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06화 (405/569)

2부 135화

깜빡깜빡

정광은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요리를 한 젓가락 집어 먹고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그런 두 가지 행동을 반복하길 몇 차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더라니. 습관이 무섭다니까.’

환생한 지 겨우 이십여 년밖에 안 됐건만, 그새 이렇게 변할 줄이야.

뭐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꼬마. 그만 일어나서 앉아.”

단영은 석상처럼 부복한 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어. 우리 같은 필부처럼 죽기는 할까? 어쩌면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는구나.”

조부가 그렇게 말했었고 자신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십여 년 전에 갑자기 귀천해버렸다.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직접 확인하려는 인파로 총단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때, 시신이 되어서조차 마중마(魔中魔)다운 위엄을 뿜어내 마도칠대가문을 비롯한 모든 교도들에게 경외받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그래도 죽은 건 사실이었기에 안도하면서도 내심 실망했었는데…….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나타났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그라면 이러는 게 더 어울려.’

외롭고 쓸쓸한 삶을 영원히 사느니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걸 택한 것이리라.

허나 그 지랄 맞은 성품이 어디 가겠는가?

그간 어디서 뭘 하며 살았든 간에 지겨워질 때도 됐겠다, 자신의 사후 한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피로 씻으러 온 것이리라.

“일어나라고. 요리 다 식잖아.”

“……!”

머릿속에 연이어 그려지는 참혹한 광경에 몸을 부르르 떨던 단영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영광을…….”

“널 위해 그러는 게 아니야. 같이 먹어야 맛있거든.”

단영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겸상하자는 것도 놀라운데 같이 먹어야 맛있다고?

그렇게 오만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던 이가 할 말인가?

‘아차! 이럴 때가 아니야!’

단영은 무척 똑똑한 자였다.

도저히 믿지 못할 사실에 경악해 헛소리를 내뱉었다가 매를 한 번 더 벌었는데 같은 실수를 또 범할 리 있나.

까라면 까야지.

진천마의 율법에 따라야 했다.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벌떡 일어섰다.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하고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감히 두 번이나 말하게 하고 시선을 마주친 이유를 토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내가 돌아와서?”

“그것도 그렇지만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 성품이? 닮지 않아 다행이라 했었지?”

“……!”

단영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얼굴은 차라리 낫지, 속은 시커멓게 타다 못해 녹아버릴 지경!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아니, 그라면 그러는 게 당연하지!

그나마 살아날 틈이 보이는 길은 단 하나!

솔직해져야 했다.

“얼굴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겨지셨습…… 크헉!”

정광은 단영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칭찬했다.

“변하긴 했는데 지금 건 역용한 거야. 교활한 놈. 즉사할 길은 요리조리 잘 피하네.”

“감사합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천천히 죽여줄게. 얼굴은 표가 나서 안 때렸는데. 그냥 패줄까?”

“지켜봐 주십시오. 충성을 다해 신임을 받고야 말겠습니다.”

“나를 따르겠다?”

단영이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굳게 맹세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진실한 진천마만이 천하마도의 충성을 오롯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최소한 배반하지는 않을 테니 믿어주십시오.”

정광이 웃었다.

“하하. 있는 거라곤 안목과 오성뿐이던 놈이 혀가 매끄러워졌네.”

“과찬이십니다.”

“장사가 적성인 걸 알게 되어 전장을 차리려는 것은 아닐 거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단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진천마께서 귀천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칠대가문 중 제일 부유했던 합밀오가(哈密吳家)가 멸문했습니다.”

“다른 가문들이 합공해서 재산을 나눠 가졌다지? 예상하긴 했는데 신강에 돌아와 알아보니 정말 그렇더라.”

“어떻게 예상하셨습니까?”

“산적질 하던 애가 약 이십 년 전에 중상을 입은 노인을 구해주고 몇 년간 무공을 배웠는데 그게 합밀오가 무공이었거든.”

지금 탑극랍마간에서 불회당을 이끌며 구르고 있을 황웅을 말하는 것이었다.

합밀(哈密)은 서역과 중원을 잇는 교역로인 천산남로(天山南路)와 천산북로(天山北路)가 하나로 만나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그곳이 본거지인 오가(吳家)는 항상 돈이 넘쳐났다.

