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11화 (410/569)

2부 140화

애도 아니고 아직도 꽁해서야 쓰나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 무리는 별다른 경계 없이 다가오다가 십장쯤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다.

선두에 선 중년인이 과장스레 두 팔을 벌리며 껄껄 웃었다.

“으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고이륵단가 소가주 쾌섬혈화(快閃血花) 단 형 아니오?”

단영은 담담하게 답례했다.

“오랜만이외다, 손 형.”

“허어. 나는 이리도 반가워하는데 단 형은 그렇지 않은가 보오?”

“설마 그럴 리 있겠소이까. 호탕한 손 형과 달리 항상 부동심을 지키는 게 습관이 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

중년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네놈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의미 아닌가?

대놓고 무시한 건 아니지만 그 말 속에 돋은 가시를 어찌 모를까.

‘이 새끼가 감히! 꼴 보기 싫은 걸 억지로 참고 웃어줬는데도 이따위로 나와?’

평소 왕족 가문이라며 멋 부리는 것도 짜증 났는데 고상한 척하며 돌려 까는 모습이라니, 대리국(大理國)이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렇게 콧대가 높나.

‘이걸 그냥 확!’

당장 모가지를 분질러 척추를 뽑고, 그 속의 척수를 쪽쪽 빨아 삼키면 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바람일 뿐.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단가가 더 저물고 손가가 더 솟아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한 방 먹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눈매를 애써 부드럽게 만들며 빙그레 웃었다.

“역시 단 형이시오.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수양이 부럽소이다. 멸혼생사투 때문에 우루무치로 가시는 길이오?”

“우루무치로 가는 건 맞지만 멸혼생사투와는 상관없소.”

이 대답을 원했던 손병권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가에선 적자(嫡子)를 내보내지 않소? 당연히 단 형의 자제 중 한 명은 참가할 줄 알았소만.”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 아이가 없소이다.”

“허어. 이런 일이 있나. 다른 가문도 아닌 고이륵단가에 인재가 없다니…….”

단가에서 멸혼생사투에 적자를 출전시키지 않기로 했다는 건 이미 세작을 통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자질이 모자라서든 목숨을 아껴서든 둘 중 하나, 어느 쪽이 됐든 간에 부끄러운 일인데 단영이 직접 인정하지 않았는가?

속으로 크게 비웃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데…….

맑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괜히 내보냈다가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낫죠. 단가는 손가와 달리 손이 귀한 편이거든요.”

“……!”

손병권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단영 옆에 있는 미청년을 노려봤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너는 자식을 많이 싸질러서 한 놈쯤 개죽음을 당해도 상관없지만 이쪽은 다르다는 망언을 면전에서 지껄이는 망종이 있을 줄이야!

“나를 모욕하고 내 아들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이냐?”

“설마요.”

“그럼 무슨 뜻이지?”

미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제가 많으신 걸 언급한 게 칭찬이 됐으면 됐지 어떻게 모욕이 되겠어요.”

이것만 놓고 보면 사실이었다.

“또 아무리 강하다 해도 생사투에서 필승을 자신할 순 없죠. 더구나 한두 번 치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생사투에서 지면 죽을 게 뻔한데 어린 나이에 죽으면 그보다 허망한 일이 어디 있나요?”

이것도 마찬가지.

합치면 기분 더럽지만, 따로 떼어 말하면 하나같이 옳은 소리 아닌가?

“……말솜씨가 제법이구나. 너는 누구냐?”

“진혼(眞魂)요.”

손병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과연. 그러면 말이 되지. 명불허전이군.”

“저 아세요? 세작의 능력이 좋은가 봐요.”

“흥. 세작은 무슨. 네가 한 짓들이 좀 요란했어야지. 지금 이 순간에도 너에 대한 소문이 달리는 말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을 거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는데.”

“허튼소리! 네가 왜 단 형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게냐?”

“단가의 빈객(賓客)으로 들어갔거든요.”

손병권이 단영을 응시했다.

“단 형, 사실이오?”

“그렇소.”

“이 녀석이 정말 묵영권가의 진전을 이었소이까?”

“물론이오. 나도 그렇지만 할아버님께서도 확신하셨소.”

“단 형과 태상가주께서 보증하시면 믿을 수밖에 없소만, 과거 행적이 불분명하지 않소?”

“진혼은 무공으로 자신을 증명했을뿐더러 묵영권가의 유일한 적자인 섬랑 또한 인정했소. 이를 뒤엎을 만한 증좌가 있으면 말하시오.”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손병권은 인상을 찡그린 채 침묵하다가 정광 뒤쪽에 있는 섬랑을 노려봤다.

“네가 섬랑이냐?”

