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9화
햇살을 즐기며 기지개를 켜다
손까지 흔들어줬건만, 노인들의 살기는 가라앉긴커녕 오히려 더 짙어졌다.
“하여간 예의 없기는.”
정광은 혀를 차고 주위를 둘러봤다.
구경꾼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정광과 노인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당장 싸워 흥을 돋워달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수야 있나.
싸우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은 따로 있지 않은가?
정광은 섬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쟤들이 원한이 많네. 조심해.”
“……대인한테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그게 중요해? 너한테도 이어질 게 뻔한데.”
“……하아아. 저 녀석이랑 붙으면 피곤해질 것 같긴 하네요.”
단가 방계에서 유명한 기재라는 아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체구에 비해 상당히 큰 검을 차고 있는 그 녀석은 웃어른들의 복수를 하려는지 사나운 눈을 번뜩이며 섬랑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광은 푸념을 늘어놓는 섬랑을 따뜻이 위로했다.
“고생해라.”
아이와 노인들은 정말 섬랑을 고생시키려는 듯 배정받은 천막으로 가면서도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정광은 그들에게서 관심을 끊고 민현유의 옆구리를 찔렀다.
“다른 꼬마들도 소개해줘야지.”
“네, 대인.”
여러 무리가 연이어 나타나 출전 등록을 했고, 그때마다 민현유는 가문과 출전자에 대해 설명했다.
정광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전부 머릿속에 담으며 그에 맞는 그림을 함께 그렸다.
그리고 설명이 전부 끝나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간단하게 정리했다.
“아까 그 단성오라는 꼬마를 빼면 다 거기서 거기란 얘기네.”
민현유도 인정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약하진 않습니다. 대진이 어떻게 정해질지는 모르나 쉬운 아이는 없을 겁니다.”
“그야 당연한 거고.”
능력과 자신감이 있기에 목숨을 걸고 출전한 아이들이었다.
섬랑에게 편한 상대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근데 왜 이렇게 거드름을 피워? 빨리 나와서 시작하지 않고.”
정광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군중 속에서 서서히 불평불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자꾸 초조해지잖아.”
“내 말이. 이러다 해지겠구먼. 더 추워지겠어.”
“귀한 몸이라 엉덩이도 무거운 건가? 그렇다 쳐도 너무하네.”
술렁임이 커졌다.
그것은 점점 크기를 키워 흉흉한 살기로 변화했다.
멸혼생사투 쿠얼러 예선을 주관하는 단가 무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뽑으려는 그때.
끼이이익-
장원 대문이 활짝 열리고 눈처럼 하얀 경장을 입은 무인들이 나왔다.
선두에서 걷는 이는 기품이 느껴지는 장년인이었는데, 그가 담담한 눈으로 군중을 둘러보자 한참 치솟고 있던 살기가 잦아들었다.
그의 신분을 알아서였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건 아니었다.
아직도 살기에 취한 마인들이 몇 명 있었다.
비무대 바로 앞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내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이제야 기어 나오는 주제에 여유로운 척하는 꼴이라니. 단가 소가주면 다야? 신분 떼고 붙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비무대에 오른 장년인이 텁석부리 사내를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소. 신분 뗐으니 오시오.”
“크하하하! 내가 못할 것 같냐!”
마기가 폭주해 골수를 망가뜨린 걸까?
텁석부리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장년인을 향해 도약했다.
“뒈져, 이 새꺄!”
칙칙한 대감도(大砍刀)가 장년인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맹렬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장년인은 담담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한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텁석부리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베여 세로로 양단됐다. 좌우로 갈라지며 핏물과 내장을 쏟아냈다.
장년인은 시야가 확 트이자 두 손을 정중하게 모았다.
“고이륵단가 소가주 단영이 인사드리오.”
말이 끝나는 순간 고깃덩어리 두 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군중 속에 남아 있던 살기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섬광 같은 검광이라니.
그런 놀라운 쾌검을 보고도 누가 전의를 불태울까?
꼬리를 말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단 한 수에 모두 굴복한 것이다.
정광은 단영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속에 있는 녀석이었다.
‘코흘리개 꼬마가 많이 컸네. 유치하게 멋부리는 건 여전하지만.’
속은 시커먼 놈이 목소리는 왜 이리 깨끗한지.
맑은 음성으로 이제부터 시작될 행사에 대해 설명했다.
