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8화
꿈과 목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자가 당사자만 아는 비화들을 줄줄이 말하고 압도적인 폭력으로 설득하면 어느 정도는 믿게 된다.
그런데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는데도 맞아 죽긴커녕 막혔던 기혈이 뚫리고 끊어졌던 진기가 이어진다고?
그자가 부처의 현신이라고 주장해도 공손히 합장할 판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 정도야 당연히 믿을 수밖에.
더구나 그 신기(神技)를 보인 이가 영원히 살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진천마 아닌가?
따뜻한 방으로 옮겨진 단철후는 의식을 되찾고 진기의 흐름을 확인하자마자 현실을 받아들였다.
평생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던 위대한 마인에게 바로 부복하여 깍듯한 예를 올리려고 하는데…….
“크흑.”
아파도 좀 아파야지.
온몸이 끊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하지만 단철후가 누구인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마도십대고수의 일원이자 고귀한 피가 흐르는 기품 있는 마인이었다.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사지를 바동거려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정중히 부복하며 위대한 마인을 소리 높여 찬양했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임시방편으로 살려놓은 거야.”
“…….”
“앞을 가로막는 벽을 깨서 더 살고 싶으면 잘 들어.”
“네, 지존(至尊).”
“네가 쾌검에만 목을 매는 건 그렇다 치자. 쾌(快), 강(强), 중(重)이 따로 노는 게 아닌 건 알지?”
“그 정도쯤은…….”
“그래, 장하다. 그래서 그것들만 챙겼냐?”
“죄송합니다. 그것들만 궁리하기도 벅차서…….”
“한 가지만 파서 효율을 높였다 이 말이네.”
“그렇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격언…….”
“대체 어떤 놈이 만든 이론인지 원. 그놈이 애들을 망친다니까. 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겁을 줘서 앞길을 가로막아?”
정광은 입으로 단철후를 조곤조곤 팼다.
“하나에만 매몰되니 검로(劍路)가 뻔해지지. 속도, 위력, 이런 거 다 빼고 길만 놓고 보면 예전과 크게 바뀐 게 없잖아.”
손짓으로 시범까지 보여주며 팼다.
“최단 거리로 가는 게 무조건 빠른 건 아니야. 찌르면 한 점으로 찔러오고 베면 한 선으로 베어오니 그 길만 간파하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 너와 엇비슷한 수준에선 먹히겠지만 언제까지 걔들이랑 놀 거야? 위를 봐야지.”
정광은 패고 패고 또 팼다.
“그 수준까지 올라놓고 심마 따위에 자꾸 휘둘리면 어떡해? 그간 소홀히 했던 무리들을 처음부터 전부 궁리해. 가만, 너한테는 너무 많나?”
“조금 그런 감이…….”
“어쩔 수 없지. 그럼 많이도 말고 딱 세 개만. 환(幻), 변(變), 유(柔)는 꼭 다시 파.”
물론 패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수염은 제법 멋들어지네.”
“……감사합니다.”
“응. 처음부터 끝까지 떠먹여 줄 순 없으니 이쯤 하자.”
정광은 마무리로 무겁게 당부했다.
“귀찮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쾌(快)에 몰두해서 거기까지 올라갔는데 다른 거라고 왜 못하겠어. 이번에도 스스로 올라봐. 너 하기에 따라 네 무위와 수명, 가문의 흥망이 결정될 거다.”
단철후의 눈에 열기가 어렸다.
심마가 뇌리를 침범할 때 나타나는 혈안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뜨거운 의지였다.
“감사합니다, 지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집념에 휘둘리진 말고. 또 못난 모습을 보이면 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놀릴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진 됐고.”
정광은 방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꼬마야. 다 끝났으니까 들어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단영이 조심스레 들어와 예를 표했다.
“지존, 부르셨습니까.”
“너는 일단 앉고. 깜빡아, 꼬마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내가 그러라 해서 그런 거니 서운해하지 마. 그래도 서운하면 둘이 알아서 풀고.”
단철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손자를 변호해 주는 정광의 배려가 낯설어서였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더니. 예전과 다른 점이 조금은 있구나.’
손속도 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을 누르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존.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명을 거역했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감히 무슨 담량으로 그러겠는가?
