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4화
이제야 눈치챘습니다
단영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궁(宮)을 올려다보다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쥐었다.
마도칠대가문 중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를 이끄는 가주이자 마도십대고수에 속하는 섬광마검(閃光魔劍) 단철후가 열 살배기 손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단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머리를 숙였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단철후는 담담히 물었다.
“손에서 땀이 많이 나는구나. 두려운 것이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돌아가도 된다.”
“괜찮습니다.”
“죽을 수도 있어.”
“제가 택한 길입니다.”
손자의 의젓한 자세와 당찬 대답에도 할아비는 고개를 저었다.
“의지는 가상하나 그를 너무 쉽게 보는구나. 네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소손이 비록 목숨을 걸었다 하나, 그가 해온 전설적인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철후는 잠시 침묵하다가 지적했다.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마음에 안 찰 수도 있다.”
“소손이 모자라서 그런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단영은 훌륭한 인재였다.
안목과 오성(悟性)만큼은 그 연배에서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
단지 상대가 너무 안 좋았을 뿐이었다.
“그가 너무 뛰어나서다. 네 나이 때 뭐라 불렸는지 아느냐?”
당연한 소리.
천마신교에서 그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독심악혼(毒心惡魂)입니다.”
“맞다. 단순한 독종이 아닌 독심악혼이었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별호였으나 피에 미친 살인귀는 아니었다.
“그는 칠대가문을 비롯한 거대세력과 싸우기 위해 힘없는 하급 교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발적으로 복속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 일수천혈(一手千血)이란 별호가 붙을 만큼 손에 많은 피를 묻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피를 아끼게 됐다. 그리고 결국 본교 역사상 유일무이한 칭호를 얻게 됐지.”
단철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보다 한 배분 위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대부분 아버님께 들은 얘기들이지. 이제 아버님은 물론이오, 나 역시 그를 직접 겪으며 느꼈던 것에 대해 알려주마.”
단영이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할아버님. 소손, 세이공청(洗耳恭聽) 하겠습니다.”
“그의 제일 무서운 점이 무엇인 것 같으냐?”
단영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재깍 답했다.
“두뇌도 마음도 육신도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모든 걸 갖춘…… 아니. 필체는 끔찍하다만, 어쨌든 그런 자가 실존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지. 허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단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엇인지요?”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 말하곤 하나, 그 운도 기가 바탕이 되어야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강해서 이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허나 그는…….”
단철후의 눈에 두려운 빛이 맺혔다.
“……약했을 때도 강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계속 죽이며 성장했어. 그리고 마침내 홀로 우뚝 섰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영은 이맛살을 모으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할 것 없다. 나도 모르니까.”
“네?”
“그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어.”
“아!”
“우리 같은 필부처럼 죽기는 할까? 어쩌면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는구나.”
단철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그래서도 안 되고. 반드시 죽을 거라 가정하고 얘기하마.”
“네, 할아버님.”
“그가 아직도 후계를 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 보느냐?”
“자신의 사후 칠대가문이 오랜 시간 동안 다투며 진통을 겪도록 조장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낫지. 틀렸다.”
“그럼 대체 왜…….”
“귀찮아서야.”
“……다, 단지 그 이유로 말입니까?”
“소싯적부터 수많은 강대한 적과 혈투를 벌이며 치열하게 살다가 결국 적수가 없어져 버린 삶에 무슨 의욕이 있을까.”
단철후는 자신의 손자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런 데도 해볼 생각이냐?”
“…….”
단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또렷이 말했다.
“소손, 반드시 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만류하진 않으마. 가자.”
“네. 할아버님.”
두 사람은 천마궁(天魔宮)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있던 묵영대원들이 절도있게 두 손을 모았다.
“단가주를 뵙습니다.”
“수고가 많네.”
“소교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단철후가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던 검을 건네려 하자 묵영대원이 거절했다.
“병기는 맡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말인가?”
“불필요한 절차는 전부 생략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
단철후는 묵영대원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영아, 가자꾸나.”
“네, 할아버님.”