“교주의 크나큰 은혜 덕분에 이번 멸혼생사투는 더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오. 칠대가문의 적손은 예선 없이 본선에 자동 진출하오. 현실적으로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다른 가문의 출전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외다.”
칠대가문의 적손이 예선에 출전하면 한미한 가문의 출전자들은 꽃을 피울 새도 없이 대부분 죽어버릴 것이라는 의미.
약한 녀석들끼리 싸워서 본선에 올라갈 기회를 줄 테니 그런 줄 알라는 얘기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으나…….
정광은 아니었다.
‘공정은 개뿔. 기껏 바꿔놨더니 다시 옛날 방식으로 되돌려?’
어릴 때는 그나마 수준 차이가 심하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칠대가문의 적손을 잡을 기회는 어릴 때밖에 없거늘, 그 가능성을 아예 막아버리다니.
‘차도살인(借刀殺人)이 따로 있나. 이게 그거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예선을 거치다 보면 상처가 나거나 내상을 입을 수밖에.
그런 몸으로 본선에 올라가면 뭐 하나.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칠대가문 적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죽어갈 게 뻔했다.
‘이런데도 대부분 수긍할 수 있도록 작은 혜택을 던져 준 건 제법 그럴듯해.’
단영이 그것에 관해 얘기했다.
“교주께선 본교의 영재들이 너무 많이 죽는 건 원치 않으시오. 그래서 본선에 오른 것으로 만족하는 출전자는 사흉대(四凶隊) 중 한 곳에 들어가 수련하다가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하셨소.”
사흉대는 천마신교 최정예 무력대.
그곳에 속하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뿐이랴.
총단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선 거의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 아닌가?
예선에 참가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눈을 빛냈다.
가능성이 희박한 꿈을 좇아 달리다가 죽느니, 훨씬 쉬운 길을 택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이다.
물론 섬랑은 아니었다.
‘노리려면 최고를 노려야지. 뭐야 그게?’
어떻게든 본선까지 올라가 모조리 쓰러뜨리고 소교주가 되는 것만 바라봤다.
그리고 훗날 교주가 되어 천하를 굽어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정광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방계도 예선에 참가하지만 칠대가문이 진정 원하는 건 적자가 소교주 자리에 오르는 것이라 했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없는 집안 애들끼리만 구르게 해서 일말의 역전 가능성도 없애? 사흉대라는 먹음직한 미끼를 던져 또 솎아내고? 웃기시네.’
전부 무너뜨려 주마.
생각만 해도 짜릿해졌다.
‘흐흐. 이 몸이 모든 걸 뒤틀어서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 윽!’
정광이 섬랑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왜 실실 쪼개? 미쳤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섬랑이 다급히 변명하려고 하는데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영의 헛소리 때문이었다.
“전대 교주께서 멸혼생사투를 열지 않아 확실한 후계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본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진통을 겪어야 했소.”
“…….”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원.
아니, 그놈이 그놈인데 열어서 뭐 하라고.
내가 소교주를 만들고 죽었다 치자,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것 없이 그 녀석에게 개떼처럼 달라붙어 물어뜯었을 게 뻔한데 내가 미쳤다고 그 귀찮은 짓을 해?
“현 교주께서는 그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멸혼생사투를 여셨소. 교도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교주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예선을 시작함을 선포하오.”
“…….”
느끼한 새끼.
하여간 말만 번지르르하기는.
인상을 찡그리는 정광과 달리 천마신교도들은 열광했다.
빨리 피를 보며 환호하고 싶어서였다.
한 중년인이 윗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나무 궤짝을 들고 비무대에 올라왔다.
“대진을 정하겠소! 정숙해 주시오!”
추첨은 간단했다.
중년인은 궤짝에 손을 넣어 휘휘 젓더니 목패(木牌)를 꺼냈다.
목패에는 출전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섬랑!”
섬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첫 번째로 뽑히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광이 알려줬다.
“좋아해. 빨리 끝내고 쉴 수 있게 됐잖아.”
“여, 역시 그렇죠?”
“응. 제일 센 녀석을 먼저 없앨 수 있게 됐으니 더 좋지.”
“네? 아직 상대를 뽑지도 않았는데 무슨 말씀이에요?”
중년인이 목패를 하나 더 꺼내 확인한 뒤 외쳤다.
“단성오! 두 사람은 싸울 준비를 해라!”
섬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광의 말대로 제일 강한 놈이 걸린 것이다.
“하, 하필이면 저놈이라니. 대체 어떻게…….”
