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6화
저 모르시겠어요?
단철후가 갑자기 나타나자 의자에 앉아 있던 단영이 다급히 일어나 맞이했다.
“할아버님. 왜 벌써 나오셨습니까? 들어가셨다가 생사투가 끝나면 그때 천천히 오시지요.”
“괜찮다. 바람을 쐬고 싶어 이러는 것이야.”
“날이 이렇게 찬데…….”
“내가 멸혼생사투를 언제 또 보겠느냐? 그만하고 앉거라.”
천마신교도 사람 사는 곳이다.
더구나 고이륵단가는 오래전 멸망한 운남성 대리국(大理國)의 왕족으로 예법을 철저히 지키는 명가 아닌가.
할아비가 이러는데 손자가 할 말이 있나.
단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화려한 의자를 가리켰다.
“네, 할아버님. 이쪽입니다.”
단철후는 푹신한 모피가 깔린 의자에 쇠약해진 육신을 묻고 주위를 둘러봤다.
병세가 골수까지 침범했다 해도 마도십대고수의 위엄이 어디 갈까.
그를 주시하고 있던 구경꾼들이 급급히 시선을 돌렸다.
허나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그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려는 듯 은밀하게 훔쳐보고 있었다.
‘호랑이가 이빨이 빠지니 까마귀가 날아드는군.’
다른 가문의 세작이리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리 불쾌하진 않았다.
모두 자신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인데 누굴 탓할까.
‘세월 때문이 아니야.’
다들 노환이 왔다느니 천수를 다했다느니 떠들어댔지만, 마공의 부작용을 더 이상 넘지 못해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몸이 그 지경이 되었다 해도 마음이라도 온전하면 좋을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에서 흥미가 사라졌다.
오래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적수가 없어 무료한 것이면 여한이라도 없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깨지 못해 무기력해졌다.
그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바꿔볼 순 없을까 해서 이렇게 밖으로 나왔는데…….
‘……!’
일찍 나온 보람이 있었다.
과할 정도로.
다소 흐릿했던 단철후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영아.”
“네, 할아버님.”
“네가 말했던 묵영권가의 후인이 마차 두 대를 끌고 오는 저 청년이더냐?”
단영은 할아비가 뚫어져라 보는 인물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자가 진혼(眞魂)입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이젠 아무나 별호에 진(眞)을 붙인다고 헛웃음을 흘렸었거늘. 역시 네 안목은 믿을 만하구나.”
“과찬이십니다.”
“허나…….”
단철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저자는 믿을 수 없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신분이 불분명해도 능력이 있으면 품을 수 있다. 저런 높은 수준의 역용술로 용모를 감춰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면 감안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정도가 있지, 너무 강하지 않느냐?”
“진혼의 무위가 어느 정도길래 그러십니까?”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정확히 느껴지진 않는다. 그래도 저 나이에 가능한 수준이 아니란 건 확실해. 저런 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진혼이라는 청년이 대머리 장한에게 다가가 웃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전주님.”
“오셨습니까, 대인.”
“오늘도 모조리 쓸어 담으러 왔어요. 섬랑 쪽에 전부 걸게요. 배당이 어떻게 되죠?”
전주의 대머리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죄, 죄송합니다.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뭘요?”
“모두 섬랑에게 걸어 내기가 성립되지 않고 있습니다.”
“네? 말도 안 돼. 진짜 실망이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청년은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두 팔을 벌렸다.
“아니, 대체 뭘 믿고 섬랑에게 거셨어요? 누가 봐도 상대가 더 강하잖아요.”
“…….”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청년의 목소리가 더 간절해졌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천지신명께서 도우셔서 섬랑이 또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분들, 그렇게 한가한 분들이 아니에요. 원래 소신대로 가시죠. 어서요.”
“…….”
소용없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청년이 짧고 강하게 탄식했다.
“망했네.”
“그, 그러게 말입니다.”
“늦게라도 거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니 마차는 여기 놓고 갈게요. 잘 부탁드려요, 전주님.”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년은 일행과 함께 비무대 앞에 마련된 천막으로 갔다.
전주는 수하들에게 명해 마차에 실린 재물들을 탁자 위에 쌓게 하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금은보화가 이렇게 산처럼 쌓이고 있소! 일확천금을 노리고 승부를 걸 영웅은 없으시오? 내 극진히 모시리다!”
천마신교에, 그것도 도박꾼들 중에 영웅이 있을 리 있나.
사람들은 탐욕으로 눈을 번들거리면서도 나서지 않았다.
단철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지 않은 재물이군.”
단영도 동의했다.
