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02화 (401/569)

2부 131화

내가 뭘 어쨌길래

섬랑과 단성오의 대결에 이어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됐다.

천마신교 최고 영재들이 소교주 직위를 놓고 다투는 멸혼생사투!

범상치 않은 수준의 아이들이 날카로운 살기를 발하며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사람들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정광 일행이 앉아 있는 천막이었다.

정광은 섬랑의 작은 머리통과 양 뺨에 난 상처에 금창약을 극도로 얇게 발랐다.

“됐지?”

“하아아. 대인, 조금만 더 두껍게 발라주시죠.”

“과한 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니까.”

“내일 또 싸워야 하잖아요.”

“살가죽만 조금 긁혔잖아. 엄살이 왜 이리 심해?”

섬랑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엄살이라뇨. 피를 철철 흘렸던 거 잊으셨어요? 중상이라고요.”

“중상은 저런 거고.”

정광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싸움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일방적인 살육 후에 살아남은 극소수의 마인들이 붉게 물든 땅바닥에 널브러져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

섬랑은 할 말이 없어 머리를 벅벅 긁다가 상처를 건드려 눈물을 찔끔 흘렸다.

사지가 잘리고 내장이 흘러나온 진짜 중상자들이 널려 있는 판에 무슨 명분으로 떼를 쓰겠는가.

‘저들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지. 그 녀석만 해도…….’

손봐줬던 놈이 떠올라 단가 방계 무리가 있는 천막을 곁눈질로 봤다.

노인들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기력 한번 좋네. 온종일 저러고 있을 셈인가.’

비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사투가 끝나자마자 떼를 지어 덤빌지도 몰랐다.

‘뭐 그러든 말든.’

그 싸움은 섬랑의 것이 아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기에 노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단성오가 치료받는 모습을 주시했다.

‘……그냥 죽일걸 그랬나.’

꼴이 저래서야 원.

얼굴에 빼곡한 자상이야 그렇다 쳐도 턱이 저렇게 부서져서야 뭘 먹고 살까?

‘아. 맛있고 몸에도 좋은 두부가 있지.’

그게 어디야.

몸이 망가져 찬밥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되겠지만 부잣집이니 굶는 일은 없을 거다.

‘성질만 죽이면 말이지. 근데 그게 될까?’

목숨을 걸고 멸혼생사투에 참가한 녀석이다.

그만한 용기와 야망이 있다는 얘기인데 무시받는 삶을 감내할 수 있을 리 있나.

‘심마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리거나 자살해 버릴지도. 가만. 그럴 거면 차라리…….’

섬랑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눈에서 진짜 불똥이 튀었다.

따악!

“악!”

정광이 섬랑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나무랐다.

“중상은 저런 거라니까.”

“으으. 죄송해요. 앞으로 약한 소리 안 할게요.”

정광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다친 곳을 제대로 치료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려는 건 좋은 자세야. 하지만 항상 그럴 기회가 있는 건 아니지. 그런 때를 대비해 적당히 할 줄도 알아야 해.”

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명심할게요. 그런데 대인께선 그 비싼 거를 왜 그리 꼼꼼하게, 두껍게 발라요? 살갗이 살짝 까졌을 뿐인데요.”

정광은 자신의 손등에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르며 설명했다.

“다친 곳을 제대로 치료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려는 건 좋은 자세라고 했잖아.”

“……아하.”

“싸움 관전 안 해? 네가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될 수준이냐?”

“아! 볼게요, 볼게요.”

섬랑은 잡념을 털어내고 비무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가 다음 상대가 될지 몰랐다.

많이 보고 많이 궁리하며 많이 수련해야 했다.

“그래, 그래야지.”

정광은 부상을 완벽하게 치료하고 시선을 돌렸다.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 소가주 단영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관심이 좀 생겼냐?’

말년에 접어들어 모든 게 귀찮아졌을 때, 할아비의 손을 잡고 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간청한 코흘리개 꼬마가 서른다섯 살 먹은 사내가 되어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변하기 힘든 법이지.’

단점도 많으나 쓸 만한 꼬마였다.

그때 그대로이면 좋으련만,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해봐야 했다.

‘아니다 싶으면 패를 바꾸면 되고.’

품이 얼마나 드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길은 많았다.

