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13화 (412/569)

2부 142화

눈곱만 한 양심

정광은 첫 상대의 팔을 자르고 배를 걷어차 날리며 외쳤다.

“일성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흑서와 자오는 아니었다.

명에 맞춰 토로번손가 무인들을 상대했다.

정광은 도, 흑서는 쌍철괴(雙鐵拐), 자오는 쌍단봉(雙短棒).

날붙이와 둔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살을 베어 핏물을 뽑아내고 뼈를 부러뜨려 끔찍한 소리를 냈다.

세 사람은 이렇게 손가 무인들을 쉼 없이 거꾸러뜨리며 질풍처럼 나아갔다.

이쯤 되면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비록 말석이긴 하나 마도칠대가문에 속하는 손가가 맥없이 당하고만 있을 리 있나.

소가주 손병권이 식솔들에게 명했다.

“뒷일 따윈 생각하지 마! 작은 상처라도 입히고 죽어라!”

“존명!”

손가 무인들은 마기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끌어 올렸다.

교주에게 과잉 충성하느라 묵영권가의 후인과 고이륵단가의 소가주에게 암수를 펼친 것으로 낙인찍힌 신세.

얼마나 무거운 처분을 받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함정을 판 흉수와 놈의 일행이라도 도륙해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죽어!”

무인 셋이 정광을 향해 칼날이 크게 휘어진 만도(彎刀)를 거칠게 휘둘렀다.

정광은 손목을 가볍게 뒤틀었다.

짙은 어둠으로 물든 도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기괴한 곡선을 그렸다. 그 선은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잘랐다.

세 쌍의 만도와 팔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외팔이가 된 무인들은 상처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를 무시하고 멀쩡한 왼손을 내질렀다.

권(拳), 장(掌), 지(指), 각각 다른 수법으로 이루어진 합공!

하지만 정광이 더 빨랐다.

막대한 힘을 실은 도면으로 세 사람을 후려갈겼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들이 포탄처럼 맹렬히 날아갔다. 정광에게 달려들던 다른 이들과 충돌하며 끔찍한 폭음을 냈다.

그 순간, 정광은 다른 자들을 덮치고 있었다.

베고, 친다.

이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연환기에 손가 무인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정광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의 벽이 뚫리며 피로 물든 길이 열렸다.

그 길 끝에는 두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고 부들거리는 손병권이 있었다.

정광의 입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벼락출세해서 예법을 모르나? 객(客)이 이만큼 왔으면 주(主)도 마중 나와 성의를 보여야지.”

“……!”

정광의 도발에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열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평소 고깝게 보던 손병권을 조롱하고 손가를 욕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흥이 솟거나 살기에 취한 자들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적아 구분 없이 칼춤을 추며 살의와 마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그리고 하나씩 죽어갔다.

실력이 의욕을 못 따른 것이다.

정광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전장을 한 바퀴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마도(魔道) 같네.”

전생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 좋은 것들은 아니었기에 바로 지우고 손병권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피함을 알면 저들의 십분지 일이라도 보여봐.”

“……!”

정광의 엄청난 무위와 극도로 정제된 마기에 짓눌려 있던 손병권이 정신을 차렸다.

으드득.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쫓아냈다.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조롱받고 싶진 않았다.

“하압!”

기합을 터뜨리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마기와 살기가 뭉클뭉클 일어나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것들은 뇌리까지 침범해 이성을 몰아내고 흉포성을 꽃피웠다.

“크흐흐흐.”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흉악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여주마.”

“행동으로 보여.”

정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병권이 움직였다.

신법을 펼쳐 정광의 지척까지 달렸다. 육신은 물론이오, 차갑게 얼어붙은 땅까지 한꺼번에 쪼갤 기세로 만도를 내려쳤다.

정광은 옆으로 왼발을 내디디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오른발까지 뒤로 끌어당기자 만도가 간발의 차이로 지나갔다.

손병권의 측면이 훤히 드러난 상황!

허나 그는 마도칠대가문의 소가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지킬 만한 고수였다.

“크악!”

급히 단전에서 뽑아 올린 진기가 순리(順理)를 벗어난 경로로 질주했다. 그 힘을 이용해 바닥에 찍히려는 만도를 급격히 틀어 횡으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도신이 순식간에 휘어져 정광의 목을 노렸으나…….

정광은 그곳에 없었다.

묵영보를 펼쳐 손병권의 뒤로 은밀히 돌아가 도를 내려치고 있었다.

서걱-

어깻죽지를 절단하고 진각을 밟았다. 그 반탄력을 어깨에 실어 손병권의 등을 들이받았다.

쿠웅!

“크학!”