“전장 사업 준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첫 고객으로는 과한 편이지요.”
“그래서 더 찜찜해.”
단철후의 시선이 진혼 일행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두꺼운 솜옷을 입은 저 아이가 묵영권가의 적자냐?”
“네, 섬랑이라고 합니다.”
“너무 어리고 내공도 거의 없구나. 어떤 아이지?”
“독종에 승부사입니다.”
“좋은 자질이군. 네 말대로 눈만 봐도 그래 보이긴 하다만…….”
단철후는 다른 천막에 있는 아이를 훑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안 좋아.”
“아까 진혼이 인정했듯이 구자영이 훨씬 더 강하긴 하지요.”
“그런데도 모두 약자에게 걸었다?”
단철후는 진혼을 향한 것만은 못하지만 또 다른 호기심을 느꼈다.
답은 하나, 섬랑이라는 꼬마는 약한 주제에 강한 자를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재밌군.”
“직접 보시면 더 그럴 겁니다.”
단영은 비무대에 있는 중년인에게 명했다.
“이총관(二摠管). 시간이 됐으니 시작하시오.”
“네, 소가주.”
지금까지 멸혼생사투를 진행해 왔고 그 마무리까지 맡은 이총관이 섬랑과 구자영을 호명했다.
아이들이 비무대에 올라와 마주 섰다.
이총관은 둘을 번갈아 보며 주의를 줬다.
“상대가 더 이상 못 싸우거나 항복할 때까지다.”
두 아이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떤 수를 써도 좋다. 시작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아이가 격돌했다.
단철후는 가만히 구경하다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개싸움을 걸 줄 알았는데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의 사각을 노리는구나.”
단영이 미소지었다.
“어제 생사투에서도 꼭꼭 숨겨뒀던 보법을 꺼내 재미를 봤는데 전부 드러낸 게 아니었나 봅니다.”
“실력을 숨겼으면 네 안목으로 놓칠 리 없지. 단 하루 만에 성장한 것이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자질이었다.
저런 아이가 단가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묵영보(黙影步)라니.
화후는 형편없지만 형(形)만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의(意)를 품은 것이었다.
‘저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섬랑의 두 손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묵영곤(黙影棍)!’
묵영보만큼은 아니었으나 쌍단봉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펼치는 초식에 감탄하는 순간.
섬랑이 쌍단봉을 구자영에게 던지고 쇄도했다. 구자영은 당황하지 않고 도를 휘둘러 쌍단봉을 쳐낸 뒤 그대로 내리그었다.
섬랑은 재빨리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구자영이 더 빨랐다.
예리한 도가 섬랑의 어깨를 찍었다.
쩌엉-
“헉!”
구자영은 도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을 토하며 허공으로 치솟는 도를 자신도 모르게 바라봤다.
어깨를 자르고 들어가 낭심까지 베고도 남을 일격이었거늘, 옷만 찢고 이렇게 튕겨 나가다니!
섬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구자영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박치기를 했다. 무릎으로 낭심을 화끈하게 올려치고 명치를 죽어라 때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어 눈이 풀린 구자영을 땅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친 뒤 요리하기 시작했다.
생사투가 아닌 일방적인 구타였다.
단철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력이 제법이군. 내공은 없다시피 하지만 기가 활발하게 돈다 했더니 영약이라도 먹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싸움이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 어떻게든 이길 줄 아는 녀석이로다. 영이 네가 보기엔 어떻느냐?”
단영도 동감했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안 된 지금도 저런데 수련을 거듭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손속이 너무 가벼워. 상대에게 저렇게 자비를 베풀어서야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단철후가 눈살을 찌푸리고 단영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계속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러는군요.”
섬랑은 쌍단봉을 야무지게 휘둘러 구자영의 사지를 꼼꼼히 부러뜨렸다.
놓친 부분은 없나 다시 확인하고 두꺼운 솜옷을 벗어 찢어진 어깨 부위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구자영의 도에 맞아 우그러진 시커먼 철편을 꺼내 대충 던졌다.
땡그랑-
일전에 정광이 무쇠솥을 쭉쭉 찢어 전신에 칭칭 감아줬던 것들의 일부였다.
섬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총관을 바라봤다.
“헉. 헉. 승자 마음이니 물어보실 필요 없어요.”
“그럴 생각이었다.”
이총관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승자와 패자를 외쳤다.
“섬랑 승! 구자영 패! 멸혼생사투 쿠얼러 예선의 최종 승자는 묵영권가를 대표해 출전한 섬랑이외다! 섬랑은 승자의 자격으로 우루무치로 이동해 이차 예선에 참가할 것이오!”
