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1화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손병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식사를 시작할 때보다 많이 어두워진 모습이 마치 그의 마음을 비추는 것 같았다.
그러길 잠시.
‘후우우. 이쯤이면 되겠지.’
고개를 내렸다.
미청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자 억눌렀던 살의가 다시 솟구쳤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혈기왕성한 어린놈이 인내심이 깊을 리 있나. 말로 살살 긁어 미끼를 물게 한 뒤 살점을 바르려 했건만 무슨 놈의 혀가 저리도 요사하고 날카로운지, 역으로 울화통이 터져 자신이 낚일 판 아닌가?
‘그냥 일거에 쳐서 죽여 버려?’
마음은 이미 그러고 있었으나 실행하자니 걸리는 게 많았다.
단영 일행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추운 겨울에 할 일 없는 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근처에서 숙영 준비를 하는 무리도 있을 지경.
멸혼생사투를 구경하러 우루무치로 가는 자들이리라.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답은 단 하나.
놈이 먼저 덤비게 하고 통쾌하게 해치운 뒤 저들을 증인으로 삼아야 했다.
‘반드시 도발해 주마!’
적절한 수를 떠올리고 입을 열려는 그때!
정광이 먼저 말했다.
“이거 우리만 먹고 마시기 아깝네요. 일행도 오라 해서 다 함께 즐겨도 되죠?”
되긴 개뿔!
“안 된다.”
“왜요?”
왜냐니!
“양이 많지 않아.”
“흠. 이러긴 싫었는데.”
뭐가?
정광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불쑥 꺼내 뻗었다.
손병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암습을!’
쿠얼러에서 위리단가(尉犂段家) 원로를 죽일 때 격장지계에 이어 기습을 했다더니 과연.
지금 흘러가는 모양새도 똑같지 않은가?
계속 던졌던 도발은 먹히지 않았으나 어쨌든 기대했던 대로 일이 풀린 상황.
허나 너무 급작스럽고 거리도 가까웠기에 반격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손병권은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 소가주 자리에 걸맞는 무위를 지닌 고수.
‘피하고 친다!’
두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내려치고 그 반발력으로 주르륵 물러나려 했는데.
그러기 직전, 엉거주춤하게 양손을 든 자세로 굳어버렸다.
‘망할! 내가 먼저 손을 쓰도록 함정을 파다니! 간신히 참았잖아!’
암수가 아니었다.
놈이 내민 손엔 처음 보는 종이 쪼가리가 한 장 쥐어져 있었다.
“……그건 뭐냐?”
정광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글을 모르시는구나.”
손병권은 주먹을 내지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안다.”
“한번 읽어보세요. 모르는 문자는 물어보시고요.”
손병권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지금까지 잘 견뎠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야 있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낚아채 읽었다.
일련번호, 금액, 발행처 등이 적힌 종이에 고이륵단가 직인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단가가 전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전표?”
“휴우. 알아보셔서 다행이네요.”
“……이걸 왜?”
“일행이 먹고 마실 요리와 술값이요. 그 정도면 되죠?”
지켜보고 있던 손가 무인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칼날이 급격하게 휘어진 만도(彎刀)를 뽑았다.
“네 이놈! 감히 본가를 뭐로 보고 그따위 망발을, 커헉!”
무인은 광대뼈가 함몰되며 튕겨 나갔다.
그에게 주먹을 날린 손병권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정광을 노려봤다.
“내 분명 네 일행과 나눠 먹을 만큼 양이 많지는 않다고 말했을 텐데.”
“처음이라 생소하시겠지만 금원보나 은자처럼 쓸 수 있는 거예요.”
“이젠 웃기지도 않는군.”
“진짠데.”
정광은 단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가주님, 설명 좀 해주시죠.”
단영은 까라면 까는 사내.
바로 명에 따랐다.
“손 형, 이미 소문으로 들었겠지만 본가는 전장 사업을 시작하려 하오. 여러 가문을 만나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해 이렇게 나온 것이외다.”
손병권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잡혔다.
“단 형, 내가 언제 그걸 궁금해했소? 좋소, 말이 나온 김에 짚읍시다. 여긴 신강이오. 본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소이까?”
정광이 끼어들었다.
“전장 사업은 신용이 생명이라 토로번손가는 제외할 거라고 하셨는데요.”
