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04화 (403/569)

2부 133화

기분이다, 꼬마

천지신명께서 보우하사 눈도 계속 내리겠다, 섬랑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꺼내 던지며 시간을 끌다가 단 한 순간을 노려 상대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눈밭을 구르며 치고받는 개싸움으로 끌고 가 두 다리를 꺾고 관자놀이를 때려 기절시켰다.

“헉. 헉.”

간신히 일어나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데 승패를 판정하는 중년인이 물었다.

“이번에도 상대를 죽이지 않을 것이냐?”

“네.”

“이유는? 아니, 됐다. 그야 승자 마음이겠지.”

“바로 그거죠.”

중년인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섬랑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충고했다.

“적을 살리면 살릴수록 네가 빨리 죽게 될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수할 거니까요.”

“재밌군.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니 여기까지만 하마.”

중년인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승자와 패자를 외쳤다.

“섬랑 승! 우소묵 패! 이로써 오늘 예정되어 있던 생사투가 모두 끝났소! 내일 마지막 생사투를 열고 최후의 승자는 우루무치로 이동해 이차 예선에 참가하게 될 것이오!”

“이야아아아아!”

섬랑은 하얀 눈송이를 끝없이 뿌리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하다가 인상을 썼다.

‘아파 죽겠네.’

조금 전 쓰러뜨린 녀석은 단성오 다음으로 강하다고 평가받을 만큼 벅찬 상대였다.

결국 이기긴 했으나 손발이 어찌나 매운지,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찔끔 나고 속이 뒤집혀 토하고 싶을 지경이었…….

“우웨엑!”

섬랑은 거하게 쏟아내고 깊이 후회했다.

참지 말고 진작 토할 것을.

속이 편해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모양새가 좀 빠지면 어떤가? 어쨌든 이겼으면 됐지.

비웃든 야유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승자의 영광과 권리를 마음껏 누릴 거다!

이렇게 다짐하는데…….

‘……왜 이리 조용해?’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야유하는 이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판돈이 쌓여 있는 거대한 탁자로 걸어가고 있는 정광에게!

“어디 보자…….”

정광은 금은보화의 양을 가늠하다가 탄식했다.

“살짝 많잖아. 안빈낙도의 삶이 무너지겠는걸.”

“……!”

염장을 질러도 정도가 있지.

돈을 잃은 자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잃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

그걸 말이라고!

“어쩔 수 없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전날처럼 판돈을 강탈하려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수하들과 함께 탁자를 빙 둘러싸고 사방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있던 전주(錢主)가 두 손을 모았다.

“오늘도 대인께 크게 배웠습니다.”

“뭘요. 세상만사가 전부 뜻대로 될 리 있나요. 마음먹기에 달린 거죠.”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네. 수수료 제하시고 마차에 실어주세요. 한 푼도 흘리지 말고 몽땅.”

“저, 대인.”

전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대인처럼 섬랑에게 건 고객이 있어서 그 몫은 빼야 합니다.”

“안목이 있는 분이 계셨네. 많이 거셨어요?”

“그건 아닙니다. 얼마 안 됩니다.”

“누구신데요?”

“저 녀석들입니다.”

전주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시체 처리를 업으로 삼는 허름한 행색의 꼬마들이 있었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번엔 잘 걸었네.”

입이 귀에 걸린 꼬마들이 중구난방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댔다.

“모두 대인 덕분이에요!”

“대인만 믿고 따라갔다니까요!”

“잘 먹겠습니다!”

정광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데 괜찮겠어? 칼침 맞고 전부 뺏길지도 모르는데.”

“아!”

기뻐하던 꼬마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며 주위를 훔쳐보다가 돈을 잃은 자들의 사나운 시선을 확인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한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간절히 부탁했다.

“대, 대인.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정광은 허리를 숙여 녀석과 눈높이를 맞추며 혀를 찼다.

“쯧쯧. 자라나는 새싹들이 이래서야 쓰나. 이렇게 해야지. 잘 봐.”

“……네?”

정광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오연한 눈으로 장내를 쓸어 봤다.

“내 것을 빼앗고 싶은 놈들은 빨리 나와. 새벽에 숨어들어 왔던 도둑놈들처럼 전부 죽여주마. 기다리기 귀찮아서 진작 도발했는데 왜 안 덤벼?”

“……!”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정광의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아. 나쁜 놈들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찔리는 게 없는 분들은 마음 편히 흘려들으세요.”

