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3화
오로목제(烏魯木齊)
마른 나뭇가지와 검불을 그러모아 불을 붙이자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오가 걷어와 차곡차곡 쌓은 금원보와 은자가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밝게 빛났다.
정광은 수량과 금액을 얼추 파악한 뒤 자오의 노고를 위로했다.
“수고하셨어요, 혈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리 부탁드릴게요.”
“네, 단주.”
자오는 봇짐을 풀고 금원보와 은자를 쑤셔 넣었는데 양이 꽤 많아 흑서의 봇짐에도 나눠 넣어야 했다.
정광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단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장 사업 꼭 성공해라. 그리 큰 금액도 아닌 것을 이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건 너무 미련한 짓이잖아.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지존.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이거, 새것으로 바꿔주고.
단영은 정광이 내미는 것을 받아 확인했다.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였는데 살살 펴서 살펴보니 익숙한 직인이 찍힌 전표였다.
-아까 손병권에게 주셨던 겁니까?
-응.
-언제 챙기셨는지요?
-네가 중독당한 척하게 하고 둘러업을 때.
단영은 감탄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 살짝 훼손됐다고 안 바꿔줄 건 아니지?
살짝이 아니라 많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상대가 정광인데 어떻게 거절하나.
백지를 내밀며 단가가 발행한 천금 가치의 전표라고 우겨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며 전표든 현물이든 공손히 내줘야 할 판 아닌가?
단영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견본으로 가져온 전표를 꺼내 즉시 교환해줬다.
-여기 있습니다, 지존. 봇짐에 넣고 있는 것들도 바꿔 드릴까요?
-아니. 너희 전표가 아직 통용되는 곳이 없으니 현물을 조금은 가지고 있어야지.
-제 생각이 짧았군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만 자자. 번(番)은 너희 애들이 돌아가면서 서.
대신 마혈을 짚어놓은 손병권과 손가 무인들은 흑서와 자오가 교대하며 감시하게 했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는 사람이 있으면 대충 치료해 주세요. 주변에서 노숙하는 분들이 해치려고 하면 막아주시고요.”
“알겠네.”
“네, 단주.”
다른 이들도 할 일이 있었다.
“섬랑, 수련할 거지?”
“물론이죠, 대인.”
섬랑은 의욕에 불타 있었다.
수빈이라는 평생의 호적수가 생겼고, 정광의 신위를 보니 피가 끓어오른 것이다.
정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관엽에게 부탁했다.
“관 숙수,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수련도 봐주시고 보호해 주세요.”
“알겠네.”
“그럼 내일 뵐게요. 모두 수고하세요.”
다들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흩어졌다.
정광도 마찬가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토로번손가를 본보기로 만들었으니 가당찮은 욕심을 부리는 놈은 거의 없어지겠지.’
교주 놈이 소문을 들으면 손병권 무리를 벌할 게 분명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지켜 위엄을 세워야 하는데 어쩌겠는가?
‘손가 가주 녀석이 시비를 걸겠지만 그야 받아주면 되고.’
손가는 현 교주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세력.
다른 명가들이 곱게 볼 리 있나, 그래도 손가를 치고 그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해야 했다.
‘속마음이 드러날 거야. 교주 놈을 지지하는 가문은 손가를 도우려 할 테고 아닌 가문은 미적거리겠지.’
옥석을 가리고 그에 맞춰 대접해 주면 된다.
오늘 했던 것처럼 추종자의 수를 늘리면서.
‘한동안 시끄러워지겠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던 정광의 눈이 감겼다.
* * *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햇살이 천막 틈을 뚫고 들어와 아침이 됐음을 알렸다.
정광은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새벽을 틈타 손가 무인들을 해치려다가 잡힌 이들이 마혈을 짚인 채 무릎 꿇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노인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허허. 소피를 보려다가 밤눈이 어두워 엉뚱한 쪽으로 갔지 뭔가? 하릴없이 나이를 먹어 그러니 이해해주게…….”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노인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정광은 도를 가볍게 내려쳐 핏물을 털어내고 중얼거렸다.
“우루무치까지 얌전히 보내주기로 한 걸 빤히 들었으면서도 이러면 곤란하지. 변명도 너무 구차하잖아.”
생포된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한 중년인이 절실하게 애원했다.