손병권이 입에서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정광은 그를 쫓아가 머리를 걷어찼다.

빠악!

한 번만 치면 정이 없는 법.

배와 엉덩이도 연달아 짓밟고 걷어찼다.

손병권은 결국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위를 드러낸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정광은 도를 도갑(刀甲)에 넣고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싸움을 멈추고 경악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슬슬 끝내야 할 때였다.

정광은 희미하게 웃으며 적아(敵我)를 가리지 않고 권유했다.

“밤이 깊어가는데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끝내죠.”

흑서와 자오가 날뛰었다.

정광도 힘을 보탰다.

얼마 안 가 손가 무인들이 전부 쓰려졌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손가 무인들은 전부 한쪽 팔이 매끈하게 잘리거나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정광에 대한 경외심이 실망으로 물들어 버리는 건 금방이었다.

사람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겨우 팔 하나로 끝내 버려? 더 다친 녀석들도 있지만 죽은 놈은 하나도 없잖아.”

“쯧쯧. 싸움은 잘한다만 마음이 저렇게 여려서야 원.”

“직접 가르쳤다는 묵영권가의 유일한 적자도 멸혼생사투에서 한 명도 안 죽였다고 했지. 그걸 들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너무 그러지 말게나. 삭막한 세상일세. 저런 청년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정광, 흑서, 자오는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했다.

쓰러뜨린 적들의 마혈을 짚고 출혈을 막았다.

지존이 몸소 움직이는데 종복이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나.

단영이 일행을 이끌고 와 도왔고 사람이 많아진 만큼 일이 빨리 끝나게 됐다.

정광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단영을 칭찬했다.

“역시 소가주님. 단가 비전의 영단을 드시고 심후한 내력으로 독을 벌써 몰아내셨네요.”

단영은 귀한 영약을 복용하긴커녕 흔한 요상약 하나 털어먹고 잠시 운기요상(運氣療傷) 하다가 왔으나 정광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그랬지. 자네도 수고했네.”

“뭘요.”

“헌데 왜 이렇게 손을 가볍게 쓴 것인가? 깊은 뜻이 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궁금해서 그러네.”

단영은 정말 궁금해서 물었고 정광은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데 옮기긴 귀찮아서요.”

“무슨 의미인가?”

“헛된 욕심을 품고 저를 해치려 하면 이 꼴이 된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소문으로 듣는 것보다 당사자들의 몰골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잖아요.”

“아! 스스로 걷게 해야 하니 다리는 건드리지 않았고, 가는 길에 뭐라도 주워 먹어야 하니 한쪽 팔은 남긴 거다, 이 말인가?”

“네.”

그제야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단영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설마 우루무치로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지금 거기만큼 사람 많은 곳이 근방에 어딨겠어요.”

“손 형이 말하길, 그의 부친인 가주가 우루무치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걸세.”

“그러라죠.”

“그가 시비를 걸면 그와도 싸울 생각인가 보군.”

“당연하죠.”

“그러다간 끝이 없을 걸세. 교주께 과잉 충성하려는 자들은 없어지겠지만 복수는 피할 수 없어. 싸움은 정면으로만 하는 게 아닐세. 대체 어떡하려고 그러나?”

정광은 씩 웃었다.

“모조리 해치우면 되죠. 뭐 하러 그런 걱정을 해요?”

구경꾼들이 입을 떡 벌렸다.

‘더 이상 덤비는 놈이 없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미친 것 같진 않고. 정말 대단한 배포구나!’

‘그래도 너무 심해. 아직 세상을 모르니 저렇게 날뛰지.’

정광이 지극히 제정신이라는 걸 잘 아는 단영은 궁금했던 다른 것을 마저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싸움이 시작됐을 때 동료들에게 일성이라고 외치더군. 무슨 의미인가?”

“팔 하나만 자르거나 박살 내는 거요.”

“허어. 손속의 경중을 나타내는 암어였을 줄이야. 몇 성까지 있나?”

“일은 시작의 수고 십이는 끝의 수니 당연히 십이성이죠.”

“……!”

단영은 역시 지존이시군 하며 감탄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구경꾼들은 뒤통수를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팔 하나가 일성인데 십이성까지 있다고?’

‘뭘 더 자르고 부숴야 그 많은 숫자를 채울 수 있는 거야?’

정광의 비범함으로 미루어볼 때 손가락이나 발가락처럼 시시한 것들은 아닐 게 확실했다.

‘뭐지? 대체 뭘까?’

‘미친! 궁금해 죽겠잖아!’

‘천하에 이런 악귀가 있나! 내 가슴을 이렇게 사정없이 두근거리게 하다니!’

호기심이 전염됐다.

안 그래도 대단했던 정광이 더 대단해 보였다.

