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7화
빠른 게 뭐 대수라고
“헉. 헉. 쿨럭! 커헉!”
단철후는 차가운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기침을 토했다.
마도칠대가문 중 하나인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의 소가주로서 해서는 안 될 못난 행동이었으나 이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약관이 되어 젊음을 뽐내던 건강한 육신은 녹초가 된 지 오래였고 부단히 쌓아온 내공은 어느새 몽땅 써버려 단전이 텅텅 비어버렸다.
평소 경쟁심을 불태우던 다른 가문의 소가주들도 시체들 틈에 드러누워 체력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판에 무슨 놈의 체통을 따지겠는가?
그들보다 연배가 높은 여러 가문의 어른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쌩쌩했다.
“패기 있게 자원한 결사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쓰나.”
단철후는 눈을 질끈 감고 치를 떨었다.
‘자원은 무슨! 당신이 노려보며 무언으로 압박하는데 누가 나서지 않고 버틸 수 있겠소?’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꼬마들은 괜히 데려왔나. 영 쓸모가 없네.”
칠대가문의 소가주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무리에 속하는 단철후는 눈을 부릅뜨고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다른 소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요사스럽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청년에게 모였다.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자존심이라도 있어야지. 그렇다고 너무 세우다가 죽지는 말고.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얼마나 슬프겠냐.”
단철후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렸다.
청년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 내 말이 틀려?”
단철후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저자에겐 모든 걸 솔직히 말해야 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라 놀랐을 뿐입니다.”
“뭐가 다른데?”
“북천호가(北天扈家)가 반기를 들었다가 소교주께 멸문당한 이래로 본교는 평화로웠습니다.”
“이제 겨우 삼 년쯤 됐지.”
“하지만 소교주께서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오르시자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대역무도한 자들이 기겁하여 외세를 끌어들였지요.”
“이미 늦었는데 왜 그러나 몰라.”
“시간이 더 흐르면 소교주를 영원히 꺾을 수 없게 될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너 지금 걔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것 같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무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교주께선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의 머리를 직접 치기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총단에 남으실 교주님의 안전을 위해 칠대가문의 소가주들인 저희를…… 으음.”
“패기 있게 말하다가 왜 그래? 힘을 북돋워 줄까?”
청년이 양손을 어루만지자 단철후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소교주께선 저희를 인질로 끌고 오셨습니다. 인질이 죽으면 슬퍼지시는 게 아니라 귀찮아지시는 것 아닙니까?”
단철후는 스스로 말해놓고도 크게 놀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청년은 그런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위로했다.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네?”
“내가 그 망할 영감을 걱정하겠냐? 너희들을 데려온 건 유람을 시켜주고 견문도 넓혀주기 위해서야.”
“…….”
단철후는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핑계를 댈 것이지, 뭐가 어째?
칠주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죽어라 달리고 싸웠을 뿐인데 유람?
그러다가 결국 작은 산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어 사흘째 혈투를 벌이고 있는 판국에 무슨 견문을 넓히고?
하지만 청년의 생각은 달랐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네. 계속 숫자로 밀어붙이더니 이번엔 소수 정예야.”
붉은 가사(袈裟)를 걸친 라마승들이 오솔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청년은 피로 물든 검을 뽑아 어깨에 척 걸치고 오연히 명했다.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잘 보면서 견문을 넓혀.”
“……!”
청년은 포달랍궁(布達拉宮) 라마승들이 정면에 서자마자 달려들었다.
그들은 지금껏 싸워온 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더 강했다.
칠흑보다 더 어두운 마기를 전신에 두르고 라마승들의 병기와 육신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우뚝 서, 검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종복들을 내려다봤다.
“네놈들의 가문은 나를 해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까?”
공포에 질린 눈으로 청년을 올려다보던 종복들이 일제히 답했다.
“소교주께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놈들의 할아비가 그랬고 아비가 그랬지. 이젠 누구 차례냐?”
“저희들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오늘 일을 기억해라.”
“존명!”
“그러기 싫으면 덤비고. 기꺼이 지워주마.”
종복들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외쳤다.
“존명!”
청년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하아아암. 견문은 다 넓혔고.”
“…….”
“배고프네. 밥 먹자.”
안타깝게도 먹을 게 없었다.
건량과 육포를 충분히 챙겨왔으면 뭐 하는가?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소비하거나 잃어버렸는데.
“미치겠네.”
청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투덜거렸다.
“나무껍질이라도 먹으려 했더니. 멀쩡한 게 하나도 없잖아.”
