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8화
심호흡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잠에서 깨어나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공했다.
소주천을 거쳐 대주천까지 마치자 단전이 뿌듯해졌다.
‘운기조식은 이 정도면 됐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마혼(魔魂)을 적당히 개방했다.
담담한 빛이 서려 있던 두 눈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두 손을 살짝 떨쳤다.
묵영수(黙影手).
하얀 손이 짙은 어둠으로 화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어제 단가 방계 놈들에게 펼친 묵영편처럼 이것 역시 전생에 창안해 자신을 호위하는 묵영대주(黙影隊主)에게 하사한 것.
묵영대 임무 특성에 맞게 마기가 크게 표출되지 않았다.
암습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고 적을 최대한 빨리 격살하는 데 특화된 무공이었다.
‘지금 상황엔 이만한 게 없지.’
묵영대주를 신임했고 그의 후손도 믿었다. 나중엔 묵영대 전체를 그의 가문 사람들로 채워 권가는 묵영권가라 불리게 됐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생존자가 옆방에 있었다.
녀석을 제대로 키워 훗날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보고 싶었다.
‘수빈이를 위협할 만큼 커주면 좋을 텐데.’
격이 맞는 적수가 있어야 삶이 무료하지 않다.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진리였기에 두 아이가 죽을 때까지 서로 치고받으며 즐겁게 살아가길 바랐다.
‘잠깐. 나는 어떡하지? 또 전생처럼 살아야 하나?’
천하는 넓고 넓으니 한 바퀴 돌다 보면 어울릴 만한 놈이 있을지도.
‘뭐 그건 그거고.’
다소 어색했던 초식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형(形)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意)가 없는 초식은 한낱 춤사위에 불과할 뿐. 각 형마다 정해진 경로로 진기를 운용해야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것이 조금씩 숙련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정공(正攻)이라는 새 옷을 걸치고 있다가 오래전에 벗어서 옷장에 넣어둔 마공(魔功)이라는 헌 옷을 다시 꺼내 입는 것이었다.
정파는 초식에 따른 진기 운용을 순리(順理)대로 이끌었으나 천마신교는 정반대로 역리(逆理)로 운용했다.
자연히 역천의 무리(武理)를 담은 마공은 사람의 심성을 뒤틀고 괴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공을 익힌 이가 마공을 익히면 주화입마에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나.
마혼을 품은 정광은 가능했다.
‘여기까지만 할까.’
어느 정도 됐다 싶자 개방했던 마혼을 갈무리했다.
까맣게 변했던 눈이 원래의 맑고 고요한 것으로 돌아왔다.
기지개를 쭉 켜고 나갈 채비를 갖췄다.
‘슬슬 가자.’
옆방으로 갔다.
관엽이 지켜보는 가운데 섬랑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관엽이 목례를 하며 전음을 보냈다.
-지존. 오셨습니까?
-응. 섬랑은 어때?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 보이네.
섬랑은 기특할 정도로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기를 느낀 지 칠주야도 안 됐는데 운기조식을 해봐야 얼마나 할까.
얼마 안 가 눈을 뜨며 짜증을 냈다.
“망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눈곱만큼 녹았잖아. 아까워 죽겠네.”
정광이 피식 웃었다.
“안 될 거라고 했잖아. 왜 헛심을 써?”
“어? 대인,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섬랑이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다.
“그냥 다 녹여서 단전에 몰아 넣어주시면 안 돼요? 하실 수 있잖아요. 네?”
“안 돼.”
“왜요?”
“네 능력이 안 되니까.”
섬랑이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하아아. 전장에 천금을 맡겨 뒀는데도 전표가 없어서 한 푼도 못 쓰는 격이네.”
정광은 섬랑이 기를 느끼자마자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을 먹이고 약효를 적당히 녹여 전신에 퍼뜨렸다.
섬랑이 진기를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단전에 넣었겠지만 이제 겨우 기를 느끼고 천천히 인도할 줄 알았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지금의 네겐 이게 더 나아.”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그냥 아쉬워서 떼 써본 거예요.”
“몸 상태는 어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 있던 섬랑이 씩 웃었다.
“당연히 날아갈 것 같죠.”
온몸에 깃든 약효 덕분에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내공을 끌어 올려 펼치는 폭발력에 비할 바는 아니나, 꾸준히 일정한 힘을 낼 수 있게 된 게 어딘가?
“그만 일어나. 내려가서 밥 먹고 싸우러 가자.”