손병권의 눈살이 떨렸다.
“……단 형, 사실이오?”
사실이 아니었으나 정광의 말은 천명과도 같았다.
“그렇소.”
단영이 망설이지 않고 인정하자 손병권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지금 본가를 모욕하는 것이오? 가주마저 곤륜으로 달려가 식솔을 보살펴야 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은 단가가?”
정광이 또 끼어들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러신 게 아니죠.”
“넌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싶은 것이냐?”
“솔선수범요. 교주께서 위선을 일삼는 정파무림에 거룩한 성전(聖戰)을 선포하셨는데 교에 속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요?”
손병권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맺혔다.
“내 아버님이 곤륜으로 가시지 않고 멸혼생사투에 신경 쓰고 계신 걸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설마요. 교주의 명과 성전의 의미를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는가는 가문마다 다르기 마련인데요, 뭐.”
“명확히 말해라.”
“전통의 명가와 아닌 가문이 같나요. 그런 관점도 있구나 하고 흘려들으세요.”
이런 말을 듣고도 계속 참으면 그게 마인인가? 부처지.
손병권은 손에 들고 있던 전표를 움켜쥐었다.
그의 입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유언이냐?”
“일상대화죠.”
“오장육부가 뒤집혀서 견딜 수가 없구나.”
“저런. 소화가 잘 안 되세요?”
“…….”
“그러게 제 일행에게 나눠주시고 적당히 좀 드시지.”
손병권은 생각을 바꿨다.
포섭을 해? 웃기는 소리.
말로 상대해 보니 한 마디마다 내상을 입는 기분이었다.
묵영권가의 후인을 자처하지만 구린 냄새가 풀풀 나는 놈 아닌가?
자그마한 명분이라도 세우고 죽이면 교주도 크게 책잡지 않고 칭찬할 게 분명했다.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눈으로 정광을 내려다봤다.
“너는 나와 본가를 모욕했어.”
“제가 언제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소가주님 수하분들뿐이잖아요. 단가 소가주님, 혹시 들으셨어요?”
단영은 고개를 저었다.
“못 들었네.”
손병권이 분노했다.
“단 형! 그대는 빠지시오! 진혼! 죄를 물어 너를 죽이겠다!”
정광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누명을 씌우시네.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세요?”
손병권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힐끗 봤다.
“……어두운 저녁이다.”
“그렇긴 하죠. 주위 사람들의 눈은요?”
아닌 게 아니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알아챈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손병권은 그들을 쓰윽 둘러보며 포권했다.
“토로번손가 소가주 손병권이 교우(敎友)들께 인사드리오! 이자가 본인과 본가를 모욕했소! 죄를 물어 죽일 것이니 교우들께서 증인이 되어주시오!”
정광이 벌떡 일어나 항변했다.
“새빨간 거짓말을! 소가주가 저를 협박해 재산을 빼앗고 살인멸구를 하려는 거예요!”
손병권이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또 요설을 내뱉는구나! 어찌 그리 요망한 것이냐!”
“흥.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무슨!”
정광은 사람들을 보며 두 팔을 벌렸다.
“교우님들! 전표가 뭔지는 들어보셨죠?”
당연한 소리.
신강에서 쓰이지 않을 뿐 누가 그걸 모를까.
정광은 손병권의 오른 주먹을 가리켰다.
“소가주가 포권을 하면서도 쥐고 있던 주먹 속에 제 전표가 있어요! 고이륵단가에서 첫 번째로 발행한 귀중한 전표인데 소가주가 강제로 빼앗았다고요!”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허어. 단가에서 전장 사업을 벌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것도 벌써 시작했을 줄이야.”
“그게 잘되려나? 망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저 청년의 전표를 손가 소가주가 강탈했다는 게 사실일까?”
정광이 큰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야 보면 알죠! 소가주! 오른손을 펴시죠!”
사람들의 시선이 손병권의 오른손에 집중됐다.
손병권은 분노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손엔 실제로 전표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정광의 손에서 전표를 낚아채는 모습을 본 자도 있을 터.
뻗대거나 숨기면 꼴이 더 우스워질 게 확실했다.
“이익!”
잔뜩 구겨져 엉망이 되어버린 전표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정광을 비난했다.
“네가 보라고 억지로 준 것 아니냐!”