사흘 내내 혈투를 벌였는데 멀쩡할 리 있나.
주변에 있는 나무는 모두 라마승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망할. 고기 먹는 셈 치지 뭐.”
청년은 나무껍질을 벗겨서 꼭꼭 씹어먹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피에 절었다고 고기가 될 리 없지. 너희들도 빨리 먹어. 배를 든든히 채워야 마지막 결전을 치를 거 아냐.”
“……!”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결전이라니?
워낙 중과부적이라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얘기 아닌가?
마치 그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청년이 피식 웃었다.
“배를 곯아 머리가 안 돌아가나 보네. 마뇌(魔腦), 네가 설명해.”
주저앉아 있던 왜소한 청년이 창백한 얼굴을 들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네, 소교주. 자고로 개들을 시켜서 사냥하다가 제대로 안 되면 주인이 얼굴을 내밀기 마련…….”
“비유는 적당히.”
“네! 적들은 사흘 동안 포위하고 공격을 쏟아부었는데도 성과를 얻지 못하자 진짜 고수들을 보냈습니다. 수뇌도 당연히 가까이 왔겠지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소교주께서 미끼를 풀어 대어가 걸렸으니, 이제 낚으러 가시려는 겁니다.”
“한 대 치려니까 딱 끝내네.”
청년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명했다.
“다 들었지? 먹어.”
“존명!”
너나 할 것 없이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다.
단철후도 울컥울컥 나오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정말 열심히 먹었다.
호승심 때문이었다.
소교주가 어디선가 주워와 마뇌라는 가당찮은 별호를 붙여주며 기대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우습게 봤건만, 정말 보통 머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놈뿐만이 아니야.’
소교주의 명을 받고 무공을 모르는 마뇌를 몇 번씩이나 업고 뛴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소가주도 난적이었다.
문(文)도 무(武)도 자신보다 뚜렷이 뛰어난 이가 둘이나 있는 것이다.
‘내가 질 것 같냐.’
삶의 목표로 삼은 소교주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일 뿐.
그날 밤 치러진 마지막 결전에서 최선을 다했다.
장기인 쾌검으로 적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로 해봐야 얼마나 할까.
일수천혈(一手千血).
소교주는 자신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줬다.
유난히 큰 만월 아래에서 음울한 월광을 받으며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운 마신(魔神)으로 화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는 지옥도를 그려나갔다.
단철후는 그 장관에 압도되어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살기를 느끼고 옆으로 굴렀다.
서걱-
등에서 핏물이 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심하기는!’
전장에서 천외천(天外天)의 경지를 감상하다가 넋을 잃다니.
벌떡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자꾸 떠오르는 소교주의 장엄한 그림을 지우며 자신만의 기법으로 검이라는 붓을 움직였다.
눈부신 섬광(閃光)으로 팔방을 빛내어 자신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이게 내 검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만큼 살기 또한 치솟았다.
그 두 가지를 합쳐 주위를 휩쓸었다.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났다.
입에서 광소(狂笑)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죽인다! 섬광만으로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여…….”
그때, 무언가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콰앙!
“커헉!”
단철후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감히 어떤 놈이!”
혈안을 번뜩이며 바로 일어나려 했으나 무자비한 발길질이 쏟아졌다.
엄청난 고통이 중첩되어 정신이 또렷해졌다.
혈광이 사라진 눈동자에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이 맺혔다.
“소, 소교주?”
“너희들이 죽으면 내가 슬퍼진다니까.”
“크헉! 그, 그만! 알겠으니 제발 그만하십시오!”
“멍청한 놈. 제 것만 고집하다가 심마에 들어?”
“억! 으악!”
미청년은 매질을 한동안 더 하다가 단철후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빠른 게 뭐 대수라고 자랑하냐? 섬광이란 금세 빛을 잃기 마련인데.”
* * *
단철후의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분명히 그랬었어.’
육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 말을 다시 듣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눈이 ‘그’와 너무 닮았기에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편식을 안 해야 극에 닿을 수 있다니까요. 그래서 언제 제대로 된 쾌검을 펼치시겠어요?”
이어진 말 또한 어투만 다를 뿐 과거와 똑같았다.
“잘 돼봐야 반짝이 정도지.”
심지어 마지막 말까지!
단철후의 눈이 요사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오래전 목표로 삼았다가 너무 거대해 무릎을 꿇었던 벽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반짝이가 아니다.”
“그러게요. 깜빡깜빡하시네. 깜빡이로 바꾸죠.”
“나를 비웃는 것이냐?”