섬랑이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대인. 전략은요? 말씀해 주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약해빠졌는데도 운이 좋아 가까스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최고지. 그래야 다음 상대가 방심하고 잡기 더 쉬워지니까.”
섬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약하게 보여라, 이 말씀이네요. 제대로 해볼게요.”
“응. 그런데 넌 그럴 필요 없어. 애초에 약하니까.”
“……아.”
“전략이 완성됐으니 그만 가자.”
정광 일행은 일 층에 모여 아침을 먹었다.
오늘도 먹을 만했다.
정광은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 건장한 점소이를 불렀다.
“멸혼생사투에 참가하려고 하는데.”
“무운을 빕니다, 대인.”
“안내 좀 해줘.”
점소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너무 바빠서…….”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데?”
“대인께서 어제 다른 분들을 쫓아내셨잖습니까?”
“덕분에 편해졌잖아.”
“수익도 줄었지요.”
“안내비 줄 테니 그것으로 벌충해. 어차피 구경하려던 거 아니었어?”
점소이는 정광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면 강제로 끌고 가실 셈입니까?”
“물론.”
점소이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저희는 총단의 높은 분과 줄이 닿아 있습니다.”
“총단이면 머네. 나는 가깝고.”
점소이가 탄식했다.
“그게 문제군요. 금원보 세 개입니다.”
“비싸기는. 아깝지 않게 제대로 안내해 줘.”
“맡겨주십시오.”
정광 일행은 점소이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묵묵히 걷던 점소이가 지나가듯 물었다.
“쿠차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아니. 어렸을 때 흘러들어 왔어.”
“고향이 어디 시길래…….”
“중원.”
“신기한 일이군요.”
“그러게 말이야. 팔려서 그런 곳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
점소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물으면 네가 안타까워질걸.”
점소이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렸다.
“숙박비와 식사 요금을 오늘치까지만 지불하셨는데, 일차 예선을 통과하기 힘들 것 같아 그러신 겁니까?”
“묵어보고 정하려고 그랬지. 앞으로도 묵을 거야.”
“저희 객잔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객잔도 그렇지만 너를 봐서 그런 거야. 이름이?”
“민현유라고 합니다.”
“현유라 부를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걸 내줘. 그러면 서로 좋을 거야.”
점소이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놈들을 걱정하란 얘기네.”
“워낙 의심이 많고 거친 곳이라 말입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의미가 담긴 충고였다.
정광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상노를 떠올렸다.
‘염탐꾼이 들어오면 알아서 잘 막겠지.’
못 막아도 상관없다.
‘그놈들이 캐낸 정보는 돈이나 고문으로 얻어낸 거짓된 내용이라고 우기면 돼.’
사장된 묵영권가의 비전 절기를 실제로 펼쳐 보이는 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따지는 놈은 힘으로 누르면 되고.’
결국엔 강자존(强者尊)이다.
그 교리를 실천하며 새 교주의 멱을 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나저나 적당히 좀 할 것이지. 따가워 죽겠네.’
어제 쫓아낸 중년인이 얼마나 떠벌렸길래 이 모양인지.
백색 경장을 입은 단가 무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민현유가 몸을 가늘게 떨며 정광을 칭찬했다.
“대인. 인기가 무척 많으십니다.”
“그러게.”
“괜한 오해를 사긴 싫어서 말입니다. 이만 돌아가도 되겠는지요?”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으면서 무슨. 이미 늦은 거 알잖아. 네가 해를 입진 않게 해줄게.”
“어떻게 말입니까?”
정광은 크게 외쳤다.
“현유! 강제로 데려와서 미안! 그래도 이왕 온 거, 끝까지 안내해 줘! 됐지?”
“……안 하느니만 못하군요. 저쪽입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거대한 장원이 보였다.
장원 크기에 걸맞게 높이 솟은 대문 위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이네.’
정광은 시선을 내렸다.
대문 앞 큰 공터에 비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벌써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상황.
민현유가 앞서가며 길을 열었다.
“멸혼생사투 참가자와 그 일행입니다. 조금씩만 비켜주십시오.”
평소라면 네놈이 뭔데 나를 귀찮게 하냐며 칼부림이 일어났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 재밌는 행사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좀 지나가겠다는데 협조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인상을 쓰면서도 길을 틔워줬다.