“…….”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정광은 몇몇 마인들을 노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시간 아깝네. 안 와? 내가 가?”

“……!”

살의를 품고 있던 자들이 경악하며 정신없이 병기를 뽑아 드는 그때!

깨끗한 음성이 장내를 부드럽게 울렸다.

“진혼(眞魂). 자네 말대로 시간이란 소중한 것이지.”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단가 소가주 단영이 그 길을 따라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나와 환담을 나누면서 저녁 식사를 즐기기로 약조해 놓고 왜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지체하는가?”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만나기로 한 걸 이렇게 드러내? 친한 척하기는. 너무 노골적이잖아.’

어쨌든 대답을 해줘야 할 터.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금방 끝내려고 했죠. 배 많이 고프세요?”

“그런 편일세.”

“어쩌지. 애들이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지네요.”

“그건 신경 쓰지 말게나. 쿠얼러에선 그 누구도 무공을 모르는 자를 건드릴 수 없네.”

“단가 분들도요?”

“본가에 죄를 범하면 모를까, 똑같이 적용되지.”

단영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경고했다.

“아이들에게 손을 대면 본가가 나설 것이오. 특히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명심하시오.”

꼬마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단영은 그걸로 끝내지 않았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겠소. 그리고 생사투가 끝난 지 언젠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오? 나와 달리 배가 고프지 않은가 보오? 그게 아니면 무슨 용무가 있어 이러는 것이외까?”

사람들이 슬그머니 흩어지기 시작했다.

단가 소가주가 정광과의 친분을 드러내며 지그시 압박하는데 더 있어 봐야 뭐 하는가?

복수하기 위해 왔던 자들 중 몇몇은 끝까지 버티려 했으나 단가 무인들이 검자루에 손을 얹자 이를 갈며 사라졌다.

단영이 정광을 돌아봤다.

“이제 걸음을 옮길 수 있겠는가?”

“네. 잠시만요.”

정광은 일행에게 판돈을 챙겨 객잔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뒤 단영을 봤다.

“가시죠.”

“이쪽일세.”

단영은 장원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단영이 일정한 보폭으로 걸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인가?”

“네.”

“그런데 왜 묻지 않나?”

“밥 먹으면서 얘기해 주시겠죠.”

단영은 몇 걸음 더 걷다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네.”

“말씀하세요.”

“향리객잔에서 위리단가(尉犂段家) 사람들에게 묵영편을 펼치며 묵영권가의 진전을 이었다고 주장했다 들었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아.”

“의심을 품은 사람에겐 진실을 말해도 의심받기 마련이죠.”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지.”

“왜요?”

“자네가 내 앞에서 묵영수를 펼쳤으니까. 그것도 진짜 중의 진짜, 진천마 그분의 것을.”

정광은 슬쩍 떠봤다.

“현 교주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보좌(寶座)에 앉아 있는 교주는 진천마가 아니야. 진정한 진천마는 전대 교주 그분뿐이라네.”

정광은 마음이 흐뭇해졌다.

‘얘가 속은 좀 시커메도 나름 똘똘하긴 했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컸네.’

잘 큰 단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천마께서 창안해 내려주신 무공들을 묵영권가 사람들은 제대로 익히지 못했네. 자질이 부족해서지. 헌데 자네의 묵영수는 그분 것과 흡사하더군.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됐는지를 떠나 자네는 그분의 후인으로까지 불릴 자격이 있어.”

“아아.”

“자네가 그분이 남기신 무공을 제대로 펼칠 수 있어 다행이야. 그분의 성품을 닮지 않은 건 더 다행이고.”

정광은 단영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 코흘리개 꼬마 놈이 미쳤나. 나를 귀찮게 했는데도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해 줬더니 이런 식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고 전생의 자신을 변호했다.

“진천마 그분, 되게 좋은 분이었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절대 아니지.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한 게 권오라 들었네. 술주정뱅이가 됐다더니 헛소리만 늘어놓았나 보군.”

정광은 그제야 깨달았다.

“소가주님이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니고요? 혹시 누군가한테 머리를 조금 많이 맞아서 다치시거나, 아니면 치병을…….”

단영이 옅게 웃었다.

“자네도 농을 할 줄 아는군. 그분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머리를 조아리다가 직접 당한 경험이 있는데 잘못 알 리 있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네.”