“지, 진혼. 내가 잠시 미쳐서 욕심을 부렸나 보네.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용서를…….”
“무슨 욕심요?”
“손가에 맺힌 게 좀 있어서…….”
“제 체면을 봐서 참으셨어야죠.”
“깊이 후회하고 있네. 너무 미안해서 얼굴도 못 들 지경일세.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니 제발…….”
“솔직히 토설하셨으니 팔 하나로 끝내는 거로 하죠.”
“저, 정말 고맙네! 커억!”
팔이 잘렸다.
중년인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무릎 꿇고 있는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살길이 열린 것이다!
정광에게 경쟁하듯 외쳤다.
“나도 솔직히 말하리다! 그대의 마음이 여린 줄 알고 미친 짓을 했소! 이제 그 위엄을 알았으니 제발 살려주시오!”
“통과. 팔 하나요.”
“감사하오! 크흑!”
“다음은 내 차례네! 손가에 원한은 없으나 시체처럼 얌전히 쓰러져 있는 걸 보니 손이 근질근질해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네!”
“취향이 이상하시네요.”
“내 말이! 크게 반성하고 새사람이 될 테니…….”
자오가 끼어들었다.
“단주.”
“말씀하세요.”
“저자가 지금은 멀쩡해 보이나 일을 벌일 때는 앵속에 취해 있었습니다.”
“취향도 그런데 앵속까지?”
“손가 다음에는 단가 사람들에게 독을 풀어 몰살시키겠다고 중얼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더군요.”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 탄식했다.
“저런. 성품도 엉망이네. 사해(四海)가 동도(同道)이거늘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야지 그러면 쓰나.”
진실을 반만 말했던 사내가 딸꾹질을 하며 사정했다.
“히끅! 오, 오해일세! 찬찬히 설명할 테니 제발 들어주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다만 요즘 들어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
“내 소관이 아니잖아. 소가주님, 단가 쪽 일이니 가져가시죠.”
“고맙네, 진혼.”
“아, 안 돼!”
사내는 단영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런 와중에 누가 감히 거짓말을 할까.
남은 이들은 무슨 연유로 그랬는지 솔직히 털어놓은 뒤 팔을 하나씩 남기고 줄행랑을 쳤다.
조용히 구경하던 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했다.
‘어제 손병권과 있었던 일도 그렇고, 일 처리가 공평무사하구나. 뒤끝도 없어.’
‘적한테만 막돼먹게 대할 뿐, 다른 이들은 예의 있게 대한다고 말했다지? 과연.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험하게 구는 자가 아니야.’
힘도 있고 배포도 있는 데다 공평하기까지.
겪으면 겪을수록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반듯한 청년 아닌가?
사람들은 정광을 예전보다 조심스럽게 보면서도 더 큰 호감을 품게 됐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어제 칼을 맞대고 싸우다가…… 아니, 일방적으로 당하고 뼛속까지 두려움이 새겨진 손가 무인들은 정광이 다가오자 눈을 질끈 감고 치를 떨었다.
거기에 거하게 사기까지 당한 손병권은 더할 수밖에.
속으로 정광을 저주하며 가까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천지의 조화를 주재하는 신령들이 그런 사소한 부탁을 들어줄 만큼 한가할 리 있나.
정광은 그 증거를 몸소 보여주려는 듯 찾아와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푹 주무셨어요? 아침 드셔야죠.”
“…….”
손병권은 마혈뿐만 아니라 아혈까지 제압당해 대답할 수 없었다.
“왜 과묵해지셨어요?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내기로 했잖아요.”
“……!”
끝내다니!
누구 마음대로!
“혹시 팔 좀 잘랐다고 삐지신 거예요?”
“……!”
손병권은 분노가 들끓어 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머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악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런 그를 정광이 따뜻이 위로했다.
“좌수도(左手刀)를 익히시면 되는데. 금방 익숙해지실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
“못 믿으시겠어요? 진짠데. 관 숙수도 그랬거든요.”
정광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관 숙수님. 독비가 되신 뒤 독비귀도(獨臂鬼刀)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얼마나 걸리셨어요?”
“으음.”
수련을 하다가 지쳐 기절한 섬랑을 업고 걸어오던 관엽이 답했다.
“대략 이십 년쯤 될 걸세.”
정광은 다시 손병권을 내려다봤다.