정광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집안싸움은 안 하는 것으로 하고. 꼬마, 너와 내가 나눴던 대화를 깜빡이에게 알려줘. 그리고 일 얘기를 하자.”
“네, 지존.”
단영은 어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단철후는 얘기가 끝날 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듣다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정말 교주를 죽이러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저희 같은 범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요.”
“왜? 어려울 것 같아?”
“예전의 지존이시라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아까 저를 훈계하시기 전에 예전에 비해 약한 상태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지존이시니 뜻을 이루시겠지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겠습니다.”
“판을 새로 짜주는 거니 알아서 해.”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저희로선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지존께서 내려주신 기회,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정광은 단철후의 어깨를 토닥이며 응원했다.
“응. 수고하고. 쿠차 같은 소도시들은 건들지 마.”
“지존께서 직접 떼어내셨던 것들을 제가 어찌 감히 탐하겠습니까.”
“삐졌었으면서.”
단철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꼭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역과 교역하는 이들 중에서 문제가 있거나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킬 만한 자들이 모두 소도시 쪽으로 빠지니 쿠얼러에서 묵는 상단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신경 쓸 일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것이다.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렇게 눈곱만 한 이득이라도 억지로 찾아 스스로 위안해야지. 다시 아까 얘기로 넘어가서, 내 뜻을 쉽게 이루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섬랑이란 아이가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하고 지존께서 교주 앞에 서시는 것 말씀입니까?”
“잡다한 녀석들과 손을 섞을 필요 없는 제일 깔끔한 방법이지.”
“첫 번째 것이 이루어지면 두 번째 것은 자연히 따라가게 되어 있으니 그 아이가 문제군요.”
단철후는 비무대 위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홀로 포효하던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독종에 승부사 기질도 뛰어나고 어떻게든 이길 줄 아는 아이더군요. 지존과 닮은 점이 제법 많습니다.”
“걔가? 나랑?”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자 단철후가 급히 덧붙였다.
“격차는 하늘과 땅만큼 나지만 말입니다. 그만큼만 돼도 훌륭한 인재라 할 수 있지요. 헌데 마음이 너무 여려 걱정입니다.”
“생사투 상대를 죽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제껏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정광이 피식 웃었다.
“여린 게 아니라 제 나름으로 머리를 굴린 거야. 뭐 그건 나중에 보고, 네 판단은 어때?”
“섬랑의 우승 가능성 말씀입니까?”
단철후는 이마에 가득한 주름을 더 깊게 잡으며 생각하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존께서 영약을 먹이시고 녹여주신 것 같던데 무공 입문이 너무 늦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지?”
“남은 예선도 문제지만 칠대가문 적자들이 참가하는 본선에서는 많이 힘들 겁니다.”
“그러니 걔가 쓸 만한 병기들 좀 내놔.”
“……네?”
“쿠차엔 질이 좋은 게 없었거든. 부잣집인 단가에서 구해야지 어쩌겠어. 이해하지?”
당연히 할 수밖에.
“병기고를 열어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건 전부 취하십시오. 지존께서 쓰실 것도 말입니다.”
“내가 쓸 거라니?”
단철후는 정광이 탁자에 기대놓은 운룡을 가리켰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찬란한 금광을 쏟아내더군요. 그런 검은 지존께서 쓰셨던 애검과 진…… 진옥룡이라는 기재를 떠올리게 하는 운룡밖에 없지 않습니까?”
“너도 이걸 아는구나.”
“장원에서 계속 칩거해 온 제 귀에도 들렸을 정도니 모르는 사람이 없다시피 할 겁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정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운룡을 쓰면 목격자를 전부 살인멸구(殺人滅口) 해야 할 터.
그러기 귀찮을 때 쓸 만한 병기가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가져줄게.”
“감사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병기고에 갔다.
마도칠대가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괜찮은 것들이 즐비했다.
정광은 먼저 섬랑의 작은 손과 체구에 맞는 병기들을 몇 개 고르고 자신이 쓸 것을 찾았다.
허나 눈에 차는 게 있을 리 있나.
철을 귀신처럼 다루는 야장(冶匠)들이 모인 철혈장의 역작들을 몇 개나 소유한 정광 아닌가?
‘그나마 저게 제일 나으려나.’
평범해 보이지만 귀기(鬼氣)가 은은하게 풍기는 도가 있었다.