정광이 설명했다.
“어떻게긴. 이 정도 수작을 부리는 거야 당연하지.”
단가가 방계 가문에 기회를 준 것이다.
네놈들이 싸지른 똥은 직접 닦으라고 말이다.
단성오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일어나 비무대로 향했다.
정광은 멍하니 앉아있는 섬랑의 등을 떠밀었다.
“뭐 해? 안 가?”
“……미치겠네. 가야죠.”
섬랑의 눈이 번들거렸다.
“다행히 정신 줄은 안 놨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대인. 우리 전략은 애초에 제가 약하니 상대가 방심하게 애쓸 필요 없다 아니었나요?”
“그건 전략이고. 전술은 다르지.”
정광은 내공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차단하고 말을 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패검(覇劍)을 능숙하게 쓴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왜죠?”
“몸이 다 자라지 않아서 패검에 역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거든.”
“아! 검을 휘두르다가 막 빙글빙글 돌 거란 말씀인가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망할. 좋다 말았네.”
“초식과 초식 사이에 짧은 빈틈이 생길 거야. 그걸 노려.”
“어떻게요?”
“시작과 동시에 승부를 걸든가. 첫 공격을 막든지 피하든지 알아서 하고 바로 갚아주라고. 이해했지?”
이해하다마다.
말 그대로 도박을 하되 알아서 하라는 것 아닌가?
섬랑은 어이없는 눈으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정광과 시선을 맞추며 나직이 물었다.
“제가 이길 거라 믿으세요?”
“왜?”
“듣고 싶어요. 이길 것 같아요?”
정광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단성오의 상대인 섬랑이 누군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구경꾼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저 꼬마가 섬랑?”
“일어선 건 저 녀석뿐이잖아.”
“하아. 시작부터 재수가 옴 붙었군. 첫판은 빠져야겠어.”
멸혼생사투는 교의 후계를 정하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으나 승패를 맞추는 도박이 허용된 즐거운 잔치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빠지려고 하자 전주(錢主) 노릇을 하는 대머리 장한이 울상을 지었다.
처음부터 분위기가 달아올라야 수입이 많아지는데 섬랑이라는 꼬마가 초를 치지 않았는가.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혈조.”
“네. 단주.”
“섬랑에게 전부.”
“알겠습니다.”
자오가 전주에게 다가가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건넸다.
“섬랑에게 전부 걸겠소.”
“오! 첫 손님이 아주 화끈하시네! 뜨거운 판이 되겠어! 어디 한 번 봅시다!”
전주는 다들 들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봇짐을 풀었다.
딱 봐도 이길 가망이 없는 꼬맹이에게 거는 걸 보니 큰돈은 아닐 게 분명하지만 첫 포문을 열어준 게 어딘가?
웬만하면 체면을 세워주려고 놀란 음성을 토하려고 하는데.
정말 놀랐다.
“헉! 뭐, 뭐야? 이, 이렇게 많이?”
봇짐은 금원보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오는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도 받으시오.”
“잠깐. 전표는 취급하지 않소.”
신강에서 전표 따위는 통용되지 않았다. 오직 현물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알고 있소이다.”
“음? 가벼운데. 대체 뭐가 들었길래…… 크헉!”
전낭을 열자 그 속에 있던 보석들이 영롱한 빛을 뿌렸다.
자오가 담담하게 경고했다.
“보석값을 후려치면 곤란하오.”
“…….”
“후려칠 셈이오?”
전주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큰 탁자 위에 보석들을 쏟으며 힘주어 외쳤다.
“신용이 있으니 전주를 하는 것이오! 천금을 내셨으니 그에 맞는 가치를 인정해드릴 것이외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다 얼마야?’
‘저걸 섬랑이라는 꼬마에게 걸었다고?’
‘호구다! 진짜 호구가 나타났다!’
흥이 식어 그냥 지나치거나 승리가 확실한 쪽에 걸어 푼돈이라도 벌까 했는데 천하에 다시 없을 호구가 등장해 판을 뒤집은 것이다!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전주에게 미친 듯이 몰려가 금원보와 은자를 내밀며 고함을 질렀다.
“단성오! 단성오에게 걸겠소!”
“나도 단성오!”
“이것들아! 그만 걸어! 배당률이 떨어지잖아!”
“양심도 없는 새끼! 네놈만 호구를 뜯어 먹을 셈이냐!”
천하에 이런 장관이 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부 한쪽에만 걸다니.