정광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미쳤어요? 초면에 무슨 신뢰가 있다고 소가주께 전표를 보여 드려요? 강요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꺼냈던 거잖아요!”
“……!”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게. 초면에 뭘 믿고 그걸 꺼내.”
“다른 곳도 아닌 신강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놈은 없지.”
“아까 낚아채는 것 같더니만 진짜였네. 사람도 가문도 소문이 영 안 좋더라니. 전표를 손에 숨기고 있던 것을 부인하지도 않잖아.”
나쁜 놈들 사이에서도 더 나쁜 놈이 있는 법.
평소 손병권의 행실과 손가의 평판이 어땠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정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만! 그런 거였나? 저는 묵영권가의 무공을 이은 진혼이라고 해요! 제 신분을 알자마자 소가주 눈빛이 변하더라고요! 손가와 권가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핑계로 해치려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청년이 소문의 그자였구나!”
“옳거니!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손가 소가주가 교주에게 과잉 충성하려는 거였어!”
손병권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심마에 들 뻔했으나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멍청한 새끼들 같으니! 이 마귀에게 몽땅 속아?’
마귀뿐만 아니라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만약 단 한 놈이라도 도주해 소문을 퍼뜨리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묵영권가의 죄를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교주의 체면이 손상될 터.
‘그랬다간 죽어.’
운이 좋아도 사지가 절단되어 가문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다.
‘아! 이놈이 있었지!’
단영을 슬쩍 보고 사람들에게 피를 토하듯 절실히 설명했다.
“전부 거짓이오! 내가 만약 그랬다면 전표를 발행한 단가의 소가주가 가만히 있었겠소?”
그때, 정광이 단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소가주님! 정신 차리세요! 독기가 어디까지 침범한 거예요?”
단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독에 당한 척하라는 건 알겠는데 얼마나 안 좋은 상세를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였다.
“크, 크흑.”
“이런! 각혈까지 하시잖아!”
“……?”
각혈까지?
내가 언제?
정광이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중수법으로 단영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그때마다 단영의 입에서 핏물이 튀어 나왔다.
“커헉. 쿨럭.”
“안 돼! 이렇게 악독한 독이라니!”
정광은 단영을 둘러업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단가 무인들에게 단영을 맡기고 단가에서 얻은 도를 뽑았다.
스르릉-
평범해 보이지만 귀기(鬼氣)가 은은하게 풍기는 도신이 한기를 뿜어냈다.
그 끝을 손병권을 향해 겨눴다.
“단 형, 단 형 하며 애교를 부릴 땐 언제고 독으로 장난질을 쳐? 이 겉늙은 새끼야! 하늘이 너를 용서해도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손병권은 멍한 눈으로 정광이 하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욕설을 뱉으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내가 이런 얕은 수작질에 당할 줄이야!”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자 짙은 살기와 마기가 치솟아 마음과 육신을 불살랐다.
“진혼 저 새끼를 죽인다! 단가 놈들까지!”
식솔들이 병기를 빼 들고 일제히 외쳤다.
“존명!”
정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금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으나 명분을 쌓아 뒷감당할 일도 없어졌겠다, 단영의 내상은 보기보다 가벼운 것. 값싼 요상약(療傷藥)만 먹어도 금방 나으리라.
‘저놈만 잡으면 아무도 나를 시답잖은 핑계로 건드리진 못해.’
교주 놈에게 과잉 충성하지 못하도록 앞길을 깨끗이 정비한 것과 마찬가지.
판이 제대로 깔렸는데 뭘 망설일까.
“단가분들은 소가주와 섬랑을 보호해 주세요.”
“대인, 항상 유능하다고 칭찬하신 저를 잊으신 겁니까?”
“아, 현유도 있었지. 대협, 현유도 부탁해요.”
천마신교가 지배하는 땅에서 대협이라니.
황당했지만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단가 무인들 중 제일 직책이 높은 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알겠소.”
“흑조, 혈조, 가죠!”
“알겠네, 단주!”
“네, 단주!”
좌 흑서 우 자오.
정광은 달려오는 손가 무인들에게 양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갔다.
그리고 묵영도(黙影刀)의 일식으로 도를 휘둘렀다.
서걱-
깨끗이 잘린 병기와 팔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앞으로 한동안 쓰게 될 이 도는 상당히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