“이야아아아!”
섬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손뼉을 쳐 섬랑의 치졸한 승리를 축하했다.
단철후는 손뼉을 치고 있는 진혼이라는 청년을 빤히 바라봤다.
“대단하군.”
-얼굴이 두껍긴 합니다.
“영아. 갑자기 웬 전음이냐?”
“죄송합니다. 소손도 모르게 그만.”
단철후는 손자가 했던 말을 정정했다.
“염치없다고 한 게 아니라 섬랑을 가르친 실력을 칭찬한 게다. 단기간에 이렇게 실력을 끌어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단철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무대에 올라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섬랑에게 짧은 축하를 건넸다.
“수고했다. 좋은 구경을 했구나.”
“그거, 칭찬이죠?”
“물론. 하지만 앞으로는 그것만으론 힘들 거다.”
단철후는 비무대에서 내려와 장원을 향해 걷다가 비틀거렸다.
단영이 재빨리 달려와 부축했다.
“할아버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네가 걱정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단철후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입을 열었다.
“너와 네 아비에게 모든 걸 맡긴 지 오래라 참견하지 않았다만 너무 위험한 자다.”
“진혼 말씀이군요.”
“그 말고 누가 있을까. 네 뜻은 변함없는 것이냐?”
단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미안해할 것 없다. 가주가 없을 땐 네 뜻이 본가의 뜻이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 번은 확인하고 싶구나. 한 식경 뒤 진혼을 내게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단영은 진혼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게 하고 단철후와 함께 걸었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솔직히 나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단철후의 머릿속에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군. 내 손에 의지하며 걷던 아이가 나를 부축해 이끌다니.’
그때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자신의 처소에 이르렀다.
따뜻한 방에 들어가 화로 앞에 앉자 조금씩 활력이 돌아왔다.
“되었다. 그만 나가거라.”
“네, 할아버님. 진혼과 함께 오겠습니다.”
단영이 떠나라 단철후는 가부좌를 틀었다.
내공을 조심스레 운기하며 내부를 관조했다.
단철후의 눈썹이 꿈틀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아니, 좋은 편이야. 설마 회광반조(回光返照)라도 일어나고 있는 건가.’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이 소중한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했다.
단철후는 전심전력으로 집중해 내공심법을 운공했다.
몇몇 기혈이 막히고 진기가 새어나가는 건 여전했으나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내공이 단전에 쌓였다.
‘이 정도면 됐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가볍지 않은 일격을 먹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았다.
‘마침 오는군.’
방문을 활짝 열자 최근 몇 년 들어 유난히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화원이 펼쳐졌다.
추운 겨울이라 죽음으로 덮인 화원을 두 사람이 가로질러 왔다.
그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데려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웃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귀천하시기 직전이네요.”
단철후는 담담히 답했다.
“네가 길동무가 되어주면 쓸쓸하진 않겠구나.”
“꾹 참고 혼자 가시죠. 저는 가려면 한참 남았거든요.”
“네 대답 여하에 달렸다. 너는 누구냐?”
“저 모르시겠어요?”
“진혼이라는 별호를 말하는 것이냐?”
“정신도 깜빡깜빡하시네.”
“쓸데없는 말로 내 정신을 흔들려고 하지 마라. 정체 따위는 우선 넘어가 주마. 진정한 목적은?”
“교주를 죽일 건데요.”
“…….”
“이제 제가 여쭤봐도 돼요?”
“아직이다.”
단철후는 청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 무공이 그렇게 강하다고 믿느냐?”
청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전에 비하면 모자라죠.”
“어린 녀석이 늙은이를 놀리는구나.”
“얼마 드시지도 않았으면서 유세가 심하시네요.”
“그만! 어쨌든 스스로 모자람을 알면서 어떻게 교주를 죽이겠다는 말이냐?”
“죽일 수 있으니까.”
“……무어라?”
“저는 천하의 그 누구도 죽일 수 있어요.”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어르신부터 죽여서 증명해드리죠.”
“네가 나를? 내 쾌검을 받아낼 자신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빠른 게 뭐 대수라고 자랑하세요? 섬광이란 금세 빛을 잃기 마련인데.”
“놈. 말 하나는 참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단철후는 말을 하다가 기시감을 느꼈다.
‘가만. 어디선가 들어봤던 말인데…….’
그사이 청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나무랐다.
그 행동과 목소리가 과거의 누군가와 겹쳤다.
“편식을 안 해야 극에 닿을 수 있다니까요. 그래서 언제 제대로 된 쾌검을 펼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