섬랑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광이 씩 웃었다.
“네가 이길 것 같냐고 물었지?”
“……네.”
“대답이 됐냐?”
섬랑의 벽안이 뜨겁게 빛났다.
“네!”
옆에 내려놨던 봇짐을 풀어 그 속에 손을 넣었다.
질긴 소가죽에 철편을 덧댄 권갑(拳甲)을 꺼내 두 손에 끼었다.
길이가 한 자쯤 되는 쌍단봉(雙短棒)을 양손으로 쥐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대인, 다녀올게요.”
“전처럼 딴 돈의 일할은 네 것이야.”
“오면서 선물도 가져올게요!”
섬랑은 바로 몸을 돌려 비무대로 향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걸어가 비무대에 올랐다.
판돈을 열심히 챙기면서도 섬랑을 힐끔거리고 있던 전주가 크게 외쳤다.
“그만! 참가자가 모두 비무대 위로 올라갔어! 판돈을 걸려면 다음 판에 걸라고!”
비무를 주관하는 중년인도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지금부터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멸혼생사투의 율법에 따라 본가 무인이 즉결처분할 것이니 주의하시오!”
말로만 경고한 게 아니었다.
단가 무인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아직도 돈을 걸려고 하는 자들에게 살기를 쏘아냈다.
소란이 거짓말처럼 진정됐다.
중년인은 사람들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섬랑과 단성오에게 규칙을 설명했다.
“상대가 더 이상 못 싸우거나 항복할 때까지다.”
두 아이는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어떤 수를 써도 좋다. 시작해라.”
먼저 움직인 건 단성오였다.
섬랑의 정면으로 쇄도하며 큰 검을 번쩍 들었다가 내려쳤다.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인 보법과 위력 있는 패검!
당하는 입장에선 제때 반응하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펼쳐진 살초였지만.
섬랑은 녀석이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정광이 짜 준 전술 덕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패검(覇劍)을 능숙하게 쓴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왜죠?”
“몸이 다 자라지 않아서 패검에 역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거든.”
“아! 검을 휘두르다가 막 빙글빙글 돌 거란 말씀인가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망할. 좋다 말았네.”
그래도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모험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할 것 아닌가?
횡으로 휘두르다간 균형을 살짝 잃을지도 모르니 첫수는 종으로 내려칠 가능성이 컸다.
“초식과 초식 사이에 짧은 빈틈이 생길 거야. 그걸 노려.”
“어떻게요?”
“시작과 동시에 승부를 걸든가. 첫 공격을 막든지 피하든지 알아서 하고 바로 갚아주라고. 이해했지?”
빈틈을 노릴 자신이 없으면 첫 격돌에 모든 것을 걸으라는 의미.
다른 병기들을 놔두고 단단한 쇠로 만든 쌍단봉을 가지고 나온 이유였다.
‘한 번만 막으면 돼!’
단봉 두 개를 엇갈리게 해서 머리 위로 들었다.
단봉이 교차한 부분에 단성오의 큰 검이 부딪혔다.
콰창!
‘윽!’
손에서 시작된 격통이 팔꿈치, 어깨, 가슴을 타고 들어와 배 속을 뒤흔들었다.
위장에서 뭔가가 올라와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보나 마나 위액이 섞인 핏물일 터.
섬랑은 내상을 입었는데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쨌든 막았어!’
이제 갚아줄 차례.
입을 벌려 핏물을 힘껏 토했다.
“쿨럭!”
섬랑의 방어에 놀라는 한편, 쌍단봉에 박힌 검을 빼내려고 힘을 주던 단성오의 시야가 붉게 변했다.
‘큭! 뭐야?’
재빨리 물러나 이어질 암수를 피하고 안력을 회복하려고 하는데.
‘어?’
무언가가 두 다리를 바짝 조였다.
단성오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놈인가!’
섬랑이 한 짓이 맞았다.
핏물을 뿜어내자마자 허리를 숙여 단성오의 두 다리를 잡고 쓰러뜨렸다.
그리고 상체에 걸터앉아 당황한 녀석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훗날 교주가 되어 천하를 굽어보는 것만큼 좋을 리는 없으나 나름 괜찮은 풍경이었다.
‘밥상은 차려졌고.’
섬랑은 화사하게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권갑에 덧대어진 철편들이 햇살을 즐기며 기지개를 켰다.
‘잘 먹겠습니다.’
섬랑은 고사리같이 작은 두 주먹을 힘차게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