시선을 돌려 아이들의 혈투를 구경했다.

얼마 안 가 하품이 났다.

“지루해라. 그래도 섬랑보다는 낫네.”

“……고마워요, 대인. 사기가 팍팍 솟네요.”

“집중 안 하냐? 어쨌든 이제라도 끝나 다행이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부가 갈렸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죽이고 숨을 헐떡거렸다.

승패를 판정하는 중년인이 승자와 패자의 이름을 외쳤다.

“서경용 승! 안덕현 패! 비무대를 정리하고 다음 대결을 펼칠 참가자들을 추첨하겠소!”

환호성이 아니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정광과 단가 방계 노인들을 번갈아 보며 소리 죽여 수군거렸다.

“이미 피를 봤으니 결판을 내겠지. 아까처럼 일방적인 학살이 될까?”

“방계라 해도 단가야. 대단한 싸움이 될 게 분명해.”

“허허. 묵영수(黙影手)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묵영권가(黙影權家)의 맥이 이어진 건가?”

“엥? 영감, 그게 무슨 소리요? 아까 그게 묵영수였어?”

“아!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더라니. 맞아! 나도 오래전에 봤었어!”

웅성거림이 커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묵영권가의 후인이 나타나 소란을 일으킨 도박꾼들을 죽이고 단가 방계 무인들에게 원한을 산 것이다!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가운데 정광이 먼저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판돈이 쌓인 탁자로 향했다.

구경꾼들은 일제히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망할. 전신의 힘이 빠지네.”

“후우우. 기다려 보자고.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정광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걸어가 탁자 앞에 섰다.

전주(錢主)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서경용을 택한 대인께서 이기셨습니다.”

“알아요.”

“여, 연승을 축하드립니다.”

“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정광은 탁자 위에 놓인 판돈을 노려봤다.

“달랑 금원보 조각 하나라니. 어떻게 된 거죠?”

전주와 수하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처, 첫판에 대인이 전부 드셔서 다들 개털이 됐는지라 돈을 거는 이가 없어서…….”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실망이네. 악조건이 있다 해도 손님을 모으고 판을 키우는 게 전주의 의무 아닌가요?”

한꺼번에 다 쓸어 담았으면서도 욕심을 부리는 모습이라니.

두 번째 판돈을 걸 때부터 이럴 거라 예상한 점주였지만 막상 힐난을 들으니 생각해 뒀던 말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 믿어주십시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이건 누가 걸었죠?”

전주가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사방에 널린 시신들을 치우고 있던 허름한 행색의 꼬마들이 찔끔했다.

“이것 봐라?”

정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벌써 일확천금을 꿈꿔?”

“으, 으으…….”

바들바들 떨며 처분을 기다리던 꼬마들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본업에 충실하면서 한 방을 노린다. 기특한 녀석들이네.”

“……!”

“그런데 잘 걸어야지. 잘 먹을게.”

“……!”

꼬마들은 울상을 짓고 정광은 씩 웃었다.

“전주님, 오늘 판은 이게 끝이겠죠?”

“그, 그럴 것 같습니다.”

“제 몫 전부 챙겨주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 기대해도 되죠?”

전주가 변했다.

겁먹은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승부사의 기세를 드러냈다.

“대인께 죽을죄를 범하고 대가를 치른 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놈들의 식솔이나 친우가 복수하기 위해 몰려올 겁니다.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도박으로 달려들겠지요.”

“좋네요.”

“오늘 판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신 처리비는 제 사비로 단가에 지급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오늘 수수료는 삼할 적게 먹을 테니 내일도 호쾌하게 승부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끈하시네. 그래요, 그럼.”

“그런데…….”

전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위리단가(尉犂段家)가 대인을 계속 노려보고 있습니다. 단성오야 멸혼생사투를 하다가 다쳤으니 상관없겠지만 원로 중 한 명을 죽이셨으니 귀찮은 일이 생길 겁니다.”

“아. 쟤들, 위리 애들이었어요?”

“…….”

쟤들, 애들이라니.

전주는 이런 막돼먹은 말투를 쓰는 망나니가 자신에겐 왜 존댓말을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광이 설명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적한테만 편하게 대하지 다른 분들은 예의 있게 모셔요.”