꼴 보기 싫은데도 너무 강해서 손을 댈 수 없었던 토로번손가를 순식간에 박살 내버리는 신위.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가 됐든 간에 해치우겠다고 선언하는 두둑한 배짱.

뿐이랴? 멸문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묵영권가의 맥을 이었다는 신비함과 고이륵단가라는 대단한 배경까지 있었다.

심지어 흑조와 혈조라는 동료들도 놀라운 실력을 선보이지 않았는가?

그런 자가 눈앞에 있으니 열광할 수밖에.

멸혼생사투를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정광의 행보가 훨씬 더 기대됐다.

아까 눈이 뒤집혀 싸움판에 끼어들었다가 개죽음당한 녀석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더니.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게 되어 천만다행이야!’

‘이제 애들 싸움 따윈 관심 없어!’

‘진혼을 따라간다! 지옥 끝까지라도!’

정광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됐으나 여전히 정광이었다.

우쭐대는 기색 따윈 전혀 없이 담담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손병권에게 다가가 머리맡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의식을 잃은 그를 깨웠다.

“야, 일어나.”

짝!

“어서 일어나라고.”

짜악!

“어? 죽었냐?”

쫘아아악!

아니었다.

양 뺨이 퉁퉁 부어오른 손병권이 눈을 떴다.

“크윽. 여, 여기는…….”

“길바닥.”

“너, 너는…….”

“채권자지. 내 전표, 어떻게 갚을 거야?”

맑은 목소리와 무례한 어투.

손병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 진혼!”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마혈이 짚여 고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억지로 사방을 살펴보니 식솔들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손병권의 눈에 악독한 빛이 맺히고 입에서는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진혼, 네 이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상냥하기도 해라. 남이 아니라 네 안위를 먼저 고민해야지.”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날 죽이려고? 마음대로 해!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그딴 것 필요 없으니 전표나 갚으시라고요.”

“갚으라니! 주워서 써!”

정광이 콧방귀를 뀌었다.

“바보냐? 한참을 투덕거렸는데 바닥에 나뒹굴던 그게 무사할 것 같아? 피곤하게 굴지 말고 빨리 갚아. 그럼 우루무치까지 얌전히 보내줄게.”

“……!”

손병권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굴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해서 살아날 기회를 차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복수를 해야 했다.

‘아버님께 이놈에 대해 알려야 해. 방심하시지 않도록 정확히!’

자존심 따위가 대수인가?

앞날이 더 중요하지.

‘천치 같은 놈. 그깟 전표가 얼마나 한다고. 날 살려둔 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품속에 있으니 알아서 꺼내라.”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이미 내 것인데.”

“……무어라?”

“전리품 몰라? 벌써 걷고 있는데 왜 헛소리를 해?”

“…….”

벌써 뭐?

손병권은 고개를 간신히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혈조라고 불렸던 자가 눈부신 속도로 식솔들의 품을 뒤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너랑 얘기하다 보니 나도 미치겠다. 현유!”

민현유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인, 부르셨습니까?”

“응. 차용증을 만들어야 하거든. 내가 말하는 대로 대필해 줘. 수수료 줄 테니까 인상 쓰지 말고.”

현유는 봇짐을 풀고 지필묵을 꺼냈다.

향시(鄕試)와 회시(會試)를 거친 뒤 천자가 임석한 전시(殿試)에 응시한 공사(貢士)처럼 신중한 눈으로 정광의 입을 주시했다.

그리고 정광이 말하기 시작하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썼다.

어이없는 얼굴로 듣고 있던 손병권은 차용증에 적히는 금액을 듣게 되자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날강도를 봤나!

전표에 적혀 있던 금액의 백배 아닌가!

당장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정광이 어느새 찌른 아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광은 똑같은 차용증 두 장을 손병권의 눈 위에 펼치고 크게 물었다.

“문서는 공정하게 작성해야지. 틀린 내용이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

아혈을 짚어놓고 무슨!

정광이 친절하게 대신 말해줬다.

변성술을 사용해 손병권의 음성으로.

“모든 게 정확하다! 미안했다! 반드시 갚으마!”

“……!”

손병권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반면 정광은 태연했다.

원래 목소리로 손병권을 칭찬했다.

“그래도 눈곱만 한 양심은 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손병권의 손바닥에 먹물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 차용증에 찍었다.

그 밑에 정광이 수결(手決)을 두니 차용증이 두 장 완성됐다.

“후우. 후우우.”

입바람을 불어 먹물을 마르게 한 뒤, 고이 접어 한 장은 자신이 가지고 다른 한 장은 손병권의 품속에 넣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적힌 염왕채와 같은 빚이었다.

손병권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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