“제 말이 맞죠? 강산이 두 번만 변하면 저에게 복수하실 수 있어요.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하는데 군자가 아니시니 이십 년도 늦지 않는 셈이죠.”
“…….”
손병권은 정광을 노려보며 이를 갈다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십 년은 지나야 좌수도가 익숙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교주가 곧 처분을 내릴 터,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 모르는데 훗날을 걱정할 여력이 어딨겠는가?
“근데 진짜 아침 안 드실 거예요?”
“…….”
이런 판국에 밥맛이 있으면 사람도 아니지.
다른 손가 무인들의 마음도 대동소이했다.
정광이 몇 번을 더 물어도 먹겠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더 권하면 실례겠죠. 저희가 다 먹을게요.”
정광 일행은 손가 무인들의 식재료를 몽땅 털었다. 손병권이 했던 말과 달리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다음은 관엽 차례.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익숙해진 그의 좌수도가 빛을 발했다.
요리가 익으며 향긋한 냄새가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기절해 있던 섬랑이 코를 벌름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정광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다들 드시죠.”
건량과 육포에 질렸던 일행은 즐겁게 먹고 마셨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정광을 보며 한 가지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진혼과 적이 돼선 안 돼.’
‘몸이 살면 뭐 해? 혼이 바싹 말라 버리잖아.’
‘손가 녀석들, 저러다 목내이(木乃伊)가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그런 일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 정광은 쉴 때마다 건량을 손가 무인들의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들이 항의라도 할라 치면 진지한 어조로 잘라 버렸다.
“제가 우루무치까지 보내 드릴 거라 했잖아요.”
“…….”
“드셔야 힘이 나서 가시죠. 안 그래요?”
“…….”
그러게.
정광은 그들이 다쳤다고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찍 도착해서 푹 쉬어야 섬랑이 최고의 몸 상태로 멸혼생사투에 참가할 수 있어서였다.
덕분에 손가 무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억지로 먹으며 억지로 말달렸다.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이 진귀한 구경거리에 끌려 정광 일행을 따라갔다.
가끔 손가에 품고 있던 원한을 갚으려고 하거나 정광의 재물을 훔치려는 자가 나왔지만 흑서와 자오에게 잡혀 전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됐다.
그들보다 먼저 정광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혀를 차며 비웃었다.
“멍청한 새끼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누가 아니래. 차라리 칼을 입에 물고 엎어질 것이지. 쯧쯧.”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의미요?”
“우리도 좀 압시다.”
처음부터 일련의 과정을 전부 지켜본 자들은 거드름을 피웠다.
“어허. 맨입으로 말인가?”
“흠. 흠. 목이 갑자기 칼칼해지는구먼.”
마인이라고 꼭 칼침부터 놓는 건 아니었다.
궁금해서 물었는데, 대답해 줄 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술이라면 여기 있소. 이제 얘기 좀 해보시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직접 목격했다고 말이 사실 그대로 나오는 건 아니다.
화자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고 제 생각을 첨언하게 되어 있기에 정광의 무위와 배포, 공평무사한 성품은 얘기가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더없이 커져만 갔다.
일이 이쯤 되면 제지해야 하건만.
정광은 그 말도 안 되는 일화들을 낱낱이 들으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얼굴이 두꺼워서도 그랬지만 바람직한 현상이어서였다.
다들 알아서 추종자가 되겠다는데 뭐 하러 막나?
저렇게 따르다가도 수틀리면 뒤에서 은밀히 칼침을 놓거나 앞에서 웃으며 도끼를 내려칠 놈들이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
지금은 칠대가문처럼 결속이 굳건히 다져져 있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모래알처럼 흩어져 서로 투덕거리는 무인들이라도 모아 덩치를 키워야 했다.
‘그러면 성가신 일이 많이 줄어들겠지. 소문도 퍼뜨려야 해.’
따라오는 이들에게 몇 가지 사실을 적절히 꾸며 흘렸다.
우루무치에 도착하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진실인 것처럼 굳어지리라.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이 잘해야 하는데.’
섬랑은 가끔 강제로 쉬게 할 만큼 이동할 때도 쉴 때도 열심히 수련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시간이 좀 남았으니 더 몰아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결국 게거품을 질질 흘리는 손가 무인들을 한 명도 낙오시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위치한 오로목제(烏魯木齊).
이곳 언어로는 우루무치라 불리는 대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