방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이 층으로 올라가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었다.
그러자 뜨거운 목욕물이 바로 준비됐다.
정광 일행은 여독을 풀고 일 층에서 모였다.
민현유가 정광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대인, 여기서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런. 이미 늦었는데 어떡하지?”
정광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조금 떨어진 탁자 위에 나타났다.
부우웅-
콰직! 콰앙!
간결히 내뻗은 주먹이 허공을 때렸다. 은신해 있던 자가 화살처럼 날아가 객잔 벽을 뚫고 사라졌다.
민현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광을 향해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밖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이번에도 후원 쪽으로 구멍을 내주신 건 감사드리나, 찬바람이 들이치면 식사하실 때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정광은 씩 웃으며 구멍 쪽으로 걸어갔다.
“네가 알아서 잘 막을 건데 뭐. 손님이랑 잠깐 얘기 좀 나눌게. 요리와 술은 알아서 내줘.”
“지금 바로 나올 겁니다.”
“식기 전에 돌아올게.”
후원으로 나가니 한 사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광은 그에게 다가가다가 왼쪽으로 훌쩍 뛰어 허공을 걷어찼다.
쾅!
“끄헉!”
허공이 찢어지며 벌거벗은 사내가 나타나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재밌는 잡기를 쓰네.”
정광은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사내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현유와 잠깐 얘기하는 틈을 타 조잡한 환술을 부려?”
사내는 기절해 있었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 보자.”
정광은 그자의 맥문을 잡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 안 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둘 중 어느 쪽인가 했더니만 손가라. 팔 하나씩 잘라서 데리고 온 효과가 확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