오가의 힘은 다른 가문들과 비슷했으나 자금력만큼은 훨씬 더 뛰어날 수밖에.

그런 오가의 노인이 중상을 입은 채 도주하고, 자신을 구해준 황웅에게 무공을 전수하며 죽을 위기에만 쓰되 목격자는 전부 죽이라고 강요했다면 뻔한 얘기 아닌가?

단영이 살짝 놀란 얼굴로 감탄을 토했다.

“그 당시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가주였던 현 교주가 다른 가문들을 부추기고 직접 주관한 일이라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 줄 알았습니다. 헌데 오가에 생존자가 있었을 줄이야…….”

정광이 피식 웃었다.

“그놈이 철두철미한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될 순 없지. 그래서?”

“오가를 나눠 먹고 배를 불린 여섯 가문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한동안 숨을 골랐습니다. 아니, 그런 줄 알았지요.”

단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극소연가 가주는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진천마께서 아끼셨던 쌍뇌(雙腦) 중 한 명인 마뇌(魔腦)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단영의 입에서 많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 * *

두 사람은 주루에서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단가 장원에 이르렀다.

정광이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소가주님. 내일 봬요.”

단영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세나. 조심히 가게.”

“그냥 지금 전부 해치울까요?”

몰래 지켜보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정광에게 복수하려는 자들도 있었으나 다른 가문에서 멸혼생사투 출전자들을 살피기 위해 보낸 세작들도 있었다.

단영이 빙그레 웃으며 만류했다.

“그럴 필요 있겠는가. 다들 멀어지고 있어.”

“제가 말하니까 그렇게 된 거죠. 그럼 이만.”

정광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단영이 전음을 보냈다.

-오래전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날려 버린 무능한 소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어차피 저희에겐 그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헌데…….

단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음을 이었다.

-향리객잔(香梨客棧) 말입니다. 그들을 이용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응. 그만큼 안내 잘하는 애들이 없으니까.

-총단으로 말이 흘러들어 갈 텐데…….

-총단이 부리는 조직이지만 교주 쪽은 아니잖아. 빤히 알면서 왜? 진짜 궁금한 걸 말해.

단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인의 할아버님은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반짝이?

-그렇습니다. 내일 멸혼생사투 일차 예선 우승자가 정해지면 직접 만나 축하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자연히 보시게 될 겁니다.

-가주가 부재중이면 태상가주가 그러는 게 전통이긴 하지.

-노환으로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감히 청합니다만 되도록 좋은 쪽으로…….

-일단 나에 대해 말하지 마.

-……네?

-해후는 급작스러워야 제맛이잖아.

정광은 씩 웃어 보이고 객잔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모두 일 층에서 정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편하게 들으세요. 현유는 온종일 수고했으니까 그만 나가보고.”

민현유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수고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히 할 일이 더 생기게 구멍 몇 개 또 뚫어줄까?”

“좋은 밤 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민현유는 점소이들과 숙수들을 데리고 떠나면서도 술상을 차려놓는 걸 잊지 않았다.

정광은 사람들에게 권하며 입을 열었다.

“단가 소가주와 손을 잡았어요. 그가 알 만한 고사를 얘기하며 설득하니 금방 협조하겠다고 하더군요.”

흑서와 관엽은 정광이 정체를 드러내고 패서 복속시켰다는 걸 눈치챘고 자오와 섬랑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단주.”

“최고예요, 대인. 근데 제 돈은요?”

정광의 대답에 섬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네 몫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소가주에게 맡길 거야. 그가 만드는 전장의 첫 번째 고객이 되는 거지.”

“미친! 전표라는 종이 쪼가리로 바꾸실 거라고요? 제정신이 아니…… 아악!”

정광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찔끔 흘리는 섬랑에게 충고했다.

“이럴 때냐? 내일 열릴 생사투 준비나 해.”

“으으. 눈도 그쳤는데 전술은요?”

“밑천을 다 드러냈는데 그런 게 어딨어. 이번엔 진짜 실력으로 싸워야지.”

“망했네.”

“그런 말 할 시간에 후원으로 나가 보법이나 펼쳐. 네가 유일하게 흉내라도 내는 거니까.”