정문이 열렸다.
단철후는 손자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가며 전음을 보냈다.
-그가 많이 심심한가 보구나.
“……?”
-병기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건 모반을 획책해도 전부 죽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제발 그러라고 부추기는 것일 게다.
“……!”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무료함에 지친 그가 네게 흥미를 느낄 수도 있으니 잘된 일이야. 이해했느냐?
단영은 발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다란 전각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벌써 이러면 안 돼.’
조용히 심호흡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며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전각 문을 지키고 있던 묵영대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단영의 눈이 커졌다.
저 멀리 있는 보좌(寶座)에 요사스럽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검은 악귀의 형상이 수놓인 핏빛 장포(長袍)를 입은 그는 한없이 권태로운 얼굴로 단철후를 응시했다.
단철후는 그의 오장 앞까지 다가가 정중히 부복했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소교주를 뵙습니다!”
미청년의 입에서 나른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짝이 왔냐?”
“네, 소교주.”
“간이 커졌네. 만세 타령은 영감한테나 하라고 말했을 텐데.”
“교주께서 최근 교지(敎旨)를 내리시며 소교주께 말씀드리라 했습니다.”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오랜만에 얼굴 좀 봐야겠네. 필아, 영감 어딨어?”
용맹한 인상에 탐스러운 흰 수염을 늘어뜨린 묵영대주 권필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답했다.
“신전(神殿)에서 제사장과 교리를 연구하고 계십니다.”
“약삭빠르기는. 잘도 도망갔네.”
미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차다가 단철후에게 물었다.
“반짝아. 갑자기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제 손자가 소교주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네가 벌써 손자를 봤다고?”
“소교주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분입니다.”
“세월 참 빠르네. 뒤뚱거리며 걸음마 하던 네가 할아비가 되고.”
미청년은 신기한 물건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단철후를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해, 꼬마.”
할아비처럼 부복하고 있던 단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입을 열려다가 굳어버렸다.
미청년의 화려한 용모와 대비되는 지극히 평범한 눈을 보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굳은 의지가 얼어붙은 의식을 깨웠다. 얼마 안 되는 내공을 그러모아 필사적으로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소교주께 단영이 인사드립니다!”
“귀청 떨어지겠네.”
미청년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단영을 내려다보다가 단철후를 칭찬했다.
“손주 농사는 나쁘지 않게 지었어. 내 앞에서 말도 할 줄 알고 말이야.”
마인도 사람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칭찬에 인색한 소교주가 피붙이를 괜찮게 평하자 단철후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소교주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분입니…….”
“거기까지.”
미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듣기도 지겨운데 말하긴 얼마나 짜증 날까. 그 하해와 같은 어쩌고는 앞으로 영감에게만 말해.”
“네, 소교주.”
“다른 가문 애들에게도 전부 전하고.”
“존명!”
미청년은 다시 단영을 바라보며 명했다.
“서론 빼고 본론만.”
단영은 감히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마기나 살기를 일으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위엄을 쏟아낼 줄이야.
할아버님의 말대로 영원히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천갑자 동방삭 같은 삶이라.
사는 것도 적당히 살아야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아까 봤던 소교주의 눈에 비슷한 감정이 어려 있었던 듯한 느낌이…….
‘잠깐. 이럴 때가 아닌데 무슨.’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청했다.
“소인을 거둬주십시오.”
“너무 본론이잖아. 살 좀 붙여서.”
“소교주께선 수많은 피로 길을 열어 가며 오연히 걸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인도 그 길을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싶습니다. 소인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을 다할 테니 제자로 거둬주십시오.”
“힘들게 살아서 뭐 하려고? 선대가 그랬으면 후대는 편하게 살아야지.”
“……!”
“그리고 나는 제자를 받지 않아. 그 용무로 찾아오는 놈들은 전부 자근자근 밟아줬는데 못 들었어?”
단영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재밌는 녀석이네. 고통을 제거하는 잡기를 익혔나? 어느 정도 수준이길래?”