“아뇨. 지금이 더 보기 좋은데요.”
“그건 무슨 의미지?”
“하나에 매몰된 멍청이보다 그 하나마저 꺼져가는 송장이 낫다는 얘기죠.”
단철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마기와 살심이 끓어올라 뒤엉킨 것이다.
“죽이기 전에 알아야겠다. 묵영권가의 무공을 이었다고 들었거늘, 그게 아니라 그 위대한 분의 후인인 것이냐?”
“설마요.”
“네 정체를 밝혀라.”
“이거야 원.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데…….”
정광은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위대한 분이야, 깜빡아.”
단철후가 혈안을 번뜩였다.
정광이 씩 웃었다.
단영이 다급히 외쳤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주십시오!”
“늦었다.”
“어? 내게 부탁한 건데?”
번쩍!
단철후의 허리춤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와 정광을 갈랐다.
하지만 정광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멀찍이 물러나 양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급히 내공을 모았나 본데 얼마 안 되네. 이렇게 허무하게 소모해도 되겠어?”
“단 일검이면 된다.”
단철후의 기세가 변했다.
전신에서 요사한 기운을 쏟아내며 바늘처럼 뾰족한 살기를 곤두세웠다.
그것들을 정광에게 겨눴다.
‘살(殺)!’
빛을 쏘아내 정광의 미간을 꿰뚫으려는 그때!
정광이 은자를 연이어 던졌다.
단철후는 검을 움직여 그것들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귀에 정광이 이죽거리는 소리가 꽂혔다.
“은자는 섬광을 뿌리며 막지 않네? 그것만 파는 거 아니었어?”
“시끄럽다!”
정광이 하얀 독분을 뿌렸다.
단철후는 급히 호흡을 멈추고 옆으로 이동했다.
정광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웃었다.
“하하. 가루 하나하나를 쾌검으로 썰어야지. 창피하게 뭐 하는 짓이야?”
“이놈이 진짜!”
단철후는 분노가 들끓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단 한 수를 펼칠 여력밖에 없는데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얕은 수작을 부리다니. 저래서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정광이 끓는 기름에 물을 부었다.
“싸울 생각 없으면 내일 다시 올까? 아, 그때는 죽어 있으려나.”
단철후는 한줄기 섬광이 되어 정광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정광이 차고 있는 검집에서 찬란한 금룡이 터져 나왔다.
쩌엉!
단철후의 눈이 커졌다.
원래 실력의 반밖에 못 썼지만 평생 매진해 온 쾌검이 단 한 수 만에 봉쇄된 것이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텐데! 내 검로(劍路)를 아는 건가? 설마!’
정광은 운룡을 놓고 주먹을 쥐었다.
단철후를 두들겨 패며 훈수를 늘어놓았다.
“무공에는 쾌(快), 환(幻), 변(變), 유(柔), 강(强), 중(重) 등 수많은 묘리가 있어. 어떤 문파든 어떤 무공이든 중시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에만 매달리진 않지.”
짜자자작!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고 자질 또한 그러니 어느 하나가 조금 앞서고 우선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빠바바박!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소홀히 했다간 발전에 한계가 있고 문제가 생긴다고 말 안 했었나? 아, 이건 안 했구나.”
뻐버버벅!
“당장은 성취가 느려도 어떻게든 모두 끌고 가야 더 빨라지는 데 왜 계속 헛짓거리를 해?”
콰직! 빠각!
“응? 왜 대답이 없어? 아직도 내 말이 이해 안 가냐?”
찰싹! 찰싹!
단영이 쓰러져있는 할아비의 위로 몸을 던지며 사정했다.
“이미 기절하셨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리 비켜, 인마.”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응?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야 너희 가문을 알뜰하게 써먹을 수 있잖아.”
“네? 저, 정말입니까? 사실 수 있는 겁니까? 얼마나 더 오래…….”
“좀 더 제대로 맛을 봐야 알지. 비켜봐.”
“아, 알겠습니다.”
퍽! 콰앙! 뽀각!
정광은 단철후의 전신을 발뒤꿈치로 악랄하게 내려찍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많이 망가져서 답이 없네.”
“헉!”
“짧으면 일 년, 제 놈이 잘하면 꽤 오래 살 것 같기도 하고.”
“아!”
뻐엉!
단철후의 눈이 살짝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정광이 그의 뒤통수에 있는 기혈 중 막힌 것을 발끝으로 걷어차 뚫은 것이다.
“하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잖아. 깜빡이 너도 그렇지?”
이미 한참 전에 의식을 잃은 단철후는 대답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