“……칭찬 맞죠?”

“비슷할걸.”

“그럼 해야죠!”

섬랑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후원으로 달려갔다.

그 밝은 기분에 전염된 걸까?

자오는 다소 경직돼 있던 마음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단주. 단가 소가주는 왜 전장 사업을 하려는 겁니까?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 현물로 거래하던 관습을 바꾸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혹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이제야 좀 혈조처럼 돌아왔네요. 궁금한 게 있으면 속으로 삭이지 말고 물어요.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들만요.”

“네, 단주!”

“저한테가 아니라 흑조에게.”

흑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정광은 개의치 않았다.

“혈조 생각이 맞아요. 단가 사정이 안 좋대요. 관 숙수, 맞죠?”

관엽이 인정했다.

“단가는 현 교주가 교권을 잡은 후에야 지지를 표명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긴 하네.”

“아!”

“하필이면 최고수인 태상가주의 건강도 안 좋고. 곤륜을 치기 위해 차출된 가솔들을 가주가 직접 이끌고 떠났을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이지.”

자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주가 직접 간 게 안 좋은 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곤륜으로 간 칠대가문의 수장 중에 가주가 또 있겠는가? 가주가 직접 참전했다는 명분과 신분을 내세워 가솔들이 개죽음당하는 일에 투입되지 않게 보호하려는 것일세.”

자오가 혀를 내둘렀다.

“칠대가문 간의 알력이 대단한가 보군요.”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닐세.”

정광이 덧붙였다.

“사람 사는 곳에 파벌이 없을 리 없죠.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단가는 위축되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번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할 만한 인재도 없으니 후대를 노리기도 여의치 않고요. 더 늦기 전에 가문을 바로 세우려는 거예요.”

“전장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겁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려는 것이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랬다간 합공을 받아 다 털릴걸요. 멸문은 덤이고요.”

“……역시 천마신교는 다르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단가는 전표라는 편의를 베풀되 이익은 최소한으로 할 거예요. 전표, 정말 편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요.”

“누구든 간에 한 번 맛보면 금원보나 은자를 뭉텅이로 짊어지고 다니기 싫어질걸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소요해야 할 텐데…….”

“한동안은 손해를 보면서라도 어떻게든 고객을 유치하겠죠.”

“단가는 뭘 노리는 겁니까?”

“전장은 현물을 받고 그 값어치에 해당하는 전표를 주죠. 사업이 잘되면 잘 될수록 단가에는 현물이 쌓일 거예요.”

“다른 가문들이 공격해서 빼앗으려 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대륙전장(大陸錢莊)에 갔을 때 거기가 천하에서 제일 안전한 곳 중 하나라고 말씀드렸었는데 기억하세요?”

“물론…… 아! 단가를 공격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현물을 맡긴 다른 이들이 가만히 두지 않겠군요!”

“네. 전부 합심해서 털 리도 없죠. 자기들 것을 그대로 돌려받고 얼마 안 되는 이윤을 취한 단가의 재산을 나눠 먹을 뿐이니까요.”

그러면 또 금원보와 은자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런 귀찮은 일을 자초할 만한 바보는 많지 않았다.

단가는 전장 사업을 벌여 모두로부터 보호받으려는 것이다.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할 때까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고요.”

“확실히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교주가 힘을 실어주면 훨씬 쉬워지겠죠.”

“단가는 섬랑이 소교주가 되어 훗날 교주 자리에 오르는 것에 건 겁니까?”

“설마요. 섬랑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럼 현 교주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하지만 그는 단가를 탐탁지 않아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문제예요. 오히려 방해를 할 판이니.”

“허어.”

“그래서 단가가 저와 손을 잡은 거죠.”

“……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할 교주를 제가 죽일 거니까요.”

* * *

다음 날 아침.

정광 일행은 단가 장원으로 향했다.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섬랑이 아니라 정광에게 쏠렸다.

하지만 곧 단가 장원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걸어 나오자 그쪽으로 향했다.

정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내일한다더니. 반짝이가 깜빡깜빡하네.’

노인은 고이륵단가 태상가주이자 마도십대고수 중 일인.

섬광마검(閃光魔劍) 단철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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