가만히 듣고 있던 단철후가 급히 설명했다.
“아닙니다, 소교주. 영이는 가전 무공만 익혔습니다.”
“아. 그래?”
미청년은 단영의 어깨를 향해 들었던 검지를 도로 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 걸까. 궁금해지잖아. 말해봐.”
단영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일단 호기심을 끌어 계단 하나는 올라간 것이다.
‘할아버님께서 조언하셨던 것처럼 솔직히 말해야 해.’
속이 시커먼 놈이라고 내쳐져도 어쩔 수 있나.
오직 진실만이 소교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었다.
“소교주께서 귀천하시면 본교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겁니다. 칠대가문은 서로를 향해 칼날을 세울 것이고 수많은 교도들이 피를 흘려 신강을 붉게 물들일 것입니다. 그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소인이 소교주의 심득을 이어 본교를 평화롭게 이끌고 싶습니다.”
미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날로 먹겠다고?”
이미 축축이 젖어 있던 단영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때문인지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건조하다 못해 쩍쩍 갈라졌다.
“그렇습니다.”
“어린놈이 야망이 크네. 시기를 고를 줄 아는 잔머리와 시커먼 마음도 있고.”
단영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뭘. 본교에서 전통적으로 원하는 인재상인데. 내가 싫어하는 유형이라 문제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미청년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했으니 죽이진 않을게.”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소교주…….”
“귀따갑다니까. 보기 흉하니까 닦기나 해.”
“존명!”
단영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데다 피까지 줄줄 흘리는 얼굴을 양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그대로 부복하고 있다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자 재빨리 더러워진 바닥을 닦았다.
미청년이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말귀가 아예 안 통하지는 않네.”
“감사합니다!”
“흐으음. 필아.”
묵영대주 권필이 바로 답했다.
“네, 소교주!”
“묵영수 좀 천천히 펼쳐봐. 저 꼬마가 얼마나 알아보는지 보게.”
“존명!”
묵영대주는 천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초식을 이어나갔다.
단영은 전심전력을 다해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
미청년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묵영대주의 신형이 멈췄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소교주.”
“꼬마. 머릿속에 다 담았냐? 진의는 바라지도 않아. 형(形)을 말하는 거야.”
단영이 자신 있게 답했다.
“네!”
“자신감 좋네. 그럼 한 번 더 보고 얘기하자고.”
미청년은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묵영수를 펼쳤다.
단영은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다, 달라!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르잖아!’
묵영대주의 것이 아름드리나무라면 미청년의 것은 울창한 숲이었다.
미청년의 것이 천산(天山)이라면 묵영대주의 것은 작은 언덕밖에 안 됐다.
단영은 손짓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짧은 발걸음에도 감동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미청년이 눈앞에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눈이 괜찮구나. 오성도 쓸 만하고.”
단영보다 할아비인 단철후가 더 기뻐했다.
소교주에게 이런 극찬을 듣다니!
정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꼬마. 일어나.”
“……네, 네! 소교주!”
기대를 뛰어넘는 칭찬에 격동하여 멍하니 있던 단영이 급히 일어섰다.
“다른 것도 확인해 보자. 한번 봤으니 피할 수 있지?”
“……네?”
“내공은 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네?”
“간다.”
“아악!”
“이런. 조금 빨랐나? 느리게 갈게.”
“어억!”
“이것도 빨라? 그럼 이건?”
“커헉!”
“뭐야 이거? 눈과 오성뿐이잖아.”
미청년이 불쾌한 얼굴로 단영의 작은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나를 귀찮게 한 벌이다.”
“끄아악!”
* * *
“끄아악!”
단영은 비명을 토하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엄청난 구타를 당한 것처럼 온몸이 아팠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소교주의 것과 비슷하지만 외로움과 쓸쓸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꼬마, 이제 일어났냐? 귀찮게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단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제야 눈치챘습니다.”
“참 빨리도 안다.”
“그분의 자제 되십니까? 모친께선 누구신지…….”
정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좀 더 맞아라.”
콰앙!
“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