도병(刀柄)을 잡아 뽑으니 도신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괜찮네. 깜빡아, 이거 뭐야?”
“저희는 검을 쓰는지라 평소 관심을 갖지 않던 것입니다. 기록을 찾아보겠습니다.”
“귀찮게 뭐 하러, 그냥 쓰면 되지. 잘 쓸게.”
정광은 단 씨 조손과 남은 대화를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얘긴 다 했네. 향리객잔(香梨客棧)에 가 있을 테니까 사람을 보내서 마차를 가져가. 마차에 실린 재물들 값어치만큼 전표를 발행해서 내일 주고.”
“네, 지존.”
“네가 쳐냈던 내 은자도 전부 회수해서 전표로 바꿔. 하얀 독분은 밀가루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감사합니다, 지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내일 보자. 다른 사람들 앞에선 말 편하게 해.”
“그, 그건…….”
“해.”
정광은 객잔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게 일이 잘 마무리되었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나머지 설명을 했다.
“소가주는 우리와 함께 움직일 거예요. 다른 가문들을 방문해 전장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고객으로 유치해야 하니까요.”
자오가 미소 지었다.
“함께 다니면 귀찮은 일이 많이 줄겠습니다. 누가 함부로 시비를 걸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단주 주위엔 이상할 만큼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아 안심은 안 되는군요.”
“나무는 가만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나무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격이죠.”
자오가 눈을 끔벅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단주. 그게 아니라…….”
“섬랑, 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굴어야 해.”
섬랑이 황당한 얼굴로 항변했다.
“뜨내기가 갑자기 제 비수에 가슴을 들이대고 죽어버렸을 때, 그놈 동료들이 저를 욕했던 것보다 더 억울하네요. 사고 치지 말라뇨, 제가 아니라 대인이…….”
“네가 지금 이럴 때야?”
“……네?”
정광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일차 예선을 통과했다고 이렇게 놀고 있으면 어떡해?”
“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묵영보(黙影步)를 밟다가 느꼈던 기분을 떠올려 봐. 네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뭐라 말했지?”
섬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좋았어요. 저, 더 열심히 수련할게요.”
“바로 어제 일이다.”
“……죄송해요, 대인.”
“내가 아니라 네게 사과해.”
“……알겠습니다.”
정광은 섬랑을 따끔히 혼내고 단가에서 가져온 나무 궤짝을 열었다.
그 속엔 섬랑에게 딱 맞는 여러 병기가 있었다.
“고개 들어.”
“……네. 헉!”
섬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병기를 보는 눈이 없다 해도 알 수 있을 만큼 멋진 것들 아닌가!
정광이 그것들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앞으론 더 힘들어질 거야.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네 꿈과 목표를 되새기며 견뎌. 그리고 이겨. 할 수 있겠어?”
섬랑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맹세했다.
“당연히 할 수…….”
“아. 단가에서 벌써 사람이 왔네. 다들 뭐 하세요? 마차 내주고 밥 먹죠.”
* * *
다음 날 아침.
정광 일행은 일 층에 모여 쿠얼러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배를 채우고 차로 입가심을 하는데 항상 그랬던 것처럼 민현유가 정중히 말했다.
“대인,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떠날 준비 해.”
“잘 못 들었습니다?”
“떠날 준비 하라고.”
“어디로 말입니까?”
“멸혼생사투 예선이 열리는 곳들을 지나 총단까지.”
민현유가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가 폈다.
“대인,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왜?”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유능하니까. 너만 한 안내인을 어디서 구해.”
“무척 감사한 말씀이고 영광입니다만 그럴 수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궁금해 죽겠으면서 빼기는.”
“빼는 게 아니라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얼마면 되는데?”
민현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항상 부드럽던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낮게 가라앉았다.
“대인, 언제까지 저를 돈으로 사실 순 없습니다. 저도 꿈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꿈과 목표, 얼마면 되냐고.”
정광이 눈짓하자 자오가 잽싸게 전낭을 열어 탁자에 내려놨다.
그 속에 있던 보석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휘황찬란한 빛을 뿌렸다.
정광은 그 위로 양손을 쭉 내밀어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정말 돈으로 살 수 없으면 다른 것으로 사주면 되지. 난 사실 이쪽이 전문이거든.”
민현유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꿀꺽.
거절하기엔 보석도 너무 컸고 주먹도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