전주가 생각하기엔 존댓말이어도 예의는 빠져 있는 것 같았으나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품격이 높으시군요. 저들은 위리 사람들이 맞습니다. 단가 방계 가문들 중에서도 세력이 쾌 큰 편이지요.”

“그래 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죠.”

“맞습니다. 그 나물에…… 네?”

전주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정광은 몸을 돌려 위리단가 노인들을 둘러봤다.

다들 눈을 부릅뜨며 살기를 쏘아내는데 얼마나 원한이 큰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정광은 답례로 친근감 있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줬다.

전주가 경기를 일으켰다.

“대, 대인. 왜 자극하십니까?”

“인사한 건데요.”

“…….”

전주는 정광과 대화하는 걸 포기하고 수하들을 닦달했다.

“어서 재물을 챙겨. 난리가 나기 직전이야.”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들은 더 거센 살기를 내뿜으면서도 달려들지는 않았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래도 안 덤벼? 소가주 꼬마가 주의를 줬나 보네.’

덤벼봐야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일 뿐, 몰살당할 게 뻔했다.

더구나 정광이 묵영수를 펼쳐 묵영권가의 진전을 이었음을 입증한 상황.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새 교주 놈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렇다고 복수를 막을 순 없겠지.’

마도칠대가문은 중원칠대세가보다 본가의 권위가 훨씬 컸으나 본가 소가주라고 방계를 함부로 억누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 밤은 너무 노골적이고. 내일쯤 오려나.’

어쨌든 오늘의 용무는 전부 끝났다.

더 있을 필요가 없기에 천막에 있는 일행을 불렀다.

먼저 민현유에게 말했다.

“재물이 조금 생겼는데 가져갈 손이 부족하거든.”

“조금이 아니라 많군요.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내일도 벌 거니까 넉넉하게 수배해 줘.”

“그 후로도 그러실 겁니까?”

“물론.”

민현유가 나직이 충고했다.

“많은 재물을 계속 가지고 다니시면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훔치려 들 겁니다.”

“향리객잔(香梨客棧)에 둬도?”

민현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희 객잔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것 같습니다?”

“떠보지 말라니까.”

민현유는 대화를 원래 방향으로 돌렸다.

“웬만한 이라면 감히 그러지 않을 것이나 황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요물 아닙니까?”

“일리가 있네. 해결책은?”

민현유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맛살을 모았다가 풀었다.

“글쎄요.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번 돈의 일푼 줄게.”

“그렇지, 그런 수가 있었군요. 마침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다행이네.”

“헌데 백분지 일이라니요.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닙니까?”

“많다 싶으면 적당히 떼고 달아놔.”

“저희 객잔은 항상 그때그때 계산하는 전통이…….”

“은근슬쩍 발을 빼려 하네. 그게 될 것 같아?”

민현유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그와 정광을 번갈아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인. 저 아직 혼인도 못 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혼인할 여인은 있고?”

“왜 또 죽이십니까?”

“더 죽이기 전에 방법이나 말해.”

민현유는 살짝 가라앉은 우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신강은 모든 것을 현물로 거래하기에 이런저런 불편함이 너무 많습니다.”

“허구한 날 서로 뒤통수를 쳐대니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모든 사람과 조직이 그러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신강 전역에 전장을 열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자에게 맡기십시오.”

“연 게 아니라 열려고? 그걸 뭐에다 써?”

“배경도 좋고 능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젊은 편이라 열정도 있지요. 신용도 좋기로 유명하니 떼어먹힐 일은 없을 겁니다.”

“누군데?”

“쿠얼러에 그런 요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단가 소가주입니다.”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렸다.

‘꼬마가 돈놀이를 하려고 해? 단가에서 그걸 허락하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걔가 왜?”

“대인. 내공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있는 건 알지만 그러실 때마다 심장이 쑤십니다.”

“그것참 안됐네. 그래서 왜?”

민현유가 가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전대 교주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뭐?”

“전대 진천마 말입니다.”

“…….”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내가 뭘 어쨌길래?

정광은 고개를 돌려 단영을 바라봤다.

단영도 정광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때 내가 조금 많이 때렸었나? 그래서 미친 거야?’

‘아까부터 자꾸 보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일까?’

그들은 얼마 안 지나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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