“그런데요.”

“너는…….”

손병권이 캐물으려 하는데 단영이 말을 잘랐다.

“섬랑 또한 본가의 빈객이오. 추궁하시면 곤란하외다.”

“……거참.”

손병권의 눈이 번들거렸다.

“단 형. 갑자기 묵영권가라니, 다른 이들도 그렇지만 교주께서 무척 의아해하실 것이오.”

“나도 의아했지만 곧 믿게 됐으니 교주께서도 그럴 것이외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단영의 고요했던 눈도 요사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교주께선 과거 많은 교도들 앞에서 묵영권가의 죄를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고 하셨소. 그 뜻을 어기고 적절한 이유 없이 손을 대려는 자가 있으면 벌을 내리실 것이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손병권이었다.

그렇다고 맥없이 꼬리를 말진 않았다.

정광을 노려보며 단단히 경고했다.

“호가호위할 생각은 말아라. 네 죄는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근데 두 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무엇이냐?”

“멸혼생사투에 참가하신 자제분은 어디 계세요? 어른들밖에 안 보이시네요.”

“나는 가문 일을 보느라 늦게 출발했다. 지금쯤 아버님과 우루무치에 도착했을 게다.”

“그렇군요.”

“다른 하나는?”

“소가주께선 단가 소가주님보다 적어도 일고여덟 살은 많아 보이시는데 왜 서로 형이라 호칭하시죠?”

손병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살 차이다.”

“아. 한 살 많으시군요.”

“……그 반대.”

“아!”

“……무슨 의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빨리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요.”

단영도 동의했다.

“자네 말이 맞네. 손 형, 이만 가보겠소.”

“……!”

말릴 틈도 없었다.

단영은 포권을 한 뒤 일행을 이끌고 말달리기 시작했다.

손병권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구려. 구린 냄새가 풀풀 나.’

진혼이 묵영권가 무공을 쓴다는 건 사실이겠지만 진짜 정체는 오리무중인 상황.

구린 부분을 밝혀내면 섬랑이라는 꼬마를 제거할 구실이 생기고 고이륵단가까지 몰락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아는가? 교주에게 보고하면 기뻐하며 더 큰 힘을 실어줄지.

‘알 걸 다 알아내면 죽이는 거다.’

놈이 쿠얼러에서 제법 많은 놈들을 죽였다고 들었으나 그중 고수라 할 만한 자는 위리단가(尉犂段家) 원로 한 명밖에 없다고 들었다.

‘격장지계에 이은 기습으로 목이 꺾여 날아갔다고 했지. 내가 그렇게 당할 것 같으냐?’

가는 길도 같겠다, 며칠 걸리는 여정이다.

가문의 정예들도 함께 있으니 먼저 덤비게 해서 죽이면 된다.

손병권은 흉악하게 웃으며 정광 일행을 뒤따랐다.

“하하! 단 형! 같이 갑시다!”

정광은 단영과 함께 일행의 선두에서 말달리다가 피식 웃었다.

제법 재밌는 녀석 아닌가?

-단영.

-네, 지존.

-쾌섬혈화는 너무 과하고. 이제부터 꼬마라 하지 않고 이름 부를게.

-영광입니다. 헌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정말 꼬마라 부를 만한 놈이 나타났으니까.

-손병권 말씀이군요.

-응. 허세가 왜 저렇게 심해?

조우했을 때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듯 태연스레 달려오다가 십장 거리에서 멈춰 선 것만 봐도 알았다.

단영도 인정했다.

-아까 지존께 호가호위할 생각은 말라고 했지만, 정작 교주를 등에 업고 으스대는 건 손병권 자신입니다. 다른 교도들에게 교주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으니 허세가 더 심해지더군요.

-교주 놈한테 귀염받긴 하나 보네.

-그가 손가를 이용해 다른 가문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손씨 애들이 무너지면 교주 놈은 싫어하고 좋아할 교도들은 많다는 얘기잖아.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정광이 혀를 찼다.

-나대도 정도가 있지. 저놈 할아비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답답한 놈이었는데.

-그는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비는 어떤 놈이지?

-유형이 다릅니다. 경계심이 많고 음험한 성품이지요.

-흠. 깜빡이가 애들 농사는 잘 지었어. 너, 말로 제법 칠 줄 알더라. 잘 컸어.

-감사합니다, 지존. 손가가 계속 따라올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일단 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

정광이 시선을 돌려 말을 타고 있는 섬랑을 쏘아보려고 하는 순간.

“타앗!”

섬랑이 말에서 뛰어내려 두 발로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광의 시선을 느끼고 그런 게 아니었다.