단영은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가 얘기를 돌렸다.

“어쨌든 자네는 예의가 있어. 내게 그러듯이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자에겐 형식적이나마 존대를 하지 않는가?”

“그거, 칭찬인가요?”

“물론이지. 아무리 오만한 사람도 자신을 낮춰야 할 때가 있네. 그래야 오래 살아. 그런 굴레를 벗어나 제멋대로 살 수 있는 이는 내가 알기론 단 한 명, 그분밖에 없었어. 현 교주는 엄청난 사람이지만 그 경지엔 못 올랐지. 내가 그분을 평생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는 이유일세.”

진천마는 그 당시 가주였고 지금은 태상가주가 된 조부를 ‘반짝이’라 명명했다.

마도칠대가문에 속하는 고이륵단가의 가주이자 마도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한 섬광마검(閃光魔劍)에게 그런 우스운 별호를 붙여 부르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진천마는 고이륵단가 가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공평하게 대했다.

무거운 굼벵이, 게으른 쥐, 삐걱삐걱 목각인형 등등.

아무리 교주라 해도 칠대가문의 수장과 십대고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천마신교 역사상 오직 진천마만이 그랬다.

단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다 왔군. 저기로 가세나.”

“네.”

외딴곳에 자리한 고급스러운 주루였는데 밖을 지키는 자도, 안에서 맞이하는 이도 없었다.

대신 탁자 위에 수많은 요리가 뜨거운 김을 내며 올려져 있었다.

“중히 여기는 이들과 긴한 대화를 하기 위해 만든 곳일세. 오늘은 특히 단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시간 맞춰 준비해 두고 나가라 했지.”

“영광이네요.”

“앉게나. 일단 먹고 술잔을 나누며 마저 얘기하는 게 낫겠어.”

“그러죠.”

단영은 배를 어느 정도 채우자 정광에게 술을 따라줬다.

자신의 잔에도 가득 채운 뒤 단번에 마시고 정광을 응시했다.

“일을 벌여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건 아네. 사람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자네는 더 안전해지겠지. 더 많은 자유를 부여받게 될 것이고.”

“똑똑하시네요.”

“고맙네. 하지만 완전한 건 아니야.”

“어떤 점이 그렇죠?”

단영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곤륜을 치기 위해 많은 교도들이 신강을 떠났지만 아직도 정신 나간 이들이 많아. 아무리 강해도 한 손으로 여럿을 당할 순 없지. 그뿐인가? 정당하게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면 누가 됐든 자네를 죽여도 할 말이 있어.”

“무서워라. 그래서요?”

단영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의 고요했던 눈이 요사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내 사람이 되게.”

“남색은 관심 없는데요.”

“다행이군. 마침 나도 그렇네. 내 말은 내 밑에 들어와 일을 하라는 것일세.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해. 나와 본가가 자네를 지켜줄 것이야.”

정광은 단영이 그렇게 말할 거라 예상했으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있나?

제발 거둬달라고 떼를 쓰던 꼬마가 나이 좀 먹었다고 나를 부리려고 해?

대답은 뻔했다.

“싫은데요.”

“그럴 것 같았네.”

단영은 정광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어주고 받는 게 맞겠지. 내게 원하는 게 뭔가?”

“그런 말씀 드린 적 없는데요.”

“생사투가 열릴 때마다 나를 자주 쳐다보지 않았는가?”

“그렇긴 하죠.”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게나.”

정광은 술을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단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이대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원래 계획대로 하려는 거죠.”

“계획이라니? 무슨?”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단영의 눈에 어려 있던 요사한 빛이 더 강해졌다.

“이거 참 실망이군.”

“왜요?”

“자네의 무공이 대단한 걸 빤히 알면서도 내가 왜 혼자 왔겠는가?”

“자신이 있으셔서겠죠.”

단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알면서 왜?”

“제가 훨씬 더 강하니까요.”

“재밌군. 자네가 더 강하다 치세. 날 이겨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정광이 씩 웃었다.

“널 보자마자 예전 기억이 떠오르더라고. 반짝이 손을 잡고 총단에 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간청했던 거 말이야.”

“……!”

갑자기 달라진 말투와 기세.

무엇보다 그 말에 담긴 의미에 단영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커진 눈에 마혼(魔魂)으로 전신을 두른 마신(魔神)이 급격히 확대됐다.

“기분이다, 꼬마. 이제라도 너를 거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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