덕분에 정광 일행은 편하게 지나갈 수 있었는데, 구경꾼들이 떠드는 소리에 섬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꼬마는 뭐야? 잘 봐줘야 일고여덟 살쯤 될 것 같잖아.”
“그러게 말일세. 대부분 열두 해를 꽉 차게 산 애들을 내보내는데. 저 녀석 부모가 애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보군.”
어린아이는 한 살만 더 먹어도 신체 능력이 확연히 달라지지 않는가?
설령 천재라 해도 그렇지, 사람들이 보기에 섬랑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퉤. 저 녀석이 싸우는 판은 배당이 뻔하겠군. 그냥 반대편에 걸어서 푼돈이라도 벌어?”
“미쳤어? 인생은 한 방이야. 운을 아끼고 다른 판에 질러야지.”
섬랑은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활짝 폈다.
자신을 얕보는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평가가 더 곤두박질쳤다.
“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높네.”
“저놈 싸울 때 측간에 다녀오면 되겠어. 빌어먹을. 순식간에 끝나 버려서 그럴 틈도 없으려나?”
“야박하기는. 출전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왔는데 너무 기죽이지 마.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재밌어지지.”
“…….”
섬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쨌든 정광 일행은 비무대 앞까지 나아가 옆에 있는 천막에서 출전 등록을 끝마칠 수 있었다.
단가 무인이 관엽에게 받았던 목패(木牌)를 돌려주며 손짓했다.
“저 천막에서 대기하시오.”
“알겠소.”
중년에 접어든 단가 무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광을 노려봤다.
“네가 묵영권가의 무공을 쓴다는 말이 돌던데. 사실이냐?”
“응.”
“듣던 대로 건방지구나. 예선이 끝나면 그 잘난 비기를 가르침 받고 싶다.”
“이제 제자는 더 안 두는데.”
“……양팔과 다리 한 짝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심장을 뽑아야겠군.”
“줄부터 서.”
“무슨 의미냐?”
정광이 씩 웃었다.
“지금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염치없게 새치기하면 쓰나.”
시야에 들어오는 단가 무인들은 전부 정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들끼리 싸워서 순서를 정해 오는 게 낫지 않겠어?”
“…….”
중년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에서 짙은 혈광이 쏘아졌다.
“넌 살아서 쿠얼러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넌 그전에 죽을 거고. 그때 보자고.”
정광 일행은 배정받은 천막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민현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직이 책망했다.
“대인. 짧은 시간이나마 저희 객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더 묵을 건데.”
“가능할까요?”
“이 녀석이 이기면.”
아까부터 계속 참고 있던 섬랑이 발끈했다.
“제가 오늘 져서 쿠차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말씀이에요?”
“이기면 더 있을 거란 얘기지.”
“그게 그거잖아요.”
정광은 손을 들어 섬랑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심호흡해서 긴장 풀어.”
“긴장이라뇨. 아무렇지도 않은데.”
섬랑은 투덜거리면서도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얼마 안 가 호흡이 진정되고 안색 또한 한결 밝아졌다.
“대인. 준비됐어요.”
“이제 좀 봐줄 만하네. 그 상태를 유지해.”
정광은 대답도 듣지 않고 시선을 민현유에게 옮겼다.
“출전하는 다른 꼬마들에 대해 알려줘.”
민현유는 출전 등록을 하는 다른 무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객잔에 박혀 일만 하는 몸인지라. 많은 건 모릅니다.”
“확실히 아는 것만.”
“지금 등록하고 있는 무리는 대인과도 연이 있습니다.”
“어제 박살 냈던 애들 가문이야?”
“맞습니다.”
“다 모르는 얼굴인데.”
“대인께서 봤던 분들은 본가에서 묵는 게 불편해 객잔을 이용하려고 했던 분들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다 노인들이네.”
“젊은 분들은 대인 덕분에 침상 신세를 지고 있겠지요.”
“꼬마는 어때?”
“단가 방계 중에선 유명한 기재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패검(覇劍)을 능숙하게 펼친다고 들었습니다.”
정광은 아이를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섬랑보다는 나아.”
“대인!”
“평정을 유지하라니까.”
“……후우우.”
섬랑은 다시 심호흡을 하고 정광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오. 반가운 얼굴이 보이네.”
장원 대문이 살짝 열리고 어제 쫓아냈던 중년인이 나왔다.
그는 노인들과 바로 합류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정광을 발견하고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노인들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맺혔다.
정광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생각보다 재밌어지겠어.”