몸이 조금 회복되자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정확히는 자오에게 들은 수빈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명가 출신에 두 발로 걸을 때부터 가전 무공을 체계적으로 익혔다고?’

자신과 완전 반대였다.

‘대인이 가끔은 말릴 만큼 미친 듯이 수련하는 무공광이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봐도 자신보다 조금은 성실한 것 같았다.

‘게다가 대인이 인정하는 자질과 대인에게 악착같이 덤비는 투지까지!’

이게 정말 사람이란 말인가?

‘망할. 출발선부터 차이가 너무 나잖아.’

그 녀석은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까?

평생 얼마나 쫓아갈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힘이 빠졌다.

이대로 가면 영영 승산이 없을 터.

답은 하나, 훨씬 더 열심히 수련해야 했다.

소교주니, 교주니 하는 직책보다 수빈이라는 이름 하나가 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해 줬다.

섬랑의 눈이 뜨거운 의지로 불타올랐다.

‘반드시 이긴다!’

한편, 정광은 섬랑을 주시하다가 자오를 힐끗 봤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애가 바뀐 거야?’

꽤 긴 얘기였을 게 뻔하지만 말해줄 수 있는 것만 말했으리라.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정광이 듣느라 고생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랴.

자오는 섬랑을 세심히 돌봤다.

“어억!”

달리다가 쓰러지자 뒷덜미를 낚아채 말에 태웠다.

“으으…….”

말을 멈춰 세우고 쉴 때가 되자 추궁과혈로 몸을 풀어줬다.

다음은 관엽 차례였다.

“일어서서 덤벼.”

“이익!”

섬랑은 혼신의 힘을 다해 관엽을 공격했다.

관엽은 수많은 암수와 병기들을 한 손으로 막다가 가끔 공격을 찔러 넣었다.

섬랑은 그때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땅바닥을 굴렀다.

-에잉. 진짜 못 봐주겠구나.

가만히 지켜보던 흑서도 무료함을 풀려고 나섰다.

관엽과 비무를 하는 섬랑에게 못마땅한 어조로 전음을 날렸다.

-형편없이 약한 주제에 거기서 똑바로 달려들면 어떡해? 백정 측면으로 돌아!

“크윽!”

-보법 하나는 쓸 만해졌나 싶더니 왜 다시 원상태가 됐어? 겨우 그거 달리고 지쳤냐?

“아악!”

-엄살 부리지 마! 피 좀 튀었다고 비명을…….

“이거나 먹어라!”

-……좋은 암수였다. 그래도 너무 약해!

“아 진짜! 약한 걸 어쩌라고, 컥!”

큰 나무에 기대 흐뭇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던 정광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역시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단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섰다.

주인이 힘을 쓰려는데 종복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지존께서도 섬랑을 도우시려는 겁니까?”

“아니. 밥 먹어야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손가 애하고도 그만 풀고 친하게 지내. 애도 아니고 아직도 꽁해서야 쓰나.”

뜻밖의 말에 놀란 단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숙영 준비를 하는 손병권과 정광을 번갈아 봤다.

“지존,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쟤들이 밥이랑 술을 더 맛있는 것으로 준비했잖아.”

“…….”

과연.

냄새만 맡아도 확실히 그랬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단영은 굳은 얼굴로 손병권을 바라봤다.

“해보겠습니다.”

“우리 둘만 가서 먹을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 하고.”

“……알겠습니다.”

잠시 뒤.

손가 숙영지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단가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구려! 그쯤이야! 편히 앉아서 드시오!”

단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식탐이 크지 않았던 지존의 식성을 고려해 건량과 육포만 간단히 준비해 왔기에 청한 것인데 가문 사정을 들먹이다니.

‘이놈이 본가를 뭐로 보고…….’

분노는 짧았다.

‘지존의 명이다. 참아야 해.’

단영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광은 어느새 달려와 옆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손병권과 손가 무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빠르군!’

‘세작의 얘기도 소문도 과장된 줄 알았거늘, 대단한 신법이구나!’

‘아니, 젓가락질은 더 빨라. 권장과 금나술이 특기인가?’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누가 이렇게 함부로 남에게 실력을 보이겠는가?

그나마 장기인 것들로 시위를 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손병권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야. 혹시 모르니 최선을 다해야 해.’

함정일 수도 있었다.

아예 자신만으론 이길 수 없다 상정하고 빠른 협공으로 잡아야 했다.

‘일단 포섭 가능성이 있나 알아보고. 안 되면 덤비게끔 하는 거다.’

젊은 놈이니 인내심이 그리 깊지는 않을 터.

말로 살살 긁으면 미끼를 물 것이고…….

‘그때 낚아서 살점부터 바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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